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가 빤히 거울을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이름은 ‘트루우먼’. 그녀가 현실이라 믿고 있는 이곳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철저히 계획된 각본대로 흘러가는 TV 프로그램 속 세상이다. 제삼자의 시선으로 트루우먼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은 그곳이 허구의 세계임을 안다. 그러나 트루우먼은 자신을 365일 24시간 내내 감시하고 있는 수백수천 대의 카메라를 발견하지 못한다. 이 세계가 사실은 거대한 세트장이라는 것도. 트루우먼의 생각과 행동은 본인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이며 트루우먼 자신도 그렇게 믿고 있지만, 모든 것은 누군가의 통제하에 달려 있다. 이 세상은 트루우먼에게 반복적으로 같은 메시지를 주입하며 그 메시지는 간결하고도 파괴적이다.
‘남성만을 사랑하고, 남성에게 헌신할 것. 남성의 선택을 받기 위해 꾸밈노동을 자처할 것. 남성만이 너를 구원해 줄 수 있으리라 믿을 것.’
트루우먼은 태어나자마자 이 쇼의 무대 위에 올려진다. 어린 트루우먼을 기다리고 있는 건 왕자님을 만나야만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 있는 동화 속 공주의 모습이다. 장난감 가게 진열대에서도, 게임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트루우먼은 영겁의 기다림 끝에 왕자에게 키스를 받는 공주를 바라보며 낭만을 배운다. 그리고 생각한다.
‘언젠가 나도 저렇게 멋진 왕자님을 만날 수 있겠지.’
좀 더 자란 트루우먼은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진 드라마와 영화 세트장 위에 놓인다. 트루우먼이 맞닥뜨리는 브라운관 속 여자 주인공들은 고난을 감내한 끝에 사랑을 얻거나 인생에서 가장 중대한 목표가 결혼인 것으로 그려진다. 그런 여자 주인공들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트루우먼의 두 눈이 반짝인다. 어렸을 적 보았던 동화에서도 나온 것 같은 사랑의 서사가 트루우먼 내면에 자연스레 스민다. 트루우먼은 또다시 생각한다.
‘사랑만이 여자 인생의 가장 큰 보상이구나. 어딘가에서 나를 구원해 줄 남자가 나타나겠지. 그 운명적인 만남을 기다려야지. 여자는 남자가 있어야 완성되는 존재니까.’
온 세상은 트루우먼이 끊임없이 좋은 연애를 꿈꾸도록 만든다. 연애를 삶의 중요한 축으로 여기게 하고, 결국엔 결혼을 향한 여정으로 발길을 돌리도록 강요한다. 그리하여 브라운관은 허무맹랑하리만치 아름답고도 이상적인 이성애 연애 장면을 끝없이 송출한다. 트루우먼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광고들도 같은 결의 메시지를 던진다. 여자는 남자에게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 남자의 만족감을 위해 살을 도려내고 뼈를 깎아서라도 예뻐져야 하는 존재라고. 여성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다고. 트루우먼은 점점 그것을 세상의 진실이라 믿게 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어렸을 때부터 보고 듣고 배운 그대로 사랑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동화나 드라마 속에서 봐 왔던 것과 현실에서의 사랑은 너무도 다른 얼굴이었던 것이다. 트루우먼이 믿어왔던 사랑이란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았다. 스러져가는 목숨을 살려 줄 귀한 생명수. 그러나 현실에서의 사랑은 그저 바닷물에 지나지 않았다. 겉으로는 아름다워 보이지만 마시면 마실수록 점점 더 갈증을 느끼게 만드는, 깊게 빠졌다가는 죽어버릴 수도 있는,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는 깊고 어두운 미지의 세계.
트루우먼은 곧 알 수 없는 불안에 휩싸인다.
‘왜 사람들은 여자가 남자에게 선택받아야만 가치가 있는 것처럼 이야기할까?’
‘왜 모든 길은 연애와 결혼으로 이어지는 걸까?’
‘그런데 왜 사랑을 갈구할수록 나는 더 외로워지는 걸까?’
사랑이라는 바다 위를 표류하다 서서히 위협을 느낀 트루우먼은 구명조끼를 찾아 입고 서둘러 닻의 방향을 돌린다. 그러나 세트장을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세상은 트루우먼이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파도의 수위를 높인다. 거대한 파도가 곧 트루우먼을 덮치고, 트루우먼은 난파선에서 떨어져 바다에 풍덩 빠진다. 정신없이 허우적대는 트루우먼의 머릿속에 여러 겹의 목소리가 확성기 소리처럼 울려 퍼진다.
“원래 연애는 힘든 거야.”
“남자는 애 아니면 개라잖아. 여자인 네가 좀 더 참고 받아줘.”
“다음번엔 더 좋은 남자 만날 거야.”
“너도 서른 전에는 결혼해야지.”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지.”
이 세계를 벗어나려 발버둥 치는 순간마다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해일처럼 밀려온다. 사회가, 가족이, 친구들과 지인들이, 심지어 그녀 자신이 어떤 역경이 있어도 사랑을 해야만 한다는 강박으로 그녀를 가둔다.
미취학 아동 시절부터 청소년기, 성인이 된 이후에 이르기까지 트루우먼의 모든 삶에는 ‘남자의 사랑이 곧 여자의 완성’이라는 메시지가 재생산된다. 특정한 사건으로 스스로 각성하지 않는 한 이 허구의 메시지는 트루우먼이 숨을 거두는 그날까지 그녀의 발목을 붙잡을 것이다. 평생 진실이라 믿어왔던 말을 어떻게 감히 의심할 수 있겠는가.
영화 <트루먼 쇼>에서는 ‘트루먼 쇼’를 연출한 감독에게 프로그램 진행자가 이렇게 질문한다.
“트루먼은 왜 지금까지 사실을 모르고 지냈을까요?”
감독은 주저 없이 답한다.
“사람은 주어진 환경을 믿고 살기 마련입니다. 간단합니다.”
트루우먼은 영화 속 트루먼과 닮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영화 <트루먼 쇼>에서 짜인 각본은 단순한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한 장치였지만, 트루우먼이 살아가는 세계에서의 그것은 여성의 실제 삶을 규정해 버린다는 것이다. 미디어는 여성을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존재로 각인시키고, 여성에게 사랑만큼 중요한 과업은 없다는 거짓을 세뇌한다. 사랑받지 못하는 여성은 실패자로,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문제 있는 사람으로 취급된다. 결국 여성은 사랑 자체를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인간으로 인정받기 위해 사랑을 필수 과제로 수행한다.
그러나 영화 속 트루먼이 결국에는 자신의 세계가 가짜임을 깨닫고 세트장을 빠져나갔듯, 트루우먼도 언젠가 알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을 가두고 있던 이 세계가 사실은 꾸며진 세트장에 불과했다는 것을. 미디어가 촘촘히 짜놓은 스토리는 어느 한쪽만을 위한 각본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지 않아도 이미 우리는 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그날이 오면 트루우먼은 세트장의 끝에 도달해 바깥세상으로 빠져나가는 문 앞에 설 것이다. 손잡이에 손을 얹고 잠시 숨을 고른 뒤, 마침내 열어젖힐 것이다. 자유를 향한 여정으로 닻을 돌릴 것이다. 꼭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 딱 한 걸음만큼의 용기를 잃지 않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