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지랑이

by 끼라

숟가락 위로 동그랗게 말아 올린 칼국수 면발이 다시 그릇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당황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고개를 들어 마주 앉아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해맑은 건지 해맑은 척하는 건지, 정말 몰라서 묻는 건지 알면서도 묻는 건지, 도무지 해석할 수 없는 얼굴로 그는 방금 내게 건넨 말을 기어코 다시 한번 꺼냈다.


“너는 페미 어떻게 생각해?”


아니, ‘페미니즘’도 아니고 ‘페미’라고? 살면서 이런 질문을 면대면으로, 그것도 페미니즘에 각성한 후 처음으로 마음을 열게 만든 사람의 입을 통해 듣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출제 가능성이 높은 질문임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수년 만에 시작한 달콤한 연애에 정신이 팔려 젠더갈등의 가능성 자체를 아예 지워버리고야 만 것이다. 그와 손을 잡고 구름 위를 하하호호 누비던 나는 그 질문을 듣자마자 곧바로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세계, 유토피아의 대척점이자 젠더갈등의 진원지로 돌아왔다. 아, 맞다… 여기 대한민국이었지….


태연히 칼국수를 마저 흡입하며 신이라도 난 듯 다리까지 떨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니 아마도 그는 내가 뭐라고 대답할지, 그에 대해 자신이 뭐라고 받아칠지까지 준비를 끝마친 것 같았다. 요 며칠 동안 나와 사랑을 속삭이던 그 사람이 맞나. 어쩌면 누군가와 영혼이 바뀌어버린 게 아닐까,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찌 됐든 이미 당황한 표정으로써 나의 패가 까발려진 것이나 다름없으니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이 주제가 앞으로 우리 사이에 있어서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으려면 너는 당장 나의 답변을 수긍해야만 할 거라는 뉘앙스로 답하는 것뿐이었다.


“요즘 페미니스트 아닌 여자가 있나?”

“내 주변엔 아무도 없어. 우리 누나도 그렇고, 여사친들도 대부분 페미 싫어하던데.”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나는 조용히 숟가락을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은 다음, 그에게 “우린 아무래도 안 맞는 것 같다. 페미 아닌 여자 만나서 잘 먹고 잘살길!” 하고는 빠르게 짐을 챙겨 가게 밖으로 빠져나온 뒤 나를 따라오는 그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날리고 택시를 잡아타려고 하였으나, 정신을 차려 보니 가게를 먼저 빠져나온 건 그였고 나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날린 것 역시 그였다.


“우린 아무래도 안 맞는 것 같다. 페미인 남자 만나서 잘 먹고 잘살길!”


이 모든 것은 짧은 악몽처럼 내 머릿속에서 재생된 영상이었으며 장면은 다시 우리가 말없이 앉아 있는 식당 내부로 전환된다.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대답을 재촉하는 눈치다. 여전히 나는 갈림길 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이별의 가능성을 감수하고서라도 부딪혀볼 것이냐, 마음은 불편하더라도 평화를 지킬 것이냐. 두 마음이 정신없이 싸우던 와중, 아직 승자가 정해지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입이 귀신 쓰인 듯 제멋대로 움직이며 진심이 아닌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영화 <인터스텔라> 속 서재에서처럼 나 자신에게 제발 닥치라고 소리를 질러보지만, 미래의 내가 지르는 음성은 사랑이라는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고 만다.


“하긴, 이런 얘기 불편해하는 사람이 많지. (무슨 소리야! 불편한 게 비정상이잖아!) 나도 예전에는 공부 좀 했었는데, 뭐가 맞는지 잘 모르겠더라고. (뭘 몰라! 다 알고 있잖아!)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싸우는 거 피곤하고 기 빨려서 관심 끈 지 오래됐어. (말도 안 되는 소리 제발 그만해! 너는 여전히 페미니스트잖아!)”


그는 내 답변이 만족스럽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슬쩍 지어 보였다.


“아, 요즘은 아니구나. 사실 예전에 너 인스타그램 보고 그쪽 성향일 거라고 짐작은 했었어.”

“인스타그램?”

“응. 페미니즘 관련 책들 많이 보는 것 같던데? 예전에 피드 보고 ‘좀 빡세다’라고 생각했어.”


빡세다고? 도대체 뭐가? 그가 말하는 동안 재빠르게 인스타그램을 열어 내 계정의 피드를 촤르륵 훑어본다. 그의 의견에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그가 ‘빡세다’고 느낀 게시물은 페미니즘에 관한 내 생각을 가감 없이 드러낸 도서 리뷰들이거나 혹은 매년 세계 여성의 날마다 ‘여성의 목소리가 더욱 커지는 그날까지!’라는 텍스트와 함께 업로드했던, 미혼모나 여성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기부 인증샷이었을 것이다. 내가 핸드폰 화면에 집중하고 있는 사이, 그는 꿋꿋이 말을 이어갔다.


“나는 페미니즘이든 정치든 뭐든 간에 어느 한쪽에 치우쳐져 있는 사람들 보면 뭔가 무섭더라고.”

“왜?”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광신도 같아서.”


숨이 탁 막혔다. 그럼, 지금까지 내가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는 뜻인가?


“뭐든 중립이 좋다고 생각해. 나는 고집 센 사람이 제일 싫거든. 그런데 보통 한쪽 말만 믿는 사람들은 대부분 고집이 세. 너는 고집 센 편이야?”

“고집? 나는 ‘고집’이라는 것 자체를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고집이 센 편은 아닌 것 같아.”

“다행이네.”

“너는 그럼 페미니스트를 안 좋게 생각해?”

“아니. 방금도 이야기했지만, 나는 중립이야. 네가 페미니스트라면 존중할 수도 있어.”


그는 스스로 중립이라 주장하고 존중하겠다 말했지만, ‘페미니즘’을 ‘페미’라 부르는 사람들이 어떤 결인지, 그가 건넨 질문의 저의가 무엇인지 익히 알고 있던 터라 그의 말에 신빙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이성적으로는 충분히 판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술에 취하듯 감정에 한껏 취해버리면 이성 따위는 그저 별나라 이야기로 변모하기 마련이었고, 몸집이 불어난 감정에 짓눌린 이성은 인어공주처럼 제 목소리를 잃고야 마는 법이었다. 나는 그와 나 자신을 속이며 나의 신념을 물거품으로 만든 셈이었다. 입이라는 수챗구멍으로 속절없이 빠져나가는 신념을 다시 삼키기도 전에 그는 또 다른 질문을 건넸다.


“그럼 너 트위터도 해?”

“트위터? 응, 덕질하는 것 때문에 예전에 가입했어. 근데 트위터는 왜?”

“내 친구가 트위터 하는 여자는 만나지 말라고 하더라고.”

“무슨 소리야? 덕질하려면 트위터는 필수야. 덕질하는 사람 중에 트위터 안 하는 사람 없을걸? 트위터가 어때서?”

“그럼 네 계정 보여주면 안 돼?”

“보여달라고?”

“왜? 이상한 거라도 있어?”


찰나에 ‘이건 사생활인데 왜 보여줘야 하지? 진지하게 사상검증이라도 할 셈인가? 지금 뭐 하자는 거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며 금세 구겨진 종이 같은 기분이 되었지만 이미 나의 진심은 파쇄된 지 오래였다.


“아니, 그래. 뭐 못 보여줄 건 없으니까.”


핸드폰을 건네받은 그는 보물이라도 캐낸 듯한 광부처럼 다소 상기된 얼굴로 내 타임라인에 흘러들어오는 게시물들과 내가 직접 리트윗한 글들을 하나하나 신중히 살펴보았다. 그중 8할은 덕질 이야기, 2할은 페미니스트들의 게시글이었다. 그는 핸드폰 화면을 내 쪽으로 돌려 내가 리트윗한 게시물 하나를 가리키고는 ‘요즘은 아니라며?’라는 말이 내포된, 추궁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 그게 뭐지? 실수로 리트윗 버튼이 눌렸나 봐.”


말도 안 되는 핑계라는 것쯤은 그도 눈치챘을 것이다. 다급히 핸드폰을 뺏어와 리트윗 취소 버튼을 누르자 타임라인에서 해당 게시글이 재빠르게 자취를 감추었다.


만에 하나 또다시 누군가와 연애하게 된다면 반드시 올바른 젠더의식을 갖춘 사람을 만나겠다는 것이 첫 번째 조건이자 나와의 약속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가장 한심하게 여기는 부류의 입맛에 맞는 언행을 그에게 성실히 보여주고 들려줌으로써 나 자신을 철저히 배반하기를 택했다.




밤.


그가 어떤 재미난 이야기를 해도 그의 말에 집중할 수가 없다. 나와 달리 웃고 떠드는 그는 즐거워 보인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건지. 아까 나의 순발력 덕분에 그가 내게 가운뎃손가락을 날리며 자리를 떠나버리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지만, 나는 중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있음을 느낀다.


새벽 2시.


좀처럼 잠이 오질 않는다. 더워서 그런가. 나는 화장실로 가서 얼굴에 찬물을 끼얹는다. 두 번, 세 번, 네 번. 잔머리까지 전부 젖었다. 코끝과 턱 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고개를 들어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들여다본다. 검은색 눈동자가 아지랑이처럼 일렁이고 있다. 눈이 왜 이러지. 얼굴을 거울 가까이로 가져간다. 왼쪽 눈, 오른쪽 눈을 번갈아 바라본다. 검은색 눈동자는 갈색이 되었다가, 회색으로 보이기도 했다가, 파란색, 녹색, 붉은색, 노란색, 점차 밝아져 결국은 흰자와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새벽 5시.


일찍이 잠이 든 그의 얼굴은 좋은 꿈이라도 꾸는 듯 평온해 보인다.

keyword
이전 03화한여름의 매미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