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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되기를 중단하기

by 끼라

2019년 tvN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을 재미있게 보았다. 원래 드라마를 잘 보는 편이 아니다 보니 방영 당시에 본방송으로 챙겨본 것은 아니고, ‘출판 편집자’라는 직업에 관심을 갖게 된 후 한 지인으로부터 추천받아 본 것이었다. 결과는 나름대로 만족스러웠다. 직업인으로서 궁금증을 해소할 만한 내용이 많아 좋기도 했고(물론 겪고 보니 현실은 아주 달랐지만) 특히 기억에 오래 남은 대사가 하나 있다. 자신을 언제부터 좋아했냐는 강단(이나영)의 물음에 은호(이종석)가 시선을 바깥으로 돌리며 차분히 건넨 답이다.


“봄에서 여름, 여름에서 가을, 가을에서 겨울. 누나는 계절이 언제 바뀌는지 알아? 겨울에서 봄이 되는 그 순간이 정확하게 언젠지. 누나를 언제부터 좋아하게 됐는지, 난 몰라.”


강단을 사랑하는 일이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그만큼 오래전부터 너 하나만을 사랑해 왔다는 낭만 가득한 돌직구. 어떻게 설레지 않을 수 있을까? 그간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인공들의 각양각색 기상천외한 고백 장면을 숱하게 봐왔지만, 큐피드의 화살을 이토록 담백한 방식으로 심장에 냅다 꽂아버리는 대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이성애자로서 설렜던 건 맞다. 그러나 외적으로 뛰어난 배우가 한 대사라서 더 와닿았다거나 실제로 내가 들어보고 싶은 고백이라 인상 깊었던 건 아니다. 그보다는 그간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어떠한 깨달음을 얻었던 것 같다. 감정, 생각, 사상, 가치관은 특정 사건이나 인물을 계기로 단번에 바뀔 수도 있지만, 우리가 모르는 새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오듯 자연스럽게 생겼다가 사라지고 변화할 수도 있다는 것. 자기 자신조차도 그 과정을 알아채지 못할 만큼 느릿느릿 고요하게.


나에겐 페미니즘이 그러했다.


그쯤 나는 결혼 때문에 한창 골치가 아픈 시기를 지나고 있었는데, 결혼을 앞두었다거나 결혼이 너무 하고 싶은데 할 사람이 없어서 골치 아팠던 게 아니라, 결혼 생각이 전혀 없음에도 결혼과 관련된 배려심 없는 질문들이 매일 같이 내 머리 위로 우수수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20대 후반이었다. 대한민국에서 20대 후반 미혼 여성에겐 뻔한 질문들이 따라다니기 마련이었다. 결혼 생각이 없다고 하면 그 후에는 무조건 모든 질문 앞에, 질문을 가장하여 상대방을 혼쭐 낼 시동을 거는 마법의 글자 ‘왜’가 따라붙는다. 왜 남자친구 안 사귀려고 해? 왜 결혼 안 하려고 해? 왜 그렇게 좋은 제도를,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응당 받아들여야 할 순리를 너는 거스르려고 해? 이 하루빨리 결혼해서 애를 낳아야 마땅할 20대 후반 여자야!


그러나 아무리 고민해도 비혼을 결심한 명확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아니, 이유는 분명히 있는 것 같은데 고작 한두 문장으로 정의를 내리기엔 너무 복합적이었다. 질문한 이들을 만족시킬 만한 재치 있는 답변을 생각해내지도 못했고 예의 없는 이들을 만족시켜야 할 의무도 의지도 없었다. 그래서 <로맨스는 별책부록>의 명대사를 종종 인용했다.


“왜 남자친구 안 사귀냐고요? 글쎄요. 왜 결혼 안 하려고 하냐고요? 저도 몰라요. 봄에서 여름, 여름에서 가을, 가을에서 겨울. 계절이 언제 바뀌는지 아시나요? 겨울에서 봄이 되는 그 순간이 정확하게 언젠지. 언제부터 비혼을 결심하게 됐는지, 저도 모릅니다.”


물론 비혼주의라고 해서 모태솔로는 아니지만, 연애 중이던 때에도 남자친구와 결혼을 꿈꿔본 적도, 결혼에 환상을 가져본 적도, 원하는 결혼 방식 따위도 당연히 없었다. 어쩌면 결혼에 대한 환상을 가져보거나 가치관이 형성되기도 전에 기혼 여성들과 그들의 삶이 나에게 직간접적으로 일러주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가진 것의 대부분을 포기할 자신이 없다면 결혼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라고.




2016년은 나를 비롯해 수많은 대한민국 여성의 삶의 전환점이 된 해였다. 다만 그때의 나에겐 오히려 이해할 수 없었던 이야기가 더 많았다. 심지어 어떤 말들은 온라인에서의 스파링처럼 과격한 방식으로 느껴졌다. 내가 대학생이던 2010년대 초중반까지 인터넷에는 ‘남자가 싫어하는 여자 스타일’, ‘남친이 좋아하는 도시락 싸는 법’, ‘연상, 동갑, 연하 남친별 애교 스킬 3종 세트’와 같은 콘텐츠들이 우후죽순 업로드되었고, 실제로 남성 중심적 연애 방식에 절여져 있던 나를 포함해 대다수 여성들은 그걸 정독하고 열심히 실천했다. 그러니까 ‘남미새’가 주류인 분위기에 수년간 익숙해져 있었던 나로서는 동전 뒤집듯 생각을 바꾸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걸 깨 보자고 많은 여성들이 우리가 각성하고 페미니즘을 공부해야 할 이유를 최대한 이해하기 쉬운 말로 하나하나 풀어 설명하고 있는데도 이해할 수 없는 질문들이 넘쳐났다. 반감을 느낀 순간도 잦았다.


불편한 분위기는 회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게 아니어도 삶을 스스로 일구어나가는 어른이 된다는 건 부담스럽고 피곤하고 늘 지치는 일이었으니까. 여성혐오와 관련된 다양한 이슈들이 폭탄처럼 곳곳에서 터져 나왔지만, 대학 졸업 후 진로만을 고민하며 머리를 싸맸던 나는 젠더 관련 문제들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고, 젠더갈등이나 페미니즘과 관련하여 내가 가진 질문들의 답을 찾는 과제를 오랜 시간 보류하면서 나의 무지를 방치했다.


한 가지 의아했던 점은 그 여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완벽하게 이해되지는 않더라도 어째서인지 흡수는 잘 되었다는 것이다. 그간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었던, 비혼을 다짐하게 된 원인을 비롯하여 성차별과 불평등에 대한 나의 무의식적인 생각과 감정들이 점차 텍스트로써 가시화되고 있음이 보였다. 우리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천편일률적으로 프레임화 되어 있는 ‘여자’의 삶을 공유해 왔음을, 저 여자들이 토해내고 있는 울분은 이미 내 안에도 내재되어 있었음을, 여자라서 당해온 숱한 차별들과 남자들은 겪어본 적 없는 두려움과 공포와 패배감을,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인지해 나갔다. 얼마 후 나는 내면 깊숙한 곳에서 두 개의 씨앗이 싹을 틔웠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그것은 변화의 흐름 속에 참여하고 싶다는 열망과 꼭 그래야만 한다는 의무감이었다.


여중, 여고, 여초과를 나와 주변에 여자 친구들밖에 없었던 나는 온라인에서 보고 들은 페미니즘 이슈들,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들, 불평등과 불안을 주제로 친구들과 자주 대화를 나누었다. 워낙 오랜 시간 동안 다방면으로 젠더갈등 이슈들이 대두되었기 때문에 대부분 여자 친구들도 나와 비슷한 속도로 점차 각성했던 것 같다. 굳이 각 잡지 않아도 자연스레 페미니즘 관련 대화가 오갔고,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의 말이 곧장 마음에 와닿았다.


그러나 몇몇 친구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갈렸다. 예전의 내가 그랬듯이 그들은 나의 이야기를 아예 이해하지 못하거나 반감을 보였다. 대놓고 불쾌감을 드러낸 친구도 있었고 인터넷에서 하는 말들을 너무 믿지 말라고, 세상엔 이상한 남자보다 좋은 남자가 더 많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었다. (지금은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페미니스트가 되었지만.) 그런 말을 들으면 어쩐지 퍽퍽한 밤고구마와 스콘과 닭가슴살을 허겁지겁 삼킨 듯 가슴속이 답답해졌다. 그 친구들이 답답해서가 아니라 그런 이야기에 설득은커녕 반박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나 때문에. 그래 놓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럴듯한 답변이 불현듯 떠오르면 무릎을 탁! 치며 “이렇게 반박할걸!”이라며 후회했던 나 때문에. 그때 공부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뭐라도 제대로 알고 있어야 입이 트일 것 같았다. 무엇보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 친구들과 ‘여자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짜증 내거나 서로를 답답해하거나 다투고 싶지 않았다. 그때부터 페미니스트 유튜버들의 영상을 찾아보고, 페미니즘 도서들을 하나씩 독파해 가면서 본격적으로 페미니즘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과정은 지난했다.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정해진 틀에 나를 끼워 맞추려 애썼던 날들, 남성을 위해 여성이 그림자가 되어 희생하는 게 당연하다고 믿었던 지난날에 대한 후회, 남성에게 훨씬 더 유리하게 설계된 사회 구조를 직시하는 일, 페미니즘을 주제로 가족이나 친구, 지인과 설전을 벌이는 일, 모두에게 공개된 SNS에서 여성으로서 당당히 목소리를 내는 일까지. 그러니까, 평생을 남성 중심 사회에서 살아온 여성이 페미니즘을 접한다는 것은 가부장제라는 강철 알을 고무망치로 깨는 미션을 시작하는 일과도 같았다.


무엇보다 나를 가장 괴롭게 만든 것은 내 안에 짙게 깔린 여성혐오의 실체와 여전히 남자들에게 욕망당하고 싶어 하는 모순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일이었다. 나는 우리 모두 코르셋을 벗어던져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여자들의 얼굴과 몸매를 부위별로 나누어 재단했다. 그 ‘여자들’ 속에는 나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도로 위에서는 남자들보다 여자들에게 더 쉽게 화가 났고, 범죄를 저지른 남자 연예인보다 자그마한 물의를 일으킨 여자 연예인에게 더 크게 실망했다. 나는 연애 따위 필요 없다고 말하면서도 이 세상 어딘가엔 나와 꼭 맞는 남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으로 지인들로부터 들어오는 소개팅 제안들을 마다하지 않았다. 남자들이 우위에 선 것처럼 제멋대로 여자를 평가하는 게 같잖으면서도 어떤 남자가 나에게 합격 목걸이를 걸어주면 불쾌함과 뿌듯함을 동시에 느낌으로써 스스로 수치스러워졌다. 페미니즘을 실천하려는 가운데, 관성처럼 이어져 오고 있는 반페미니즘적 사고방식의 발견은 곧 거대한 혼란과 자기혐오를 불러일으켰다.


‘생각만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있을까?’


아무리 열심히 책을 읽고 밑줄 긋고 또 공부한다 한들 아무것도 실천하지 않으면 달라지는 건 없을 터였다. 환경 운동이나 노동 운동처럼 페미니즘, 즉 여성 인권 운동도 사회 운동 중 하나이고, 사회 운동이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실천하는 집단적 행동의 형태이기 때문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환경 걱정만 하는 사람을 ‘환경 운동가’라고 부르지 않듯 페미니즘에 각성했다고 해서 모두가 여성 인권 신장에 도움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쯤, 한 페미니스트의 이야기가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는 따듯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깨달았다면 남은 것은 실천뿐이라고.




여성 인권 운동을 위해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가부장제에 종속되지 않는 것, 사회가 강요하는 꾸밈 노동을 거부하고 디폴트의 모습을 노출하는 것, 다시 말해 ‘탈코르셋’이었다. 때마침 SNS에서 화젯거리였던 <탈코일기>의 텀블벅 펀딩이 시작되었고, 여성들 사이에서 탈코르셋 운동이 박차를 가했다. 단번에 탈코르셋을 하기는 힘들 것 같아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는 생각으로 우선 매니큐어를 다 치웠다. 이것이 탈코르셋의 시작점이었다. 그다음 달엔 코르셋이 난무하던 옷장을 뒤집어엎었다. 박음질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서 재질은 구리고 비싸기만 한 꽃무늬 블라우스, 한 뼘 길이의 치마, 피가 통하지 않는 바지, 몸의 활동을 제약하는 원피스 등등 몇십 킬로의 옷을 고물상에 내다 팔고 고작 3,500원을 벌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500원의 가치도 없는 것들이었는데. 그 후로 화장품은 물론이고 내 몸에 해로운 것들, 특히 나를 ‘여자’로 보이게 만드는 것들을 죄다 갖다 버렸다.


새로운 옷들을 장만하는 데 꽤 많은 돈이 들었지만 그만큼 값어치가 있는 소비였다. 튼튼하며, 나를 성적 대상화 하지 않을 만한 것들이었다. 여름엔 머리를 짧게 잘랐다. 아주 편했다. 살면서 내가 해왔던 그 어떤 헤어스타일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잘 때, 운동할 때, 머리 말릴 때, 밥 먹을 때, 일할 때, 책 읽을 때 등 모든 일상에서 머리카락이 조금도 방해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편한 걸 그동안 남자들은 자기들끼리만 누리고 있었다니. 배신감마저 들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화장을 안 하고 집 밖을 나서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눈에 실핏줄이 다 터지도록 하루에 12시간 이상 미용렌즈를 달고 살았다. 그런 나에게 탈코르셋은 단순한 외적 변화가 아니라, 자존감을 높이고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전환점이었다. 내 본연의 모습을 인정하자 나를 꽁꽁 싸매고 있던 어떠한 사슬이 탁 풀린 것처럼 완전한 해방감을 느꼈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뿐만 아니라 시간과 돈도 절약되었다.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투자였다.


이처럼 마음 놓고 자유롭게 탈코르셋을 실천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내가 ‘비연애’ 상태였기 때문일 것이다. 비슷한 나이대의 남자들과 쉽게 어울릴 수 있었던 대학생 때는 두세 번의 길고 짧은 연애를 해왔지만, 졸업 이후 일상과 동선이 급격히 단조로워지면서 새로운 이성을 만날 일이 줄어들었다. 살면서 한 번도 클럽 근처는 얼씬도 해보지 않았던 나로서는 남자 하나 만나자고 굳이 시끄럽고 기 빨리는 클럽에 갈 바에야 집에서 과자나 먹으며 영화 한 편 보는 게 더 마음이 편하다. 몇 번 소개팅에 나가보기도 했으나 마음이 맞거나 대화가 잘 통하는 남자? 있을 리 없다. 페미니즘을 아니꼽게 바라보는 남자친구와 싸웠다거나 이별했다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온오프라인에 차고 넘치는 현실이 이를 방증한다. 만약 나에게도 남자친구가 있었더라면 탈코르셋은커녕 페미니즘 공부조차 멀리했을지도 모른다. 탈코르셋과 더불어 비연애는 내가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쉬운 페미니즘 운동이었다.


자의로 ‘여자 되기’를 중단하자 나는 비로소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되었다. 누구도 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 삶이란 평화 그 자체다. 비연애 기간이 길어지면서, 이성애에 미쳐버린 대한민국 사회 속에서 연애하지 않고도 완벽하고 충만한 삶을 사는 법을 스스로 터득해 나갔다. 외로움이란 주입식 허상이었다는 것도. 나는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나는 가고 싶은 곳에 가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하고 싶은 것을 했다. 사람은 혼자일 때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법이었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 2>에서는 주인공 라일리의 신념과 정체성이 나무의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마찬가지로 페미니즘이 수년에 걸쳐 내 안에 점차 완성되어 가고 있던 커다랗고 단단한 나무 한 그루였다면, 예상치도 못한 타이밍에 성큼성큼 다가와 잘 벼린 쇠도끼로 그 나무의 몸통을 사정없이 베어버린 범죄자, 그건 바로 사랑이었다.


페미니스트로서 정체성을 견고히 다져갔던 20대 후반의 내가, 연애에 미쳐 돌아버린 30대 초의 나를 만난다면 어떨까? 제발 정신 좀 차리라며 뺨을 한 대 때리거나 얼굴에 찬물을 끼얹어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사랑에 빠지면 눈에 뵈는 게 없으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정말로 눈에 뵈는 게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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