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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고 싶은 기록

by 끼라

3월.

인간의 뇌는 부정의 개념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는 부정의 말을 들으면 어떻게든 코끼리를 떠올리게 되므로,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으려면 다른 생각으로 덮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키 선수들이 장애물을 피하기 위해서는 장애물이 아닌 장애물 사이로 난 길을 직시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K에게 속상했던 일이나 마음에 쌓인 감정을 곱씹지 말라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다그치기보다는 K와 함께한 좋은 일들을 떠올리는 내가 되어야겠다.


K랑 매일 새벽까지 싸우느라 두세 시간밖에 못 자고 출근해서 올해에만 병원을 도대체 몇 번 다녀온 건지 모르겠다. 오늘도 감기 증상이 있어서 병원에 다녀왔다. 면역력 관리, 컨디션 조절, 스트레스 관리에 좀 더 신경을 써야겠다. 뭐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다. 웃어서 나쁠 건 없으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손해 볼 건 없으니까. 그렇게 지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 웃으면서 지낼 거다.




5월.

헤어지자고 했다. 모든 친구들이 잘했다고 얘기해 주고 나조차도 생각보다 후련한데 왜 진작 못 끊어냈을까. 물론 즐겁고 행복한 시간도 많았지만, 힘들고 괴로웠던 나날이 훨씬 더 많다는 걸 안다. 최근 들어서는 통화할 때 공백도 길었고, 표현도 점점 안 하는 K에게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가 없었다. 어깨 위에 먹구름이라도 한가득 올려놓은 것처럼 축 처진 기분으로 출근하는 것도 진절머리 난다. 혼자서 잘 지내고 싶다.


“그런 취급받고도 헤어졌다는 말이 없네. 계속 만날 거면 그냥 딴 데 털어놓지 말고 참고 만나.”


아니. 이제 안 참을 거다.




6월.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가 그렇게 어려운가? 결국 또 재회하고 말았다. K가 1시간 동안 나를 붙잡았다. 내 손을 잡고, 끌어안고,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K의 손은 평소보다 차가웠고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손끝도 미세하게 떨렸다. 그건 진심이었다는 증거겠지. 그래도 우리 진짜 끝이라고 너무 힘들다고 말은 했지만, 익숙한 K의 품을 떠나려니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아서 결국 K의 손을 놓지 못했다.


그렇게 원점으로 돌아왔다. 어제도 또 싸웠지만, 하도 많이 싸워서 그런지 별 느낌이 없다. 아니, 어떤 감정도 느낄 힘조차 없다고 해야 하나. 마치 심장이 딱딱하게 굳은 것처럼. 제발 나도 평온해지고 싶다. 요즘은 정말이지 제정신이 아닌 기분이다. 나를 잃어가는 것 같다.




8월.

K는 본인의 화가 풀릴 때까지 내가 저자세로 굽히라고 이야기한다. 짜증이 나면 감정부터 앞세우지 말고 차분히 이야기하라고 말한다. K 자신은 그러지 않으면서.


그동안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 다이어리만 봐도 알 거다. K를 만나며 안 맞는 점들을 억지로 맞추려고 하다 보니 마음에 병이 자랐다는 걸. 이쯤에서 그만두자. 어차피 K는 나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사랑했다면 하지 않았을 수많은 막말과 행동이 떠오른다) 금방 또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겠지. 이제는 인정하자. 우리가 이렇게까지 오래 이어갈 인연이 아니었다는 걸. 방금도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만만한 걸 넘어 내가 하찮기까지 한가 보다.




9월.

여기는 서촌에 있는 한 카페다. 오늘 오전 11시쯤 눈을 떴는데 친구가 오늘 날씨 좋다고, 어디라도 다녀오라고 해서 서둘러 외출준비하고 집을 나섰다. 좋아하는 노래를 듣자마자 ‘소소한 행복이란 이런 거였지!’ 하는 깨달음에 기분이 맑아졌다. 서촌의 처음 가보는 소품 가게들을 여러 군데 방문했다. 친구와 언니에게 주려고 티 코스터를 넉넉히 샀다. 분명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니 별거 아닌 일인데도 금세 기분이 환기됐다. 어제 새벽까지 K랑 전화로 싸우며 감정 소모가 심했는데, 그게 전부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천천히 거닐며 가을바람도 쐬고 잔잔한 음악도 들었다. 이런 날이면 7년 전 가을에 혼자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그때 참 행복했는데. 그 기억이 꽤 오래 지속되는 듯하다.


혼자서 단단히 쌓아 올린 시간들이 나를 지탱해 준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은 대낮이었다.


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말이 길어진다. 가끔 이렇게 혼자 시간을 보내며 생각 정리도 하고 나 자신도 살펴야지. 부정적인 생각들은 웬만하면 끌어안고 있지 말고 내다 버리자. 분리수거 쓰레기를 내다 버리듯 머릿속에서 봉투에 담아 꽉 묶은 다음, 내 안에서 밖으로. 이제 뒤돌아서면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미련 없이 내다 버리는 거다. 그리고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자기 암시의 효과도 있으니 때때로 힘들어지면 또 이렇게 글을 끄적이며 용기를 가져보자. 불안을 곱씹는 습관도 버리고 시원하고 청명한 가을을 만끽해 보자.




10월.

K랑 싸우다가 K가 나를 차단한 걸 알고 꾹 눌러왔던 화가 대폭발해서 혼자 집에 있던 물건을 던져버리고 소리 지르며 울었다. 살면서 이 정도로 화가 날 일이 뭐가 있나 싶은데, K를 만나면서 하도 많이 겪다 보니 이제는 심지어 익숙하기까지 하다. 분노가 익숙하다니, 소름이 돋는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나를 막 대할까. 친구에게 물어봤더니 “K가 너를 차단하든, 건성으로 전화를 받든, 어차피 네가 다시 걔 받아줄 거 뻔하니까.”라고 했다.


밤에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에 휩싸여 잠을 한숨도 못 잤다. 그러다가, 우리 부모님이 내가 이러고 있다는 걸 알면 얼마나 속상하실까, 그런 생각에 펑펑 울었다.


이제는 정말 놓을 때라는 걸 안다. 싸우고 힘들고 불안한 날이 월등히 많은 연애였다. 12월에 헤어질걸, 2월에, 5월에, 10월에 헤어질걸.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나중에는 ‘더 빨리 헤어질걸’ 하고 생각할 거다.


바다 같은 눈물 속으로부터 헤엄쳐 나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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