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잘해줄걸, 더 표현할걸, 더 사랑할걸. 한 번도 그런 후회는 해본 적이 없다. 항상 누군가를 만나는 동안에는 사랑에 올인하며 줄 수 있는 모든 사랑을 다 퍼준다. 최선을 다하려 굳이 애쓰지 않아도 그럴 수밖에 없는 건, 내가 정의 내린 사랑이란 헌신과도 같기 때문이다. 잘 됐으면 하는 마음, 잘해주고 싶은 마음, 줘도 아깝지 않은 마음이야말로 사랑의 범주에 속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갖고 싶은 마음은 사랑이 아니라 욕심이라고 본다. 대개 그렇겠지만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할 만큼 했다라는 생각이 들 때, 더 이상 사랑이 존재하지 않을 때 나는 관계에 마침표를 찍는다. ‘더 잘해줄걸’과 같은 말들을 입 밖에 내본 기억이 없다.
연애에 있어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이야기 하나가 떠오른다. 만나는 동안 최선을 다한 사람들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나도 공감했었다. ‘한다’가 아니라. 이제는 그 말이 내게는 비현실적으로 들린다. 그건 나에게 있어 거짓말 같은 소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늘 그래왔듯 이번 연애에서도 나는 최선을 다했다. 사람들의 논리대로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란 없을까? 아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크게 후회했고 지금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그와 다시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와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 과거로 되돌아가고 싶다. 요즘도 머릿속에서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후회의 목소리가 툭 튀어나와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속으로 비명을 지르는 순간도 잦다.
그때 가만히 있지 않아야 했는데. 그런 얘기에 맞장구치지 말아야 했는데. 웃어주면 안 됐는데. 그냥 넘어가면 안 됐는데. 반박해야 했는데. 화내야 했는데. 덜 사랑해야 했는데.
수백 일간 겪은 일들을 기억나는 대로 하나씩 정리하고 보니, 단 한 사람으로부터 비롯된 일이라기엔 믿기 어려울 만큼 다양하고도 눈감아주기 힘든 말들과 행동들이 끝없이 줄을 이었다. 그중 일부는 나의 감정을 심각하게 해쳤을 만큼 부당하거나 무례했다. 진심이 아니었을지라도 거기에 동조했던 나 자신을 생각하면 수만 명의 사람들 앞에서 홀로 뜨거운 조명을 받는 것처럼 부끄럽고 괴로워진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그는 단지 젠더감수성이 하향 평준화된 2030 한국 남성의 평균이었을 뿐. 그에게서 도망치면 그만일 일을, 사랑에 매몰되어 스스로를 갉아먹으며 자멸한 건 나였다. 그와 헤어지고 다시금 숨쉬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지금도 전력을 다해 마라톤이라도 뛰고 온 듯 기진맥진하지만, 나 자신 말고는 누구도 탓할 수가 없는 현실에 이따금 뾰족한 무언가로 찔리고 찢기는 기분이 든다.
그런 후회들로도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불쾌한 순간들이 있다.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라던 그의 말대로 순수한 질문인지, 아니면 비웃는 듯한 그의 표정이 말해주듯 여성으로서의 내 신념을 비꼬기 위함인지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 없는 물음들이 이어졌다. 나의 과거 사진을 함께 보다가 숏컷 시절의 셀카가 노트북 화면에 뜬 순간이었다.
“탈코르셋은 왜 하는 거야?”
설명해 봤자 통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여러 페미니즘 담론 중에서도 특히 탈코르셋은 여자 친구들 사이에서도 종종 의견이 갈리던 주제였으니. ‘코르셋의 주체성’은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도 같은 말이지만, 그게 모순임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 괜한 반감만 살 수 있으므로 나는 줄곧 입을 다물어 왔다. 여자 친구들과도 그렇게 의견이 갈리는데, 하물며 그에게 무어라고 말해봤자였다. 이미 그와의 여러 대화를 통해, 논쟁을 피하고 싶을 때는 의도적으로 신념을 축소하고 눈높이를 낮추어 최대한 단순한 답변을 끌어내는 과정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 과정은 페미니스트 자아의 모든 의욕을 상실하게 할 만큼 허무한 한편, 나 자신을 속이는 데도 탁월했다. 나는 진짜 내 모습을 숨긴 채 그에게 걸맞은 단순한 나를 연기했다.
“그냥, 짧은 머리가 편하잖아.”
탈코르셋은 편하자고 하는 게 아니다.
“그리고 친구들한테 숏컷 잘 어울린다는 칭찬도 많이 받았어.”
탈코르셋은 남들에게 더 잘 보이기 위해 하는 것도 아니다.
“오, 그래? 내가 보기엔 긴 머리가 더 나은데.”
그에게는 타인을 평가하는 일이 일상이라도 되는 듯 자연스러워 보였다. 사진이 한 장씩 넘어가며 지난날의 내 헤어스타일이나 옷 스타일, 화장법 같은 게 달라질 때마다 그는 이건 어울리고 이건 이상하고 이건 예쁘고 이건 별로라며 세세하게 나를 뜯어보고 관찰한 결과를 즉시 통보했다.
이 옷은 합격, 저 머리는 불합격. 화장은 괜찮지만, 저 컬러는 최악.
그는 그런 식으로 나를 품평했다. 나는 새로운 헤어스타일이나 옷 스타일에 도전하는 데 두려움이 없어 이것저것 과감하게 시도하기를 좋아하고 자주 변화를 줘 왔다. 그러나 그의 디테일한 합격 불합격 고지서가 날아온 이후로는 거기 적혀 있는 대로, 그의 입맛에 맞는 스타일로 나를 가꾸는 데 에너지를 쏟았다. 그래도 된다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내 남자친구니까.
그러나 그가 타인의 외모를 평가인 척 비하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수위가 점점 세지면서 나는 불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더욱이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건 그가 평가 내리는 사람들의 성별이 전부 나와 같은 여성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남자를 마주할 때는 여성을 뜯어볼 때의 집요함을 그에게서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보통의 남자들이 그러하듯이.
남자들은 어떤 남자가 뚱뚱하든 말랐든 키가 크든 작든 못생겼든 잘생겼든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그들이 남자의 외모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들에게 있어 남자의 외모는 그저 껍데기일 뿐, 그들은 언제나 그 안에 들어 있는 영혼을 바라볼 줄 안다. 여자를 대할 때와는 정반대로, 남자만이 사람이고 여자는 여자에 불과하다는 듯이.
나는 그가 일반인 유명인 할 것 없이 여자에게만 어떠한 잣대를 들이댈 때마다 그를 에둘러 타이르거나 정도가 심할 때는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때부터 나와 그의 사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장난이라거나 농담이었다는 말은 함부로 쓰여선 안 된다. 그것은 언어나 신체 폭력을 정당화하고, 가해자를 보호하며, 피해자의 상처를 함부로 덮어버리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장난이었다는 말은 화자가 아닌 청자가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경우에만 신중히 사용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남자들은 자신의 무례를 너무도 쉽게 장난으로 포장한다. 공영 방송에서 남자 연예인들의 여혐 발언이 농담으로 허용되는 것을 보면, 여자들 대부분이 장난을 앞세운 비하 발언과 선 넘은 농담을 애써 눈감아준 경험이 있을 것이라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장난이라는 말은 남자인 그에게도 좋은 방패가 되어주었다. 그는 여성의 신체 부위를 조롱하는 표현으로 낮춰 부른다거나 남초 커뮤니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입에 담기조차 힘든 각종 여성 비하 단어들을 서슴없이 내뱉어놓고 고작 장난이었다는 말로 나의 불쾌를 덮어버렸다. 그는 여성과 장애인과 노인과 어린이를 비하하는 콘텐츠를 만들어 올리는 유튜브 채널의 영상을 ‘재미로’ 함께 보자며 졸라댔다. 그가 깔깔대며 웃을 때, 나는 50대 폐급 남부장에게 성희롱당하는 기분이란 이런 것이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의 발언들은 ‘장난’이라는 말에 가려져 있었지만, 그 장막을 걷어내는 순간 나는 오래된 폐수처럼 썩어가던 무언가를 정면으로 맞닥뜨려야 했다.
장난으로 할 수 있는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말로 인해 상대방이 기분 나빠하거나 화를 내면 본인이 더 크게 황당해하면서 상대방을 이상하거나 예민한 사람 프레임을 씌운다는 공통적인 특성이 있다. 그도 그랬다. 그의 여성혐오 발언의 수위가 점점 높아짐에도 내가 확실히 제재를 가하지 않자, 나를 조금도 배려하지 않은 언어 습관이 그의 몸에 배어 가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그는 나에게도 직접적으로 여혐 단어를 툭툭 내뱉기 시작했는데, 그의 말에 기분이 상해 오랜 시간 침묵하고 있으면 그는 장난이었는데 뭐가 문제냐며 적반하장식의 태도로 돌변했다. 그와 갈등을 빚고 싶지 않았던 나는 아무리 듣기 거북하고 기분 나쁜 발언이었더라도 결국에는 흐린눈을 하고 넘어가거나, 화가 난 내 모습에 덩달아 열받은 그에게 사과하며 주객이 전도되듯 먼저 손을 내미는 수밖에 없었다. 이 문장을 쓰고 나니 또다시 내 안에서 악에 받친 비명이 들린다.
젠더갈등이나 페미니즘과 관련된 그 어떤 이야기도 나누고 싶지 않았던 나는 여러 차례 이야기했다. 어차피 이런 일들로 우리가 대화를 나눠봤자 싸우기나 할 테니 앞으로는 이런 주제의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그와의 대화는 사실상 ‘갈등’이라는 단어로도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완전한 진창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간에 젠더갈등 이슈가 점화되어 뜨거운 감자가 되어갈 때면 그는 그게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라도 되는 듯 신이 나서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며 또다시 나를 떠보거나 논쟁을 유도했다.
차분하게 시작된 이야기도 대화를 나누다 보면 결국은 언성이 높아지기 마련이었다. 갈등이 깊어지면 그는 일반화하지 말라거나 자신을 경멸하는 듯한 나의 눈빛이 기분 나쁘다는 둥 맥락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로 방향을 바꿔 곧장 나를 비난하거나 내 잘못으로 몰아가기 일쑤였다. 당황한 나는 이도 저도 못하다 불도저 같은 그의 말에 떠밀려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그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원하는 만큼 웃고, 원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었지만, 몸과 마음이 으스러진 나는 그가 짜 맞춘 프레임을 벗어날 조금의 힘조차 낼 수 없었다.
나는 궁금했다. 어째서 항상 갈등을 일으킨 쪽이 되려 상대방을 예민한 사람 취급하는 것인지. 그리고 깨달았다. 그와 같은 이들의 당당한 표정은 가해자가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 세상이 만들어준 얼굴이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