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글 쓰기 싫습니다. 잊고 싶은 일을 계속해서 복기하면서 개같은 그때의 감정을 다시 한번 온몸으로 느끼고 텍스트로 울분을 토해내는 거, 누가 하고 싶겠습니까. 왜 하필 여자들만 연애에 이토록 목숨 거는지 하나하나 따져보고 분석하면서 이 사회가 얼마나 남성 중심으로 짜여 있는지 체감하고 환멸을 느끼는 것도 진절머리가 나요. 요즘은 이 글 쓰는 거 그만두고 싶을 때도 많습니다.
누구에게도 이야기한 적 없는 것 같은데, 저는 제 디폴트 감정이 ‘우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이드브레이크가 풀린 채 내리막길에 서 있는 자동차처럼 스스로 제어하지 않으면 금세 저 밑으로 가라앉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바깥을 나돌아 다니며, 좋아하는 무언가를 잔뜩 만들어 곁에 두고 살아왔습니다. 심장이 여러 개인 사람처럼 미친 듯이 덕질을 하는 이유 중 하나인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글을 쓰는 일은 스스로를 다시 심연으로 끌어내리는 작업 같아서 자주 괴롭습니다.
그렇다고 이 글을 멈추겠다는 건 아닙니다. 제가 모른 척하고 지나친다고 해서 남성 중심의 사회 구조가 사라지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우리 모두는 이 구조 안에서 살아가고 있고, 제가 불편함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결국 저의 삶, 제 친구들의 삶, 그리고 수많은 여성의 삶이 이러한 구조에 끊임없이 영향을 받으니까요. (물론 제가 글을 쓴다고 해서 뭐 얼마나 달라지기야 하겠어요. 아무런 기대도 없습니다. 수백 년이나 이어져 온 구조이니 아마 제가 죽을 때까지도 비슷하겠죠.)
온 세상은 여성에게 앵무새처럼 똑같은 주문을 외웁니다. 네가 참아라, 양보해라, 네가 착하게 굴어야 한다. 어릴 때부터 여성은 남동생을, 오빠를, 아빠를 잘 챙기라는 이야기를 귀에 피가 나도록 듣습니다. 화가 나도 참아야 하고, 갈등을 만들지 않고, 먼저 사과하고 배려하도록 길러지지요. 가정에서뿐만이 아닙니다. 학교에서, 사회에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도 여성은 누군가의 기분을 먼저 살피고 문제를 중재하며 분위기를 유하게 만드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착한 아이, 착한 딸, 착한 여자 친구. 이것이야말로 세상이 여성에게 강요하는 진정한 여성상입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집에서 이런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들은 기억이 없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언니와 제게 “여자인 네가 참아야 한다”, “딸인 네가 배려해야 한다” 하는 식의 성차별적 발언을 하신 적이 없어요. 오히려 저희를 주도적이고 독립적인 사람으로 키우셨습니다. 웃긴 건, 가정교육은 올바르게 받았음에도 결국 학교와 사회에서 ‘착한 여성상’을 배우고 체화했다는 겁니다. 사회가 바라는 여성상은 자연스레 내면에 흡수되었고, 그런 자아는 특히 연애 장면에서 제대로 발현되었습니다. 더 많이 참고, 더 많이 맞추고, 더 많이 배려해야 한다. 그게 사랑을 지키는 길이다. 그렇게 믿었던 것 같습니다.
이쯤 되니 이런 생각도 드네요. ‘나는 집에서 그런 말을 안 듣고 컸으니 다행인 건가?’ 하지만 곧바로 아니라는 대답이 따라옵니다. 저와는 다르게 뼈아프도록 억압당하며 자라난 여성들이 이 세상에 너무나도 많다는 걸 알기 때문이에요.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겠죠. 다만, 저는 집에서만 덜 다쳤을 뿐이지 그 여성들과 같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으니 그들의 아픔이 곧 저의 아픔이기도 합니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착한 여자 콤플렉스’는 연애를 할 때 본격적으로 드러납니다. 남자는 관계가 힘들어지면 고작 ‘우린 안 맞는 것 같다’라는 말로 관계를 포기하거나 회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로 여자는 같은 상황에서 내가 뭘 더 잘해야 하는지를 먼저 떠올리고 해결하려 애씁니다. 화를 내기보다는 인내를 택하고, 원하는 걸 요구하기보다는 가진 것을 양보하려고 합니다. 사회가 그렇게 가르쳤으니까요. 좋은 여자친구가 되려면 남자의 부족함을 이해하고, 받아주고, 맞춰주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고. 이런 식으로 여자들은 감정 노동자 같은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자신의 감정을 죽여서라도 남자의 기분을 맞춰주고, 싸움을 중재하고, 화해의 말을 먼저 꺼내는 희생정신이 투철한 사람이 되죠.
심지어 우리 사회는 남자의 부족함은 너무도 다정하게 정당화해 줍니다. 남자는 서투르다, 남자는 원래 표현을 잘 못한다, 남자는 애 아니면 개다 같은 식의 구차한 말로요. 이런 말들은 남자의 부족함과 실수를 용인해 줌과 동시에 여자에겐 더 많은 이해와 배려를 요구합니다. 여자는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억누르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죠.
그래서일까요? 여자들은 연애만 하면 ‘내가 예민한 걸까?’, ‘이런 상황에서 내가 화나는 거 당연한 거지?’와 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도 많이 들은 나머지 저는 그 말을 제게 건넨 여자들의 얼굴이 전부 하나처럼 느껴집니다. 거기엔 저 자신도 포함되어 있지요. 답답하고 화나는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의심하는 태도야말로 XX 유전자에만 공통적으로 새겨진 버릇입니다. 그렇게 참고 참고 또 참다 보면 어디까지가 진짜 내 감정인지 헷갈리면서 나는 화난 게 아니라고 자기 자신을 가스라이팅하는 지경에까지 이릅니다.
사람마다 다르다고요? 아뇨, 이건 단순히 개개인의 기질이나 성격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가 체계적으로 만들어낸 결과이지요. 우리 사회는 남성에게는 사랑에 대한 책임은 거의 가르치지 않습니다. 연애 안에서조차 이런 불균형이 드러나니 아이를 낳고 기르는 문제로 넘어가면 상황은 더 심각해집니다. 진작부터 남성에게도 사랑과 돌봄의 책임을 교육해 온 사회였다면, 홀로 아기를 출산한 뒤 방치해 숨지게 한 20대 친모에게만 실형을 선고하는 일따위는 없었을 겁니다. 생부는 어디로 갔을까요? 생부는 연락이 닿지 않으면 그걸로 끝입니다. 애는 혼자 만드는 것도 아닌데 그 누구도 생부에게는 주목하지 않죠. 이런 나라에서 ‘사랑에 대한 책임’이라니, 웃기지도 않네요. 이토록 불균형한 구조 속에서 여자가 연애하며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 같습니다.
저는 착한 여자 콤플렉스가 일종의 집단적 세뇌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집, 학교, 직장, 사회 등 오프라인에서, SNS와 광고 같은 미디어에서 매일 여자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모두 동일하죠. 의식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가는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반복되고 누적되는 말들은 외려 의식하지 않는 사이에 더욱 쉽게 내면에 새겨집니다. 여자들은 그렇게 다 똑같은 ‘착한 여자’로 길러집니다.
그게 바로 문제라는 겁니다. 여자들이 너무 착해서가 아니라, 착하게 길러진다는 점이. 착한 여자가 되지 않으면 사랑받지 못할 거라는 공포감이 언제나 마음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 연애할 때 자신의 진짜 목소리를 내면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서 자기 자신을 지워버린다는 점이. 착한 여자 콤플렉스는 결국 사랑을 불균형한 자리에 올려놓습니다. 남자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할 권리를, 여자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를 의무를 떠맡습니다. 착한 여자 콤플렉스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한, 여성이 건강한 사랑을 하기란 너무도 어려운 일일 테지요.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여전히 이런 글은 쓰기 싫습니다. 착한 여자가 되라는 사회의 요구를 직시하는 것이나 그렇게 길러진 여자가 사랑 속에서 어떻게 무너져 가는지를 되새기고 기록하는 일은 여전히 고통일 뿐입니다. 절망적이게도 세상은 여전히 여자들에게 참아라, 양보해라, 착하게 굴어라, 라는 메시지를 되풀이하고 있겠죠.
하지만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감정에 솔직해도 되고, 참지 않아도 되고, 책임감을 덜어내도 된다고. 배려심 넘치며 맞춰주는 여자로 지낼 바에는 차라리 욕을 먹더라도 이기적인 편이 낫다고. 착한 여자 콤플렉스 따위, 언제든 벗어던져도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