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말하는 건 사회의 문제이고, 연애는 둘만의 일이잖아. 왜 굳이 이렇게까지 쓰는 거야?”
“연애는 둘의 일이 맞지. 남이 왈가왈부해서 될 일이 아니기도 하고. 그런데 연애는 사회적 맥락에서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어. 왜냐하면 우리가 연애할 때 사용하는 언어나 수행하는 역할, 싸우고 화해하는 태도까지 전부 이 사회 속에서 배운 거잖아. 남자는 연애에서 주도권을 쥐고 적극적으로 리드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여자는 감정적으로 어르고 달래며 배려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주입받아. 연애가 아무리 개인적인 일이라 해도 결국에는 사회 구조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어.”
“아니, 솔직히 네가 겪은 일이나 네가 말하는 경우들은, 그냥 여자가 더 많이 좋아해서 일어난 일 아니야? 그리고 대부분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연애에 더 과몰입하잖아.”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 아예 틀린 말은 아니기도 해. 그렇다면 왜 유독 여자가 더 연애에 몰입하게 됐을까? 이게 핵심이야. 여자에게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인생의 크나큰 과업처럼 여겨지거든. 남자가 성공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때, 여자는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때 비로소 ‘여자’로서 가치가 있다는 메시지를 평생에 걸쳐 듣게 돼.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사랑을 갈구하게 되고 사랑에 목매게 되는 거야.”
“모든 여자가 그렇지는 않잖아. 어떤 여자는 쿨하게 연애하는 반면, 어떤 여자는 집착하기도 해. 이런 건 어떻게 생각해? 이것도 사회 구조 탓으로만 돌릴 수 있다고 봐?”
“사회 구조만을 탓하자는 건 아니야. 개인차도 당연히 존재하겠지. 다만, 이러한 패턴이 왜 하필이면 여성이라는 집단 안에서 유독 반복적으로 나타날까?”
“여자가 남자보다 감정적이라서 그런 거 아냐?”
“넌 언제 적 이야기를 하고 있니. 여성이 더 감정적이라는 건 사회가 만들어 낸 프레임일 뿐이야. 심지어 남성이 화를 내는 건 ‘권위적’이라고 해석되거나 자연스러운 일처럼 용인되는 경우가 많은 반면, 여성이 화를 내면 ‘감정적’이라며 비난하지. 같은 감정 표현이어도 여전히 이 사회는 성별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이곤 해. 그 차이가 편견을 낳는 거고.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 사회가 남자와 여자를 다른 기준으로 평가하기 때문이야. 앞서 말했지만 남자는 ‘무엇을 쟁취했는가’로 평가받고, 여자는 ‘누구에게 선택받았는가’로 평가받아. 즉, 남자는 사랑이 아닌 이유로도 인정받을 기회의 문이 사방으로 열려 있지만, 여자는 그 사람의 커리어나 성취보다는 연애나 결혼 여부로 평가받을 때가 월등히 많아. 연애가 잘 안 풀리면 여자는 자존감이 흔들리면서 자기검열까지 하잖아. 나는 연애에 실패했다고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여자는 수백수천 명 봤어도, 헤어졌다고 인생 망했다며 자기검열하는 남자는 한 번도 못 봤어.”
“그럼 상황이 이렇게 된 데 남자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거야? 여자가 알아서 힘든 연애에서 벗어나면 되잖아.”
“그렇게 말하는 건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거나 다름없어. 연애 속에서의 불균형이 사회에서 만들어지고 다듬어진 결과라면, 그 구조를 개인의 문제로 축소하는 건 상당히 위험해. 물론 남자들을 탓하는 건 아냐. 네 말대로 여성이 불건강한 관계를 단호하게 끊어내야 하는 것도 맞아. 무엇보다 본인을 위해서라도 말이야.
하지만 그게 요즘 같은 세상에서 말처럼 쉬운 일일까? 최근 몇 년 사이에 단지 만나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자가 남자에게 폭행당하고 살해당한 사건은 셀 수 없이 많이 일어났어. 너무도 많은 여자가 고작 그딴 이유로 죽었어. 끔찍하게도,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까지도 말이야.
여자가 진작에 관계 속에서 벗어났어야 했다는 말은 죽은 피해자를 한 번 더 죽이는 것밖에 안 돼. 그러니 어디 가서 그런 말 함부로 하지 않길 바라. 여성이 고백을 거절하거나 관계를 끊어냈다는 이유만으로 생명을 위협받는 사회가 얼마나 비정상적인지 모르겠니? 대부분의 여자들이 남자친구와 헤어졌다고 이야기하면 주변 사람들로부터 무슨 말을 듣는지 알아? ‘안전이별해서 다행이다’라는 말이란다. 이처럼 이별은 어떤 여자들에겐 목숨이 달려 있는 생존의 문제가 되기도 해. 사회가 여성에게 숨 쉬듯 주입하는 것처럼 남성에게도 똑같이 사랑의 책임감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이러한 문제는 계속해서 반복될 거야.”
“그래도 요즘은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예전처럼 노골적인 차별은 많이 줄었잖아. 굳이 이렇게까지 하나하나 따져야 해?”
“바뀌긴 바뀌었지. 예전처럼 차별을 대놓고 하지는 않으니까. 그런데 바뀌었다고 해서 사라진 건 아니야.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지. 예전에는 ‘여자는 어때야 한다’는 식의 노골적인 표현으로 직접 못 박았다면, 지금은 여자가 문제를 지적하면 문제에 답을 하기보다는 ‘왜 이렇게 예민하냐’, ‘너 페미냐’, ‘남혐하냐’는 식의 핀트가 어긋난 답변이 돌아오지. 이게 바로 백래시(변화의 흐름에 더 거세게 반발하는 현상)야.
연애에서도 똑같아. 그래서 많은 여자들이 모르는 척 참고 넘기기, 다시 말해 흐린눈을 택하는 거야. 차라리 덮어두는 게 갈등을 줄이는 길인 것 같으니까.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게 가장 확실하게 불평등을 유지하는 방법이야.
그러니 무언가를 바꾸고 싶다면 최소한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그것을 말로 표현해야 해. 침묵은 현상을 유지시킬 뿐이니까. 그래서 나는 지금도 굳이 따지는 거야. 내 연애담에서 구조의 문제를 발견했으니까. 내가 예민하기 때문이 아니라, 더욱 정확히 보기 위해서. 누군가를 불쾌하거나 불편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떠한 진실이 현실의 문제를 덮을 수 없도록 말이야. 변화란 가만히 있는다고 오는 게 아니거든. 누군가는 계속 말해야만 찾아오지.
사회 구조가 바뀔 거라는 기대는 전혀 없어. 다만, 나는 나와 같은 문제를 겪는 누군가가 있다면, 더 이상 자책하지 말고 거기서 벗어날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 속에 갇혀 있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또 거기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지 누구보다 잘 아니까. 그것이야말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단 하나의 변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