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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과 감정

by 끼라

“그래서 기분이 안 좋아.”

“그러게. 네 말대로 사상검증하려는 걸로밖에 안 보이는데? 싸우자는 것도 아니고 왜 굳이 그런 걸 물어봤대.”

“지금도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헤어지려고 했던 거지, 뭐.”

“아니, 페미니스트여도 존중한다며. 그럼 자기 주변 여자 중에는 아무도 없다느니 여사친들도 싫어한다느니 그런 말은 왜 해? 이게 무슨 절에서 예수 찾는 소리라니?”

“에휴, 그러게나 말이다.”


그와의 대화로 며칠간 온몸에 압박붕대라도 두른 것 같은 답답함에 시달리던 나는 친한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일명 ‘사상검증 사건’을 토로했다.


“내가 너무 바보 같아. 괜히 굽히고 들어간 것 같아서 후회도 되고.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하고 그만두는 게 맞을까?”

“아니? 너 남자친구랑 당장 헤어질 수 있어?”

“…….”

“거봐, 아니잖아. 열받고 억울한 마음은 이해되는데, 사실 대한민국에서 연애하려면 흐린눈은 필수야.”

“다른 여자들은 이런 질문받으면 뭐라고 대답할까?”

“다 페미니스트 아니라고 하거나 모르는 척하고 넘어가겠지. 나도 직접 들은 적은 없는데, 만약 내 남자친구가 나한테 페미니즘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보면 나도 잘 모르는 척할 것 같아. 그러니까 너도 그냥 가볍게 생각해.”

“그렇지, 아무래도 흐린눈 해야겠지?”

“당연히.”




언니의 조언대로 나는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아예 없었던 일처럼 머릿속에서 말끔히 지워버렸다. 아무리 젠더의식이 깨어 있는 남자라고 해도 죽었다가 다시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는 한 우리가 겪는 성차별을, 늘상 목도하는 여혐 가득한 세상을 백 퍼센트 우리의 시야대로 바라볼 수는 없을 테니까. 전쟁을 겪어본 적 없는 이가 전쟁의 공포를 피부로 느낄 수 없듯, 성차별도 여성의 처지에서 겪어보지 않는다면 체감하기 어려운 일일지도 몰랐다.


여성의 문제를 여성만큼이나 깊이 공감할 수 있는 남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당사자가 아니라면 절대로 우리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으리라. 그렇게 생각하자 어쩌면 짐작일 뿐인지는 몰라도 그가 내게 건넨 모순적인 이야기들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남자여도 그처럼 태평하게 굴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괜히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것보다 애초에 기대하지 않는 편이 평화를 유지하는 데는 더 도움이 될 터였다.


그러나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끊임없이 들려오는 희미한 목소리까지 차단하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분명 질문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질문보다는 질책에 가까운 말들.


‘정말 이게 맞다고 생각해?’

‘이게 네가 바라던 사랑의 모양이니?’

‘언제까지 흐린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시도 때도 없이 피고 지는 날카롭고도 유약한 목소리 위로 낮은 음성이 오버랩된다.


“광신도 같아서.”

“뭐든 중립이 좋다고 생각해.”

“예전에 피드 보고 ‘좀 빡세다’라고 생각했어.”


메아리같이 울려 퍼지는 그의 목소리는 잔잔하고도 깊은 호수에 던져진 커다란 돌덩이처럼 온 사방으로 파문을 일으키며 나의 목소리를 완전히 덮어버린다. 그의 음성이 지나간 자리에는 그을음처럼 짙은 불안이 새겨졌다. 더군다나 그날 이후로 묘하게 달라진 것 같은, 나에게서 살짝 마음이 뜬 것처럼 보이는 그의 말투나 다소 성의 없는 태도 때문에 나는 신경이 곤두서 작은 것에도 무척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빡세 보인다고?’


인스타그램을 열어 내 계정 피드 게시물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페미니즘, 비혼, 여성 등의 키워드로 분류될 만한 것들을 모두 ‘숨김’ 처리했다. 갈등의 씨앗이 될 수 있는 것들을 전부 감추자. 그래야만 무언가로부터 쫓기는 듯한 이 마음이 한 걸음 물러날 테니까. 수십 개의 게시물을 없앤 뒤 그에게 피드를 정리했다고 이야기했다.


“왜? 안 그래도 되는데.”


그는 무심한 척 말했지만, 슬며시 올라가는 입꼬리는 속내를 감추지 못했다.




연애만큼 어불성설 그 자체인 일이 또 있을까. 한때는 서로가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완전한 남이었으면서 ‘연애’라는 이름 아래 묶이게 되면 갑자기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인 것처럼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며 지내야 하는 것. 나는 완전한 타인이었던 그와, 이제는 나의 연인이 된 그, 멀고도 가까운 두 명의 ‘그’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무엇으로도 메우지 못한 채 불편한 대화를 맞닥뜨려야만 했다. 아마도 그 간극은 시간만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이었을 테지만 우리에겐, 아니 적어도 나에게는 그 간극을 메울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그가 편했지만 때때로 낯설었고, 그를 사랑했지만 모든 걸 믿어도 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타인이기보다는 애인으로 존재하길 원했다. 나 역시 그에게 그런 존재가 되길 바랐다. 우리가 서로를 알아가는 데 들여야 했던 시간을 훌쩍 건너뛰고 바로 다음 단계에 도착해 버렸으니 지금부터 남은 것은 나의 몫이라고, 애인이라는 역할에 충실하다 보면 그 간극은 사랑으로 메꿀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래서 그에게 나를 맞추기 시작했다. 내가 맞추면 그도 나에게 맞출 거라고도 믿었다. 지금은 너무도 다른 모양이라 자꾸 어긋나지만, 적당한 시기가 지나면 톱니바퀴가 정확하게 맞물리듯 우리도 그럴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와 나의 조각들로 퍼즐을 완성하려면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의 말을 그저 믿어주는 수밖에 없었고, 그가 나를 정말 사랑한다면 차츰 여성인권에 관심 가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런 말도 안 되는 가능성에 베팅하는 것뿐이었다.


모든 고민과 질문을 제쳐두고, 일단 나는 그를 놓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의 말에 불편함을 느끼고 나답지 않은 나 자신에게조차 수없이 의문을 품었지만, 기적처럼 찾아온 사랑의 기회를 그렇게 쉽게 놓아버리기엔 나 스스로가 간절해져 있었다. 그를 만난 후 나는 사람과 사람이 같은 시기에 서로를 사랑한다는 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확률의 일인지 알아버렸으니까. 아니길 바랐지만 끝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진실은, 지난 몇 년간 사랑은 고통일 뿐이라고 결론지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외로움과 자격지심이라는 새카만 바닷속으로 나는 아주 깊이 가라앉고 있었다는 것이다.




신념과 감정이 충돌하게 되면 무엇을 우선시해야 할까? 둘 중 어느 것 하나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땐 갈등을 어떻게 조율해야 할까? 이 질문은 머리가 시키는 대로 할 것이냐, 마음이 동하는 곳으로 이끌릴 것이냐의 문제와도 같았다. 아마 내가 좀 더 똑똑하고 현명한 여자였다면 게시글을 지우면서까지 자신을 속이려 하는 스스로를 가만히 내버려 두고 있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보다는 진작에 이 관계를 끝내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정에 충실하고자 했던 나를 바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럴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고 본다. 심지어 나 자신에게조차도. 신념과 감정 사이의 충돌은 때때로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가 어떤 삶의 태도를 택하느냐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게 내 선택을 합리화하기 위한 말은 절대 아님을 밝힌다. 내가 잘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은 이러한 충돌에 맞닥뜨렸을 때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고 결론을 내리는지 궁금하다.


감정이 더 중요했던 그때의 나는 그가 나와는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와 함께라면 내 기준을 조금쯤 낮춰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의 말대로, 안 그래도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좋은 여자친구가 되고 싶은 욕심, 그가 특별한 사람일 거라는 착각은 단숨에 신념을 앞질렀고, 나는 점점 그가 바라는 모양으로 나 자신을 깎아내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 순간에 내가 지워버린 건 게시물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선택들이 어떤 저주가 되어 얼마만큼의 불행을 불러들이는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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