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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끼라 Mar 23. 2021

꿈속의 괴물도 이겨내 버린다던 그는 괴물이 되었다

덕질 인생의 문을 열어준 A

11년 인생을 통틀어 그렇게 매력적인 사람을 본 적은 없었을 거다. 내 덕질 인생의 문을 열어준 A의 이야기다.


A는 미술실 서랍장 위에 줄줄이 놓인 백색 조각상 같은 전형적인 미남형 얼굴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노래와 춤 실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고작 윙크 한방으로 내 마음을 통째로 앗아가 버릴 만큼 매력적인 사람인 것만은 확실했다.


그는 그룹 내에서 언제나 인기 순위 상위권을 차지했다. 귀엽고 상큼한 외모와 몸에 밴 듯 넘치는 애교, 큰 키와 옷맵시가 잘 받는 체형 덕분이었으리라. 시대를 잘 타고난 캐릭터 덕분에 예능 프로그램에도 여러 번 출연하며 OOO신드롬을 일으켰다. 천생 아이돌이라는 말은 그를 위해 존재하는 수식어인 것이 분명했다.


부모님께 받은 용돈을 모아 그들의 앨범을 사고, 학교 앞 문방구에서 초상권을 무시하고 무작정 만들어 파는 엽서, 스티커, 책받침 따위의 여러 굿즈들을 사 모았다. 연예인 관련 물품을 내 돈 주고 사본 건 처음이었다. 하루가 멀다고 기하급수적으로 A의 팬은 쭉쭉 늘어갔다. 문방구에선 A의 굿즈들만 일찍이 동나버렸고, 슈퍼마켓에선 그의 스티커가 들어 있는 과자만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질 않았다.


전국의 초중고등학교 여학생들 사이에선 ‘A부인은 누구인가?’를 주제로 가벼운 실랑이가 매일같이 벌어졌다. 우리 반에서도 자칭 A부인은 나를 포함해 최소 5명 이상은 됐다. 나는 세상에서 그를 가장 좋아하는 건 나니까 오직 나에게만 그의 여자 친구가 될 자격이 있다고, 나중에 어른이 되면 여덟 살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그와 결혼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 순진하고 강한 믿음 덕에 친구들과의 실랑이에 참여하지 않고도 정신 승리를 할 수 있었다.


그는 팬이 아닌 일반 대중들에게도 이미지가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 미디어 안에서 그는 순하고, 착하고, 귀여운 이미지의 연예인이었다. 수많은 인기를 얻고 승승장구하려던 찰나. 인생은 그렇게 쉽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듯 그에게도 악재가 닥쳤다. 장기간 법적인 문제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한동안 연예부 기사를 제외한 어디에서도 그의 얼굴을 좀처럼 볼 수 없었다. 법적 싸움이 길어지자 그는 천천히 음악과 연기를 병행하며 연예계 활동을 지속하려 애썼다. 사람들은 그에게 얽힌 법적 문제들을 안타깝게 여기며 그를 응원해주었다.


A가 문제에 휩싸이기 전, 그룹의 활동이 뜸해졌을 때쯤 이미 나는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린 상태였다. A가 데뷔한 이후로 여기저기서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내 취향의 아이돌들에게 입덕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A에게 일어난 문제에 대해서도 그가 피해자라고만 알고 있었을 뿐, 그 이상은 골치가 아파서 깊게 파고들고 싶지 않았다. 박수칠 때 떠나란 말과 같이 A가 반짝반짝 빛나던 시절에, 바짝 그를 좋아하고는 쿨하게 떠난 것이다.




그리고 몇 년 전. A의 덕질을 얼른 그만둔 게 얼마나 잘한 일인지 깨닫게 된 사건이 일어났다. A가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기사가 터진 것이다. 하루아침에 인터넷이 발칵 뒤집혔다. 그 사건 이후에도 A는 각양각색의 추잡한 범죄를 저질러서 그를 덕질했던 내 또래 친구들에게, 그를 좋아했던 시절의 소중한 추억을 흑역사로 재탄생시켜주었다. 기사 헤드라인에 A의 이름과 범죄 관련 단어들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똑똑히 지켜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일상 속에서 A가 저지른 만행들이 하나둘씩 세상에 드러나자 사람들은 그에게 일종의 배신감을 느꼈고, 미디어가 만들어낸 이미지란 얼마나 감쪽같고 무서운 것인지에 대해 논했다. 유명한 연예인의 범죄 사건을 처음 본 것도 아닐 텐데 여기저기에선 다른 연예인을 덕질하던 팬들이 그 사건을 계기로 탈덕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방송은 믿을 게 못 되고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도 뒤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닐지 모른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틀린 말 하나 없었다.


일찍이 A의 덕질을 그만두었기에, 나는 그가 터뜨린 사건들로 인해 상처를 받았다거나 울면서 잠드는 일은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A가 그랬다는 사실에 놀라긴 했지만 그게 현재 나의 덕질에 영향을 미칠 만큼의 충격은 아니었다. 어쩌면 A를 나보다 한참 더 오래 좋아했던 친구가 그 사건을 두고 ‘그럴 줄 알았다’라고 했던 말이 충격을 감해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래전부터 A는 나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지만 2000년대 초반에 그가 데뷔하지 않았더라면 내 인생에 덕질이란 없었을 거다. 그것만큼은 변명할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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