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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끼라 Mar 23. 2021

덕질했던 거 후회하게 만드는 사람이 제일 나빠

가장 오랜 기간 덕질했던 B

B는 내가 가장 오랜 기간 덕질을 했던 보컬리스트다. 그에게 입덕하기 훨씬 전부터 그의 노래들을 노래방에서 완창 할 수 있을 만큼 잘 알고 있었다. 데뷔한 지 오래된 데다 타이틀곡으로 내세운 발라드곡들이 대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B가 속한 그룹명이나 음악은 알았어도 B의 얼굴은 물론 이름조차 몰랐다. 딱히 궁금하지도 않았다. 잘나가는 발라드 가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일교차의 폭이 넓어져 서늘한 바람이 불던 가을의 저녁. 여느 때처럼 언니와 나는 뮤직비디오를 연속으로 틀어주는 TV 채널을 보며 함께 밥을 먹었다. 그날의 콘셉트가 ‘쓸쓸한 가을밤에 듣고 싶은 명 발라드 특집’이었는지, 계속해서 발라드곡의 뮤직비디오만이 재생됐다. 평소에도 가요를 자주 들어왔기에 대부분 다 아는 곡들이었다. 단지 BGM에 지나지 않은 익숙한 음악들을 한쪽 귀로 흘려들으며 밥을 먹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다.


유독 지루했던 곡이 끝나갈 때쯤 TV로 눈을 돌려 다음 곡의 뮤직비디오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어두워졌던 화면이 점차 밝아지면서, 왼쪽 아래에 하얀색 자막으로 B의 그룹명과 노래 제목이 몇 초간 안내됐다. 최근에 나온 신곡인 것 같았다. 피아노 연주로 차분하게 시작된 노래는 서정적인 멜로디와 호소력 짙은 B의 목소리가 더해져 감정을 증폭시켰다.


“이 노래 되게 좋다.”


1절이 끝나자마자 언니에게 말을 건넸다. 수저를 내려놓고 뮤직비디오를 보며 음악에 더욱 귀를 기울였다. 당시 학교 선생님을 짝사랑하며 감성 충만한 사춘기를 나고 있던 나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린 가사에 목이 멨다.


노래가 끝나자 귀가 뜨인 것만 같았다. 살면서 들어본 수만 가지의 노래 중 그토록 내 마음에 와 닿았던 노래는 없었을 것이다. 밥을 먹다 말고 당장 컴퓨터 앞으로 달려가 그 신곡과 더불어 여태 발매된 B의 모든 음원을 합법적으로 다운로드 받았다. 불법 다운로드가 성행하던 시절이었던 데다 무료로 곡을 받을 수 있는 경로를 알고 있었음에도, 꼭 정당한 값을 지불하고 듣고 싶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매일매일 그들의 음악만을 반복해서 듣다가 며칠 뒤 B의 팬카페에 가입했다. 출중한 외모나 이성적 매력이 아닌 오직 실력만으로 입덕하게 만든 건 B가 처음이었다.     


가까운 친구들은 아이돌 그룹을 좋아했기에 함께 B를 덕질하거나 그들의 콘서트에 같이 가줄 사람은 없었다. 더군다나 중학생이었던 우리에게 10만 원 가까이 되는 콘서트 티켓 비용이란, 몇 달 동안 용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만 겨우 낼 수 있는 큰돈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내 인생 최초의 콘서트는 솔플(‘solo play’의 줄임말로 ‘혼자 덕질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로 이루어졌다. 어린 내가 걱정됐는지 엄마와 언니가 콘서트장 앞까지 데려다주긴 했지만.


첫 번째 곡이 시작됐을 때 느꼈던 감동은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떠오른다. 무대와 객석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얇고 투명한 천막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차르르 떨어지며, 푸른 조명이 무대를 비추고, 그의 목소리가 공연장을 가득 메우던 순간. B를 난생처음 눈앞에서 만나게 된 꿈같던 순간. 아직도 그날의 날짜와 첫 곡의 제목, 그가 입었던 옷의 색깔과 공연장을 가득 채운 자욱한 연기의 냄새까지도 기억이 난다.


그날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는 표현이 과장이 아니라는 걸 실감했던 날이었다. 우리가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 안에서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게 마냥 신기하고도 황홀했다.


B를 사랑했으며 그의 노래들을 사랑했다. B를 통해 나의 음악적 취향을 알아가고 그가 만든 노래의 가사들을 곱씹어보면서 사랑과 이별에 관한,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형태의 감정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를 통해 세상을 알아가며 나는 그렇게 성숙했다. 그럴수록 B에 대한 마음도 깊어만 갔다.


정신없이 B의 덕질을 하다 보니 몇 년의 시간이 금세 흘러갔다. ‘그 사건’만 아니었더라면 여전히 그들의 음악을 즐겨 들었을지도 모른다.    

 



입시 공부를 위해 주말마다 출석체크 미션을 수행하듯 집 근처의 도서관을 다니던 어느 날이었다.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전, 문자메시지로 대화를 주고받던 때였다. 분명 우리나라 말인데 옛말과 한자어가 뒤섞여있어 외계어 같아 보이는 ‘관동별곡’을, 한 문장 한 문장 현대어로 해석하며 꾸벅 졸고 있던 내게 한 통의 중대한 문자메시지가 날라왔다.


희라야 너 B 기사 터진 거 봤어?


B는 사소한 일로도 인터넷에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는 셀럽이 아니었다. 오히려 B의 음악은 자주 들어봤어도 B의 예명이나 본명은 모르거나, 예명을 본명으로 아는 사람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그는 방송은 물론 라디오 프로그램 같은 곳에도 웬만하면 출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사생활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별로 없었다. 새로운 앨범이 나온다거나 콘서트를 한다고 하지도 않았는데 기사라니? 큰일이 터졌다는 것을 직감하고 도서관 밖으로 뛰어나와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는 나에게, 내가 여태 들어본 소식 중 가장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B가 성범죄를 저지른 게 밝혀져 인터넷이 난리가 났다는 것이었다.


전화를 끊은 뒤로 손이 덜덜덜 떨려서 더는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함께 도서관에 갔던 친구에게 먼저 집에 가보겠다고 말하고는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그날 저녁, 뉴스에서 B의 이름을 보게 되었을 때 얼마나 울었는지 온몸에서 열이 끓었다.


다음 날 학교에서도 괜찮냐고 묻는 친구들의 위로에 울음이 터져 아침 자습 시간 내내 울다가, 선생님께 거짓말을 하고 조퇴를 했던 기억이 난다. 한동안은 우울 속에 잠겨 식음 전폐하며, 누군가 툭 건들기만 해도 눈물을 쏟아 상대방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고작 17살이었던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버거운 배신감이었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난 뒤 이사를 하게 됐다. 새벽까지 이삿짐을 싸다가 책장 맨 아래층 가장 구석진 곳에서 차마 버리지 못했던 먼지 쌓인 B의 음반들을 발견했다. 왕복 5시간 거리에 있는 지역까지 가서 기어코 받았던 싸인 시디였다. 네임펜 잉크가 번진 시디를 가만히 보고 있으니 오만가지 생각이 들어 그냥, 쓰레기통에 버려버렸다. 마음속에 남아있던 아련한 잔 감정들까지 함께. 그제야 속이 후련했다.


B의 덕질을 하며 처음 해본 일이 많았다. 콘서트도 처음, 팬 사인회도 처음, 시중에서 팔지 않는 그들의 옛 앨범을 중고로 구하기 위해 1호선 끝자락까지 갔던 일, 직접 쓴 편지를 전해준 것까지. 나의 학창 시절에서 그를 도려내면 남은 추억은 절반도 안 된다. 나에게 B란 그런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 B란… 지인들과 장난 삼아 흑역사 배틀을 할 때 B의 오랜 팬이었다는 사실을 밝히면 다들 내가 이겼다고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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