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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한자몽 May 13. 2021

감정의 원산지


유통기한은 경우에 따라서 한 달이 넘어도 몇 개월쯤엔 그냥 먹기도 한다.

먹는 것에 아주 뭐 그닥 예민하지 않은 이유도 있을 거고,

싸는 것에 있어 아주 뭐 그닥 예민하지 않은 장기를 가진 이유도 있을 테다.

하지만 얼마 전 한창 이슈였던 국가 간 사건 때문에도 그렇지만

원산지는 유통기한과는 좀 다른 차원이라고 여겨진다.


나에게 원산지는 좀 중요하다.



휴직을 하고 나서는 여러 감정들에 집중할 때가 잦아졌다.

어쩔 수 없이 삶이 정신없이 돌아가다 보면 아무래도 감정에 집중할 여유조차 없는 것은 슬프지만 사실이니까.

감정에 집중한다는 것은,

이것이 무언가로 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줄 땐 매우 요긴하다.

가령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힘이 되어주기도 하고,

어떤 음악이나 공연에 한층 더 감격하게도 한다.

혹은 어떤 이의 어떤 사연 속에 보다 깊은 공감을 보내게 되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감정이라는 것은 참 묘한 것이라,

나를 전혀 컨트롤하지 못하는 수렁으로 빠져들게 하여

참혹하고 혹독한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기도 한다.


오늘 아침 눈을 떴는데

몸이 무거웠고 기분이 마치 요 근래의 내 주식 같았다.

바닥인 줄 알았는데 지하가 있었고,

그래 뭐 지하주차장 정도는 있어야지 하고 마음을 내려놓을 때쯤 지하에 거대 벙커를 짓는 요노무 요즘 주식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생각했다.

왜 그럴까.


이유를 굳이 찾자면 여러 가지를 대 볼 수 있을 테다.


날이 안 좋아서

몸이 안 좋아서

상황이 안 좋아서

그 정도?


별 거 아니라 할지라도

감정의 원산지를 알아내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가령

‘그래 내가 pms가 또 가까워 왔구나. 그래그래 지나면 좋아질 거야.’

‘그 일이 좀 해결되면 스트레스에서 빠져나올 수 있겠지.’ 등등

원산지를 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거나 해결책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원산지를 알면 적어도 대처할 수 있어진다.

하지만

원산지가 불분명한 슬픔은 힘이 세다.

출산 이후로 무게의 crescendo가 꾸준히도 poco apoco를 진행하는 나를 충분히 넘어뜨리고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

이건 뭐 원산지를 알 수가 없으니 여기서 헤어나지 위한 묘수를 찾는 것도 어려워진다.

상쾌한 음악은 그 음악과 반대 행보의 감정이라는 것에 슬프다.

맑게 웃으며 달려가는 아이는 언젠가 이런 슬픈 마음의 무게를 짊어질 어른이 된다는 것에 가슴 아프다.

파란 하늘은 맑아서 슬프고 흐린 하늘은 흐려서 슬픈. 원산지 불분명의 슬픔.

슬프자면 다 슬프다. 이 으른의 삶은 참 버라이어티 하게 꾸준히도 슬프다.


어쩌면 요 근래 나를 자주 방문하는 요 ‘슬픔’의 원산지는 ‘으른의 무게’로 부터 혹은 ‘으른의 삶에 대한 경험치’로 부터 오는 슬픔일지도.

아 그랬구나.

이런 제3세계가 또 있었구나.

새로운 원산지를 발굴하게 된 으른의 나는 또 으른의 방법으로 이것을 짊어지고 나가야 할 테지.


웃다가 뽕 나와버린 방귀소리에 끝도 없이 이어지는 깔깔거림으로 채워내던 날,

사탕 하나가 눈물 뚝뚝 흘릴 슬픔을 한방에 날려버리는 힘을 갖고 있던 날,

감정의 원산지 따위를 알아내려고 하기도 전에 살랑살랑 다시 콧바람으로 채워지던 날,

나에게도 그런 날들이 있었다.

하지만 돌아가고 싶진 않다.

어차피 당면할 슬픔이라면 내 기꺼이 지금 받으리라.

매는 언제나 먼저 맞는 것이 옳은 법이니까?



내가 나의 이상형과 완전 거의 반대라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한

센스 없고 참으로 노잼의 그가 좋아졌던 것, 그리고 어느덧 10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하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그는 원산지 불분명의 감정선이 거의 없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한다.

그는 원산지 불분명의 감정은커녕 오히려 원산지가 뻔히 보이는 투명 물고기에다가 감정의 활화산을 보유하고 있는 그런 시뻘건 사람이니까.


그래.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경로로 나의 결혼이 잘 한 선택이란 뜬금없는 성취감에 뿌듯해진다.

이렇게 또 빠져나오네.

원산지 불분명의 슬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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