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설레는 연애보다 친구처럼 편안한 연애를 지향한다고 했다. 지금까지 오래 만났던 사람들과도 늘 그런 식으로 연애를 해왔다고, 우리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그와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나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 매일 치고받고 싸우다가도 눈만 마주치면 입술을 부딪치는 불같은 사랑은 20대 초반에 해볼 만큼 다 해봤으니, 이제는 30대답게 안정적으로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어른스러운 연애를 이어갈 우리를 꿈꿨다. 언제까지고 가슴이 두근거릴 리도 없다. 설렘은 유효기간이 정해져 있는 감정이니까. 익숙함이 커지다 보면 들뜨고 자극적인 마음은 점차 줄어드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였다.
그는 내가 편안해서 좋다고 했다. 자신의 이상한 모습, 못난 부분까지도 전부 이해하고 받아줘서, 나와 함께 있으면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어서 좋다고 말하며 웃었다.
나는 그의 웃는 얼굴을 좋아했지만 그의 환한 미소를 보고도 덩달아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은 건, 그가 이 말을 하기 직전 내게 장난이랍시고 던진 말에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큰 충격에 휩싸인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여성 비하 발언을 넘어서 성희롱에 가까운, 해당 표현을 텍스트로 남기고 싶지 않을 만큼 아주 저급하고 속된 말이었다. 그는 “재미있는 말이 하나 떠올랐어. 화 안 낼 거지? 화 안 내겠다고 약속해.”라며 온갖 궁금증을 유발하고는 한참을 웃다가 그 단어를 내뱉었다.
모멸감에 압도당한 나는 조수석에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편안해서 좋다는 말은 결국 자신이 아무리 막대해도 따지지 않고, 갈등을 만들지도 않으며,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서 좋다는 말과도 같았다. 그에게 편한 연애란 자신에게만 편한 연애를 일컫는지도 몰랐다. 내가 참고 넘어가는 날이 많아질수록 그의 연애는 기름칠한 기계처럼 매끄럽게 굴러갔다.
별 거 아닌 일로 새벽 네 시까지 지난한 싸움이 이어진 날이었다. 언성이 높아지며 우리의 대화는 점점 말다툼으로 번졌고, 그가 내 이야기는 하나도 듣지 않은 채 본인의 감정만을 밀어붙이고 있다는 것을 선명히 느낄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냥 넘어갈 수 없어 물러서지 않았다. 대화 도중 그는 “미쳤냐?”, “입 좀 다물어.” 하는 식의 막말로 기어코 선을 넘었고, 갈등이 최고점에 달했을 때 나는 분노에 찬 눈물을 쏟아냈다. 그는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다 망했다며, 우는 나를 외면한 채 등을 돌렸다. 잠이 든 그는 손을 뻗으면 닿는 거리에 있으면서도 아득히 멀리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마치 현실이 아닌 내 기억 속의 잔상으로만 존재하는 듯이.
그러니까, 우는 나를 보고 놀란 눈으로 벌떡 일어나 앉아 내가 진정될 때까지 다정한 손길로 토닥여주던 그는 이제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무너진 감정을 수습하려 홀로 애쓰면서도, 부담감과 긴장감에 짓눌렸을 그에게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는 만약 내가 자신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얼마든지 나의 짜증을 받아주었을 거라고 단언했는데,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젯밤 내가 너무했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자책했고, 그는 용서했다. 그의 기분이 풀리는 데는 몇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결국 그도 막말해서 미안하다는 말로 짧게 사과했다. 그 순간에도 나는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호수 위의 빙판에 균열이 생기면 순식간에 사방으로 금이 뻗어가 깨져버리고 말듯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라고. 이미 관계의 일부는 파열된 지 오래였다.
인간은 본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기억을 왜곡하는 나쁜 습성이 있다. 나 역시 내게 유리하게만, 그러니까 나는 순수한 피해자로, 그는 악질적인 가해자로 프레임화하는 것을 경계하고자 당시에 쓴 일기를 참고하여 글을 쓰고 있다. 그럼에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일들로 그에게 상처를 주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 백 점짜리 완벽한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백 점짜리 완벽한 파트너는 그보다 더 말도 안 되는 단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나는 상대방에게 막말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누가 되었든 그렇다. 막말이야말로 사람의 감정과 심리에 가장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가해 수단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손에 박힌 연필의 흑심이 어느 순간 점이 되어 있는 것처럼, 막말은 때때로 듣는 이의 무의식에 박힌 채 그가 죽을 때까지 곁을 맴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에게 막말하지 말라고 줄곧 이야기할 때마다 그는 알겠다고 이야기했지만, 분노가 그를 덮치는 순간엔 새끼손가락까지 걸고 한 약속은 온데간데없이 증발했다.
내가 스스로의 감정을 묵인한 채 참고 넘어가는 날이 늘어나자 그는 말 좀 들으라거나 반성했냐는 등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으며 윗사람이 아랫사람 대하듯 나를 대하기 시작했다. 갈등에서 반드시 승부를 내려하고, 그 자신 때문에 내가 기분이 상해도 결국은 내가 먼저 사과하도록 만들었다. 그가 나를 이기며 연애라는 이 게임에서 승승장구하는 동안, 나는 ‘져주는 게 이기는 것’이라던 누군가의 조언 하나만 믿고 그가 나를 짓밟고 올라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져주는 건 이기는 게 아니다. 져주는 건 겨우 지는 것뿐이다. 그걸 이제는 안다. 인내는 필연적으로 관계의 불균형을 고착화한다는 것도.
폭력은 도미노와도 같다. 처음에는 작은 충돌에 불과할지라도 첫 번째 도미노가 쓰러지면 뒤이어 모든 도미노가 차례차례 쓰러지듯 폭력도 한 번 시작되면 강도와 형태를 바꿔가며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무심한 막말에서 모욕적인 표현으로, 몸을 밀치거나 세게 잡아당기는 등 가벼운 물리적 접촉으로, 귓속을 때려 박는 고함으로, 물건을 집어던지거나 주먹으로 벽을 내리치는 등의 위협적인 태도로, 급기야는 직접적인 신체 폭력으로.
그가 내게 막말했을 때, 내면에 박힌 상처를 모르는 척 지나치자 첫 번째 도미노가 쿵, 하고 굉음을 내며 쓰러졌다. 그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나를 힘으로 밀었을 때 도미노가 쓰러지는 속도가 가속화되고, 그가 ‘쾅!’ 소리가 나도록 주먹으로 벽을 내리치자 도미노는 산사태처럼 나를 덮쳐 왔다. 다행이라는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다행히도 그에게 직접 맞은 적은 없다. 다만, 이러다간 얼마 안 있으면 그의 주먹이 벽이 아니라 내 얼굴, 내 몸을 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무력감은 점점 더 커져 그의 말 한마디에도 곧 주저앉을 것 같은 나 자신을 발견했다.
한 영화의 명대사처럼, 나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좋은 연애를 하고 싶었던 게 잘못이었을까? 그저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싸우지 않고 싶었고, 함께 웃는 나날을 보내고 싶었을 뿐이다. 보통의 여자들이 그러하듯이 조금 참고, 조금 양보하고, 조금 더 배려하면 그도 나처럼 애쓸 거라 믿었다. 그러면 삐걱대던 우리의 관계도 다시 제자리를 찾고 처음의 설렘도 언젠가 다시 마주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런 바보 같은 믿음이, 부질없는 희망이 나를 착한 여자친구에서 참아주는 여자로, 참아주는 여자에서 함부로 대해도 되는 여자로 바꿔놓았다.
나는 그가 나를 사랑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헤어지던 날 그에게 같은 이야기를 했을 때 그는 곧바로 내 말을 부정했다. 그러나 아마도 그가 여전히 깨닫지 못했을 진실을 나는 알고 있다. 그가 사랑했던 사람은 온전한 내가 아니라, 착해빠진 나, 참아주던 나, 침묵하던 나, 함부로 대해도 되는 나였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