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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으로 완성되는 여자들

by 끼라

2년 만에 A를 만났다. A는 눈웃음이 매력적이다. 모나지 않고 말랑한 성격 덕분인지 아니면 선천적으로 그런 건지 몰라도 A는 언제나 옅은 미소를 띠고 있다. 밝고 긍정적이며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은 호감형 인간. 나에겐 A의 무표정보다 웃는 얼굴이 더 익숙할 정도다. 어느 타이밍에 어떤 이야기를 하든 항상 애굣살이 볼록 나와 있는 A를 볼 때마다 어떻게 저럴 수 있나 신기하면서도, 웃는 상인 사람과 함께 있다 보면 나 역시도 점차 그의 표정에 물들어가게 된다는 걸, 그럼으로써 처졌던 기분도 조금은 환기가 된다는 걸 실감했다. 뾰족한 말이 난무하는 세상에 이리도 둥글둥글할 수 있다니. A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늘 A를 더 자주 만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런 A를 오랜만에 만났을 때, A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심지어 A의 얼굴에서 지치고 불안했던 지난날의 내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도 같았다. 최근 A에게 쉽사리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이 생긴 터였다.



A가 속해 있는 가장 친한 두 무리의 사람들 중 결혼은커녕 연애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 A 단 한 명뿐인 게 근본적인 문제라고 했다. 가까운 친구들은 모두 결혼했거나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것. 상황 자체만 놓고 보자면 아무 문제없는데, 진짜 문제는 그들의 무례한 태도에 있었다.


A는 오래 연애하지 않고도 잘 살아왔고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기혼(또는 기혼이 될 예정인) 친구들이 은근슬쩍 자신을 본인들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처럼 대하는 게 느껴진다고 했다. 친구들은 같은 말이어도 A가 이야기할 때와 기혼인 친구가 할 때 말의 무게를 다르게 받아들였다. A의 의견은 농담처럼 여겨지거나 무시될 때가 잦았다. A가 쉽게 공감할 수 없는 결혼 생활 이야기가 대화의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A의 소외감 역시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그런 일들이 반복되다 보니 A는 자신의 불쾌감이 어쩌면 열등감으로부터 비롯된 못난 마음이 아닐지,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지, 설마 자신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건지 스스로 의심한 적이 여러 번이라고 말했다. 내가 A의 말에 반박하려 하자 A는, 하지만 자격지심은 아닐 거라고 힘주어 말했다. 완전히 무너진 건 아닌 듯해 마음이 놓이려던 찰나. 두 기혼자 무리 중 몇몇은 A에게 원치도 않는 소개까지 받아보라며 등을 떠민다고 말했다. 더 나이 들면 남자들이 싫어한다면서, 정확히는 ‘안 팔린다’면서. 요즘 같은 때에 내 또래 중에서 아직까지도 이런 구시대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게 놀라운 한편, A의 마음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고 A의 해맑은 웃음이 다 거기로 새어 나가게 한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나는 궁금해졌다.


A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 머릿속에도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었다. 7년간의 연애 공백기를 깨고 애인이 생겼다는 소식을 주변에 전했을 때였다.


“이러이러해서 저러저러한 사람과 사귀기로 했어요.”

“아니, 뭐라고? 남자친구? 말도 안 돼. 얼마 만에 연애하는 거야?”

“한 7년 만일 거예요.”

“잘 됐다. 축하해! 나는 네가 남자를 싫어하는 줄 알았어. 그래서 다시는 연애 못 할 줄 알았는데, 정말 다행이야.”

“아, 싫어하긴요. 저 남자 좋아해요. 하하….”


내게 다행이라고 했다. 정말 다행이라고. 수년이 흐른 지금도 그 말을 건넨 사람의 표정과 자세와 말투 따위까지도 생생히 기억난다.


뭐가 다행이라는 말인가. 비뚤었던 내가 다시 정상의 범주 안으로 되돌아와서? 단 한 번도 누군가의 연애 소식을 듣고 ‘다행’이라는 단어를 떠올려본 적이 없었던 나로서는 어째서 그 단어가 지금 이 자리에서 쓰일 수 있는지 끝끝내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보다 더 절망적인 건 내 연애 소식에 대고 ‘다행이다’와 비슷한 뉘앙스의 말을 건넨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말은 내 발목을 붙들어 맸다.


뭐가 다행이라는 말인가. 도대체 내가 비연애 상태로 지냈던 7년간 나를 뭐라고 생각하고들 있었길래.



최근 몇 년 사이 미·비혼과 1인 가구가 대폭 늘어나면서 ‘결혼은 필수’라는 인식은 점점 약해지는 추세다. 흔히 결혼적령기로 분류되는 연령대인 2030세대의 절반 이상은 “인생에 있어 결혼이 꼭 필요하지 않다”고 답한다. 표면적으로는 이전까지의 세대들보다 결혼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워진 듯하지만, A의 사례처럼 일상에서는 여전히 연애 혹은 결혼 유무가 여성의 정상성을 판별하는 기준으로 작용한다. 짧게는 십수 년, 길게는 평생을 따라다니는 연애나 결혼과 관련된 질문 안에는 ‘한 여성이 남성에게 사랑받고 있는지가 그 사람의 가치를 설명해 준다’는 오래된 사회적 믿음이 반영되어 있다. 결혼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좀 더 세련된 가치관인 것처럼 통용되곤 하지만, 실제 삶을 들여다보면 ‘그래도 하는 게 낫다’는 쪽이 아직은 더 우세하다.


여성의 얼굴이나 몸매, 애인 혹은 남편의 유무와 같은 외적인 요소들이, 성격과 가치관, 커리어와 미래에 앞서 더 자주, 더 쉽게 평가되는 세상에서, 여성들의 자존감은 외부 평가에 강하게 의존될 수밖에 없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많은 여성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는 일은 개인적인 연애의 성취를 넘어서 사회적 성공의 척도로까지 여겨진다. 남자가 무언가를 성취하고 쟁취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도록 길러질 때, 여자는 누군가에게 선택되고 사랑받을 때 가치 있는 존재라는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주입당하며 자라기 마련이니까. 그 결과, 여성에겐 사랑을 받는 것이 중요한 과업이자 자신의 정체성과 직결되는 핵심 가치로 내면화된다.


연애 초반, 남자의 열렬한 구애와 관심은 여자에게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된 것 같은 환상을 심어주고, 그 경험에 중독되어 매달리게 만든다. 여자는 안정적으로 사랑받으며 연애를 이어가야만 자신이 괜찮은 사람인 것처럼 느끼고, 남자의 애정이 식으면 순식간에 추락해 버린다. 남자의 태도가 달라지는 건 단순한 관계의 변화일 뿐인데도 여자는 자신에게서 문제점을 찾기 시작한다. 자신이 덜 매력적이라서 그런지, 어떤 점이 부족한지 재고 따지며 끝없는 자기 검열의 굴레 속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개개인의 성격이라든가 상황 같은 건 지워진 채 겨우 ‘사랑받느냐, 받지 못하느냐’의 문제만으로 많은 여성의 삶이 흔들리고 무너진다. 아마 여성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어보지 않았을까? 애인의 애정 척도에 따라 감정이 오르락내리락 롤러코스터를 타고, 자아가 심하게 요동치는 경험을.


그러나 사랑을 받는 것이 자존감의 유일한 출처가 되면 연애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다. 연애의 실패는 곧 나의 실패인 셈이다. 이는 헤어짐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낳고, 건강하지 못한 관계조차도 쉽게 끝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다.




특히 나이의 문제에 있어서는 더 골치가 아프다. 결혼 적령기, 출산 가능 나이 같은 말은 한쪽 성별에만 유통된다. 얼마 전, <모솔이지만 연애는 하고 싶어>의 한 출연자가 다른 유튜브 채널에 나와 했던 이야기가 부정적인 의미로 인상적이었다. 그에 따르면 결혼정보회사에 가입할 때 남자와 여자의 조건이 다르다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잘 모르겠다. 별로 자세히 알아보고 싶지는 않다. 그가 영상에서 했던 말을 그대로 옮긴다.) 남자는 한 번 가입하면 평생 이용할 수 있는 회원권이 있는 반면, 여자는 매년 새로이 갱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남자는 나이가 들어도 다른 스펙으로 대체가 가능하거나 애초에 나이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지만, 여자는 한 살이 더해질수록 결혼 상대로서 가치가 떨어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젊은 남자든 늙은 남자든, 모두 어린 여자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하도 기가 차서, 육성으로 “참나” 하고 말았다. 한국 사회가 여성을 얼마나 소모품 취급하는지를 단번에 보여주는 사례였다.


얼마 전, 한 모임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삼십대 중반인 B와 C는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여자가 마흔이 넘어가도록 결혼하지 않으면 어딘가 하자 있는 사람 취급을 받으니 하루빨리 결혼해야겠다고. 그런데 현실적으로 당장 결혼할 수 없으니 자꾸 초조해진다고. 나는 곧바로 반박했다. 그건 옛날이야기고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고. 요즘은 비혼인 여자가 꽤 많지만, 남자들은 99%가 결혼을 원하는 데다 직업 멀쩡하고 사지 멀쩡하면 소개도 많이 들어오고 비교적 쉽게 장가갈 수 있는 분위기이니, 외려 나이가 차도 결혼하지 못하면 어딘가 이상한 사람처럼 여겨지는 건 남자 쪽이지 않느냐고. 하지만 그들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사회에서는 ‘노총각’보다 ‘노처녀’의 이미지가 훨씬 부정적이라는 것이다. C는 한 가지 예시를 들어주었다.


C가 다니는 직장에 결혼 적령기가 한참 지난 남자와 여자가 있다. 사람들은 남자에겐 이렇게 이야기한다.

“박 과장은 너무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다니까. 그러니까 여태껏 결혼을 못 하지.”


반면, 여자를 향해선 이런 말이 오간다.

“최 팀장님은 결혼을 못 해서 그런지 너무 예민해.”


우리는 이 차이를 두고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눈 끝에, 몇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남자가 결혼을 못 했다는 사실은 행동의 결과로 해석된다. 반대로 여자가 결혼을 못 했다는 것은 여성의 이해할 수 없는 성격이나 행동의 원인이 된다. 같은 미혼이어도 남성은 노력 부족이나 성격 문제와 같은 개인적 요인으로 결혼을 못 했다는 결괏값이 나오며 부분적인 책임만을 묻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개인으로서 평가받을 수 있다.


반면, 여성은 결혼을 안 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예민하다’, ‘문제 있다’, ‘이기적이다’와 같은 낙인이 따라붙는다. 결혼 유무가 여성의 성격이나 정상성까지 규정해 버리며 여성의 존재를 설명하는 프레임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결혼을 못 한 것 자체가 결함의 증거이므로 이 프레임 안에 갇히면 작은 실수조차도 쉽게 용납되기 어려워진다. 다시 말해, 남성에게 있어 결혼은 사회적 성취 중 하나이지만, 여성에게 결혼은 정상성을 증명하는 조건인 셈이다. 이러한 차이는 ‘연애, 결혼을 안 하는 여자=결함이 있는 여자’라는 낡은 공식을 되풀이한다.


남자는 나이가 들수록 사회적 지위나 경험이 쌓이는 존재로 여겨지고, 여자는 나이가 들수록 다방면에서 기회를 박탈당하기 쉬워진다는 사실은 여성이 남성에게 의존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가부장적 구조에 이바지하며 여성을 연애와 결혼제도 속으로 몰아넣는다. 여성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을 원하는지 생각해 볼 틈도 없이 이성애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시험대 위에 올라 고군분투한다. 아니, 어쩌면 시험대 위에서 합격 불합격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애초에 목숨까지 내놓아야 하는 단두대에 오른 꼴인지도 모른다. 연애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머리가 댕강- 잘려 버리는. 그 끈을 손에 쥔 건 다름 아닌 가부장제일 것이다.




결국 여성이 연애와 결혼에 집착하는 것은 개인의 성격이나 선택 때문이 아니다. 사회가 의도적으로 그 집착을 학습시키고 강화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정작 잘못된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성을 두고는 ‘지팔지꼰’이라며 손가락질한다. 빠져나올 수 없는 굴레를 씌워놓고는 그 안에서 허우적대는 여성을 탓하는 것, 그 모순적인 태도야말로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없는 사회의 폭력적인 민낯이다.


이러한 구조를 견고히 다지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해낸 이가 있다. 과연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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