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여자들은 연애만 하면 바보가 되는가?”
2008년, 광우병 논란의 핵심인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를 쟁점으로 전국에서 촛불집회가 일어날 때였다.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한창 시위가 진행되고 있는 번화가를 지나다가, 무대 위에서 마이크를 잡고 시민들을 향해 발언 중인 앳된 여학생 목소리를 들었다. 그 여학생은 옆 학교 3학년 5반 반장이라며 간단히 자신을 소개했다. 어? 나도 3학년 5반 반장인데. 반가운 마음에 그 애의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였다.
사람들 사이에서 까치발을 들고 무대 쪽을 바라보니, 그 애의 또렷한 두 눈은 반짝 빛나고 있었다. 용감해 보였다. 그 애는 자신의 목소리가 커다란 앰프를 타고 온 동네에 울려 퍼지길 바라는 듯이 또박또박 자신의 의견을 논리정연하게 이어갔다. 곧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 요즘 애들은 참, 아는 것도 많고 똑똑하다니까. 어른들의 칭찬이 일색이었다. 비록 나는 아는 것도, 자신감도 없어서 그 애처럼 무대 위에 설 수는 없었지만, 똑같이 3학년 5반 반장이었던 나와 그 애를 동일시하며 괜스레 뿌듯함을 느꼈다. 멋진 친구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같은 고등학교에서 만났다. 선명하면서도 총기 어린 그 애의 두 눈을 내가 먼저 알아봤다. 여전히 공부도 잘하고, 교우 관계도 좋고,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은 아이였다. 그 애의 활달한 성격 덕분에 우리는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는 정도의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사이로 지낼 수 있었다. 한 번도 같은 반을 해보지 못한 채, 졸업 이후 우리는 자연스레 헤어졌다.
몇 년이 지난 뒤 친구들에게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강단 있고 주체적이었던 아이가 폭력적인 남자와 연애하느라 주변인들로부터 줄줄이 손절당하고 있다고. 자신을 진심으로 생각하고 연애를 뜯어말리던 친구에게 “네가 명품백 사줄 거 아니잖아?”라는 명대사까지 남기기도 했다고. 그 애는 어느새 동창들 사이에서 ‘지팔지꼰(지 팔자 지가 꼰다)’의 대명사가 되어 있었다.
나는 안타깝거나 화가 나기보다도 의아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머릿속은 온통 물음표로 가득 찼다. 왜? 도대체 왜 그러고 살지? 원래 안 그랬잖아. 내가 아는 그 애는 똑똑하면서도 재미있고 당찬 애였단 말이야. 뭐가 아쉬워서 그렇게 멍청하게 살고 있는 거야?
그리고 얼마 후, 나는 퉁퉁 부은 눈으로 거울 속의 나 자신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우리나라 2030 여성 대다수가 2016년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 사건을 계기로 페미니즘에 각성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어째서 그 사건이 단순한 ‘묻지마’ 살인 사건이 아니라 ‘여성혐오’ 살인 사건으로 명명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본격적으로 사회적 논의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먼저 깨달은 여성들은 자신의 목소리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이 나라는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고, 사회는 바뀔 때가 되었고 우리도 변해야 한다고. 무엇보다 여성을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만 좀 죽이라고.
단지 그 사건뿐만 아니라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우리 모두에게 내면화되어 있어 여성인 자신조차도 쉽게 깨닫지 못했던 온갖 여성혐오적 사고방식들, 발언들, 이슈들, 불평등에 대한 모든 것들이 전부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그 해를 분기점으로 여성들의 가치관은 급진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은 평등을 향해 나아가자는 변화의 물결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선진국이 아니었지만, 이러한 국가의 인식과 사회적 환경은 여성들의 각성에 있어 더 좋은 불쏘시개로 작용했다. 여성들은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에서 자신들의 파이를 되찾기 위해 투쟁했다. 이와 반대로 남성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것을 조금이라도 빼앗길세라 여성들의 목소리를 철저히 외면하고 곡해하고 조롱하기 바빴다. 덕분에 여성과 남성 간의 젠더 인식 차이는 세대를 불문하고 극단으로 치닫는 수준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렇게나 뼈아픈 과정을 거쳐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성들이 여전히 ‘흐린눈’을 하며 남자를 만나거나, 남자 때문에 스스로 인생을 망친다. 흐린눈이란 ‘알면서도’ 애써 모르는 척하는 행동을 비유하는 말이다. 그것은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 자신을 속이는 일, 스스로 옳다고 믿었던 가치관을 ‘연애’라는 이름 아래 희미하게 지워버리는 일, 그리고 결국에는 나 자신까지도 잃어버리게 만드는 일이다.
이런 여성들의 이야기는 멀리 가지 않고도 우리 주변 어디서든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새로운 남자친구를 사귀기만 하면 갈등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애써 젠더갈등 관련 문제를 회피하거나, 이런 주제로는 아예 대화를 나누지 않거나, 자신의 페미니즘적 가치관을 숨기거나, 본인의 남자친구가 잘못된 성 고정관념과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거나, 남자친구 또는 남편에게 자아의탁을 하면서 자아정체성을 잃어가거나, 예뻐 보이기 위해 다시 코르셋을 주워 입거나, 스스로 자존감을 깎아 먹는다는 흔하디흔한 이야기. 이 모든 건 나의 고통스러운 경험담이기도 하다.
나는 지난 연애 속에서 수도 없이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그간 내가 페미니즘을 얼마나 공부했든, 얼마나 고민했든, 얼마나 슬퍼하고 분노했는지와는 상관없이 연애가 시작되자마자 나는 내 신념을 저 뒤편으로 제쳐두었다. 수백 번의 갈등이 있었음에도 그는 변하지 않았고 나는 결국 나 자신을 놓아야만 했다.
왜 관계 속에서 나를 잃어야 했을까? 왜 나를 지키지 못했을까? 왜 알면서도 자꾸 모르는 척하고, 왜 쉽게 이별을 선택하지 못할까? 도대체, 왜, 여자들은 연애만 하면 바보가 되는 걸까?
이 글은 이러한 질문들로부터 출발했다. 이것은 특정 개인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성찰이자 스스로 던지는 질문과 대답이다. 이것은 또한, 아주 보편적인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