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인간이 어느 것 하나에 푹 빠져버리면 저렇게 미치기도 하는 거야.”
작년 봄의 어느 날, 아버지가 끌끌 혀를 차며 말씀하셨다. 전 세계를 고통 속에 잠식시켜버린 코로나19 바이러스와 그것이 우리나라의 한 지역에서 전국구로 퍼지게 된 데 한몫했던 사이비 신도들에 관한 이야기가 TV에서 흘러나오던 순간이었다.
분명 사이비 신도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라는 걸 아는데도, 나는 몰래 물건을 훔치려다 들켜버린 도둑처럼 마음이 뜨끔해서 먹던 과일을 내려놓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내가 사이비도 아닌데 말이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말씀대로 ‘어느 것 하나에 푹 빠져서 미치기도 했다’라는 점에선(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그들과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겠다.
나는 삶의 절반 이상을 누군가의 팬으로 살아온 ‘덕후’다. 그것도 아주 지독한. 가수는 물론 개그맨, 배우, 해외 연예인 등 여러 사람의 덕질을 섭렵해왔다. 그중에서도 나의 덕질사(史)에는 특히 뮤지션들이 많았다. 밴드, 인디 가수, 다섯 팀의 아이돌 그룹까지. 그간의 나의 최애를 한 명씩 일일이 나열해보자면, 박, 최, 양, 전, 정, 이, 두 번째 이, 세 번째 이, 김, 또 다른 김, 신, M, 임…… 당장 손가락을 접어가며 세어보니 양손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대략 열다섯 명 정도 되는 것 같다. 지금도 한 아이돌 그룹을 좋아하고 있다.
이쯤에서 고백할 것이 하나 있다. 사실 이 글은 작년 봄에 독립출판물로 출간되었다. 지금도 몇몇 독립서점에서는 그 책이 팔리고 있다. 여러 군데에서 재입고 문의가 들어왔지만 재쇄를 찍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다시 쓰고 있는 이 글은 그 책의 내용을 대폭 수정한 개정판이라고 보면 되겠다.
왜 굳이 재쇄를 찍지 않고 바로 개정판을 쓰느냐면, 인정하기까지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때 스스로 뱉은 말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독립출판물 프롤로그에 나는 아래와 같이 적었다.
얼마 전까진 한 아이돌 그룹을 파왔다. 내가 그들의 팬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정도로 시끄럽게, 열렬히도 사랑했다. 마음이 식은 건 아니므로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몇 년 동안 나에게 그들이란 내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이자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 글은 덕질 예찬 일기가 아니라 탈덕 실천 일지에 가깝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육체적, 정신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덕질이 내 삶의 일부… 아니,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던 만큼 단번에 그만두기가 너무도 어려워서 스스로 의지를 돋우려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즉, 이 글의 본질은 나의 탈덕에 있다. 제법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선 첫 번째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그토록 열과 성을 다해 덕질을 해온 내가, 어쩌다 덕질을 장려하는 글이 아닌 탈덕 지향적 글을 쓰게 된 것일까.
(중략)
마지막으로 이 글은 혹시라도 내가 다시 덕질판으로 돌아가는 일을 경계하고자 만천하에 탈덕을 선서하는 것이다. 그러니 언제든 누구든 나에게 찾아와 물어봐 주었으면 좋겠다. “설마 아직도 J 사랑하고 있는 거 아니지?” 하고 말이다. 당당히 ‘이제 덕질 안 해요’라고 답할 수 있는 그 날이 이른 시일 안에 찾아오길 바라며, 이야기를 시작해보겠다.
위의 세 문단 중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우선 저 글을 쓸 당시에 덕질했던 아이돌 그룹과 J를 탈덕하는 데는 성공했다. 최근까지도 그들의 굿즈를 당근 마켓을 통해 팔다가, 안 팔리는 건 무료로 나눔까지 하며 싹 다 정리했다. 노래는 내 취향이라 여전히 즐겨 듣지만 그들의 소식은 잘 모르는 데다 아예 궁금하지도 않다.
그러나 ‘이제 덕질 안 해요’라고는 말할 수 없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지금도 누군가를 덕질 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년 이전과 지금 나의 덕질 방식은 다르다. 아니, 방식은 비슷할지언정 ‘덕질’이라는 행위에 대한 인식과 태도, 몰입도는 분명 달라졌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뒤에서 더 구체적으로 다루도록 하겠다. 약 20년 정도 덕질을 해온 내가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건 모두 그 독립출판물 덕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에 다시 이 글을, 새로운 버전으로 세상에 내놓기로 했다. 이전 버전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강건한 탈덕 권장글’이었다. 다시 쓰는 이번 글은 ‘건강한 덕질&탈덕 장려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에는 내 생의 모든 덕질 스토리가 담겼다. 과거에 덕질했던 이들 중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여섯 사람의 이야기와 글을 집필하면서도 진행 중이었던 덕질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탈덕을 실천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과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까지. 덕질의 희로애락을 포함하여 그와 관련한 모든 것을 총망라해보았다.
탈덕을 하고 싶지만, 혹은 현생을 지키는 수준의 덕질을 하고 싶지만 그게 맘처럼 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는 공간인 브런치에 이 글을 업로드하기로 했다. 그들에게 이 글이 필요한 이유는 제각각 다를 것이다. 학업에 집중해야 하는 학생일 수도 있고 취준생일 수도, 공시생일 수도 있다.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데 그것에 지장을 줄 만큼 덕질에 몰두하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공통점일 것이다.
또는 어떠한 깨달음이 있어서 탈덕을 다짐했을 수도 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결론적으로 이 글은 누군가의 실천력과 행동력을 돋우기 위하여 쓰였다. 당장 탈덕할 의향이 없더라도 본인 스스로 ‘나 한 덕질한다’라고 자부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드라마, 영화, 연예인, 뮤지컬, 2D 애니메이션 등 덕질의 종류는 무수히 많지만, 이곳에서는 그간 내가 주로 해왔던 ‘남성’ 연예인을 덕질하는 ‘여성’ 팬의 이야기만을 다룰 것임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