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희망고문

by 끼라

누군가가 애인과 헤어질 거라고 이야기하는 걸 잘 믿지 않는다. 아무리 단호한 목소리와 또렷한 눈빛으로 이야기한다 해도, 정말로 끝장내고 오기 전까지는 한쪽 귀로 흘려듣는 편이다. 그런 하소연은 대개 진심보다는 말 그대로 하소연에 가까우므로. 헤어지고 싶다는 말의 내막을 들여다보면 보통 이런 이야기가 숨어 있다.


‘내가 이상한 거야? 아니라고 해줘. 어서 나에게 공감해 줘. 걔가 다 잘못한 거라고!’


헤어질 거였으면 남에게 구구절절 털어놓을 이유가 없다. 그보다는 진작에 관계를 정리한 다음, 상황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면 차차 설명해 주었으리라. 지난번 출간한 책에서도 했던 이야기이지만 ‘헤어지고 싶다’라는 말은 ‘퇴사하고 싶다’라는 말과 닮아 있는 듯하다.


그러고는 싶지만, 그러지는 않겠다는 말.


애인과 헤어지고 싶다는 남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진심으로 조언해 주곤 했던 내 친구들조차도 이제는 이런 말을 잘 믿지 않거나 멀리하고 싶을 거라는 걸 안다. 이별과 재회를 반복하며 주위 사람들을 지치게 했던 나의 탓이다. 그렇게 여러 차례 깨붙(‘깨졌다가 붙었다가’를 일컫는 말)을 반복하며 나를 아끼는 사람들의 분통을 터뜨린 게, 오래전 짝사랑했던 상대에게 대차게 차였을 때보다 훨씬 더 창피하고 수치스럽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K와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K와 해외여행에서 싸운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친구는 나 대신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K의 말에 따르면 싸움의 원인은 나에게만 있었다. 내가 K에게 “여행에 집중하는 것도 좋지만 나한테 관심 좀 가져줘”라는 말을 감히 했기 때문이다. K는 사과는커녕 대답조차 하지 않더니, 지금부터는 따로 다니겠다고 선언했다. 여행지에 와서는 절대 싸우지 말자고 약속해 놓고 끝내 서운한 점을 말한 것이 그의 기분을 언짢게 만든 것일 테다. 애타게 K의 이름을 부르며 종종걸음으로 따라갔지만, 그의 뒷모습은 이내 점이 되어 사라졌다.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계속해서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사과하는 일뿐이었다.


그 여행에서 그는 내게 처음으로 윽박질렀다.


관계가 무너졌음을 방증하는 여러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전부 들은 친구는 피부가 하얀 편임에도 양쪽 귀와 얼굴, 목덜미까지 술에 취한 사람처럼 시뻘겋게 열이 오른 채 한쪽 손으로 자신의 가슴께를 쿵 쿵 쿵 두드렸다.


“남의 이야기 듣고 이렇게 억울함과 분노가 단전부터 치솟아 오르는 건 처음인 것 같다. 심지어 네가 말한 게 ‘나한테 관심 좀 가져달라’라는 말이면 애초에 잘못은 K가 먼저 한 거잖아. 얼마나 무심하게 대했으면 네가 그런 말을 다 했겠냐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야, 남한테도 그렇게는 안 해.”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소라의 <Track 9>을 듣던 중 후렴구의 일부 가사가 마음에 박혔다.

“Hey you don’t forget”


그래, 잊어버리지 말자. 잊어서는 안 된다. 나를 대신해 울어주던 친구의 눈물과 분노를. 그 모습을 보며 이 관계를 끊어내겠다고 스스로와 했던 약속을. 나를 아끼는 이들을 위해서라도 나 자신을 그만 괴롭히는 게 맞다고 몇 번이고 되뇌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다짐이 무너지는 건 햇볕에 눈이 녹아내리는 것보다 쉽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로.


다음날 그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혹여나 내 마음이 또다시 흔들릴까 봐 나는 서둘러 친구들에게 헤어졌다고 이야기했다. 친구들은 그 어떤 때보다 진심으로 기뻐하며 나의 이별을 축하해 줬다. 잘했어. 그동안 고생 많았어. 이제 우리랑 재미있게 놀자. 너 다시 만나기만 해 봐! 그땐 진짜 손절이야.


그날 저녁, 그는 득달같이 달려와 뻔한 말로 내게 용서를 구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눈물과 설득의 시간을 보낸 후, 나는 그를 받아주었다.




순간의 정적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재회한 다음 날,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K와 다시 만나기로 했다는 말을 조심스레 막 꺼냈을 때였다.


“어제 와서 1시간 동안 사과하더라고… 앞으로 잘하겠대.”


나를 제외한 모두가 말을 잃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절친이었던 친구들이었지만, 단 한 번도 그렇게 싸늘하고 차가운 친구들의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황당함, 어이없음, 답답함, 실망스러움, 한심스러움, 짜증 남, 열받음, 허무함. 지금의 내가 그 당시의 나를 떠올리면 느껴지는 이 모든 감정들을 친구들은 그날 그 자리에서 벼락처럼 맞닥뜨렸다.


싸해진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나는 다급히 나 자신을 둘로 분리했다. 재회를 선택한 나, ‘재회를 선택한 나’를 한심하고 답답하게 여기는 나로. 그리고 후자인 내가 전자인 나를 마구 물어뜯고 질타하도록 부추겼다. 그래야만 친구들에게 너희와 똑같이 생각하는 나 자신도 존재하며, 비록 내가 남자에 미쳐 돌아버린 듯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자기 객관화를 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러니 어서 다들 기분 풀고 재미있는 이야기나 나누자는 뜻을 전달할 수 있어서였다. 나도 나 자신이 이해가 안 되고 바보 같다며 흉을 보고 채찍질하는 동안, 재회를 선택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어떤 악담도 달게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아마 그 친구들을 제외하고도 가까운 지인들은 그렇게 여러 차례 헤어졌다가 곧장 재회하곤 했던 당시의 나를 보면서 비슷한 생각을 품었으리라. 한심하다거나 이해가 안 된다거나 왜 저렇게 변했나 안타까워했을지도, 가망이 없다는 생각에 진작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남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생각했건 모두 알 수는 없는 노릇이고 판단은 전적으로 그들의 몫이므로 내가 기분 나빠하거나 슬퍼할 필요는 없다.


다만, 나 자신조차도 스스로가 역겹게 느껴지고, 그렇게 한심하게 사느니 차라리 골목에서 튀어나온 차에 받혀버리는 게 어떻겠냐며 좌우를 살피지 않고 건너는 순간이 잦아졌다는 것은, 나를 보호하는 나는 없고 나를 공격하는 나만이 몸과 마음을 지배했던 나날들의 괴로움과 외로움은 지금도 내 발목을 잡고 단숨에 나를 심연으로 끌어내린다. 사랑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헛된 믿음은 우리 둘의 관계뿐만 아니라 나의 자존감을 박살냄으로써 그 자리에 거대한 불안을 심었다.


불안. 그건 연인 관계를 망치는 치명적인 감정이다. 머릿속을 헤집는 불안은 결코 해소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한 갈증으로 이어져, 아무리 사랑의 증거를 확인해도 모자라게만 느껴지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한 사람에겐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듯한 허탈함과 지겨움을, 한 사람에겐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느껴지는 공허함과 슬픔을 선사한다.


재회 이후 그는 나를 자주 책망했다. 그럴수록 텅 비어가던 나는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수조차 없게 되어, 종국에는 관계를 끝내야만 했던 수많은 순간을 '그냥' 지나쳤다. 피와 갈증에 잠식되어 점차 부패되어 가던 내 마음은 방관한 채로.




연애 프로그램에서 상대방 때문에 실컷 마음고생하면서도 절대 포기하지 못하는 출연진들의 마음을 이제는 누구보다 잘 안다. 왜 사람들이 쉽게 헤어지지 못하는지, 잘못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관계를 질질 끌고 가는지, 겨우 사랑 하나 지키자고 다른 모든 걸 놓아버리는 미련한 선택에 뛰어들고야 마는지, 이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건 전부 사랑이 불러온 착각 때문이다. 이번만 넘어가면 괜찮아지리라는 착각. 내가 조금만 더 참고 버티면 예전처럼 찬란했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착각. 그 사람이 없으면 나는, 내가 없으면 그 사람은 반드시 무너지고 말 거라는 착각.


그와 함께 행복을 공유했던 기억들은 나를 단단히 옭매는 족쇄가 되었다. 이제 와 이런 이야기를 하기엔 웃기지만, 기실 그와 나는 잘 맞는 부분도 많았다. 떼굴떼굴 구르며 배꼽 빠지게 웃었던 날들이나 아픈 나를 위해 디저트를 사 들고 깜짝 방문했던 반가운 그의 얼굴, 삐뚤빼뚤한 글씨로 써준 편지, 밤의 고속도로를 달리며 큰 소리로 노래를 따라 불렀던 낭만 같은 것들 때문에 나는 그의 무지함이나 무례함을 계속해서 눈감아줬고, 그의 폭력성을 목격하고도 그만둘 수 없었으며, 헤어져서 힘든 것보다 함께 불행한 게 더 나으리라 판단했다. 기대와 실망, 억압과 회유가 반복되는 동안 관계를 정상으로 돌리기 위해 내가 시도한 것들이 모두 무의미해지자 나는 내 감정을 감추는 법을 배웠다. 그건 다른 말로 무기력이었다.




정말로 이번만 넘어가면 괜찮아질까?


조금만 더 참으면 행복했던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다. 절대 그럴 리 없다. 조금 더 버틴다고 괜찮아질 거였으면 애당초 관계는 이렇게까지 휘청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말을 믿고 있는가? 그렇다면 지금 자신이 파놓은 함정에 빠진 셈이다.


내가 그랬듯 많은 이들이 이별하는 순간 자신이 감당해야 할 감정의 무게가 두렵고 무서워서, 한때의 설렘과 다정했던 순간들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믿으며 자신을 속인다. 그게 희망고문에 가까운 거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스스로 속아 넘어가 주길 바라며.



keyword
이전 08화지우고 싶은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