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한여름의 매미처럼

by 끼라

과연 사랑에 빠지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건 아니라고 본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랑이란 이성애든 동성애든 흔히 일컬어지는 ‘연인 관계에서의 사랑’을 말한다. 불행하게도 요즘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악질적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허다해서 이렇게 말하기가 조심스럽지만, 본질적인 의미만을 놓고 보자면 누군가를 건전하고 건강하게 사랑하는 일 자체는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남을 사랑할 줄 안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아봤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까. 과거에 어떤 사람을 순수하고도 열렬한 마음으로 사랑했을 때, 나는 사랑이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멋진 일임을 알았다.


그와 동시에 어떤 이들은 ‘사랑은 자해다’라는 명제가 고질적인 생각으로 자리하도록 끔찍한 경험을 남겨 주기도 한다. 보통은 ‘사랑’과 ‘나 자신’ 둘 중에서 사랑이 나를 앞질렀을 때 후회스러운 일들이 발생한다.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사랑의 아픔과 사랑의 충만함. 이토록 사랑은 온갖 모순으로 뒤범벅된 기이한 감정이다. 그래서 사람이 사랑을 끌어안고 있으면 좀처럼 스스로 통제가 안 되고 정신이 이상해지는가 보다.


나에게 사랑은 기쁨보단 고통에 가깝다. 여러 차례 경험해 본 바, 두 번 다신 그 누구도 사랑하고 싶지 않다는 결론이 나왔다. 어쩌면 내가 안 좋은 기억만 곱씹는 부정적이고 뒤끝 있는 사람이라서 불행했던 기억만을 선명하게 떠올리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객관적으로 되짚어보려 애썼다. 그러나 예상했던 대로였다. 행복했던 기억보다 불행했던 기억의 물리적인 양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다른 관계에서는 큰 문제가 없는데 유독 연인 관계에서만 너무도 쉽게 삐걱거렸다. 이 정도면 내 사주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로. 실제로 사주를 볼 때마다 “남자 운이 없다”, “혼자 사는 게 현명하다”, “사주에 남자가 공망하다. 빌 공, 망할 망!”이라는 소리를 듣긴 한다. 중년의 아저씨들에게 ‘나는 결혼 생각이 없다’고 대놓고 말해서 칭찬받은 곳은 철학관이 유일했다.


그러니 비연애를 다짐한 건 사과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솔직히 얼마나 쉬웠는지 모른다. 어차피 사랑을 잘하지도 못하는 것 같고, 사랑할 만한 남자도 딱히 없고, 사랑하지 않고도 잘 살고 있는데 계속해서 사랑하지 않으면 여성 인권에 도움까지 된다니! 굳이 무언가를 실천할 필요도 없이 앞으로도 쭉 지금처럼만 살아가면 되는 셈이었다. 열심히 일해서 돈 벌고, 그 돈으로 혼자서 시간을 보내거나 사랑하는 가족, 친구들과 추억을 쌓아가며 소소한 행복 누리기. 남자가 끼어들지 않는 단조롭고도 평화로운 삶은 어느덧 7년이나 지속되었다.


오랜 시간 운동을 하지 않으면 몸이 딱딱하게 굳어지듯 혼자인 시간이 길어진 탓에 연애와 관련된 나의 모든 감각기관은 아주 깊게 잠들어가고 있었다. 어떤 날에는 연애 프로그램에서 뜻대로 되지 않는 상대방 때문에 마음고생하고 눈물 줄줄 흘리는 출연진들을 보며 도대체 사람들이 왜 저렇게까지 이별을 두려워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 그냥 헤어지면 되잖아? 저렇게 힘든데 왜 못 헤어져?”


건조하다 못해 사막처럼 완전히 메말라 버린 나의 말에 친구는 너 싸패냐며 되물었다. 아니다. 나는 진심이었다. 어차피 결말이 다 정해져 있는 연애 이야기 따위 뭐가 그리들 재밌다고 난리인지. 차라리 수학 공부하는 게 더 낫겠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자리를 떴다.


그러나 사막에도 뜻밖의 비가 찾아오는 순간이 있듯 사랑은 예상치도 못할 타이밍에 새로운 얼굴로 불쑥 나타나 온 마음을 흠뻑 적셔버리기도 한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나에게도 갑작스러운 폭우가 쏟아졌다.




남자를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긴 했지만, 이성으로서가 아니라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는 친구로서 소개받는 자리였기에 별 기대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나갔다. 새로운 누군가를 알게 되는 것보다도 한창 푹 빠져 있었던 그 ‘공통분모’에 대해 함께 떠들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사실에 잔뜩 들떠있었다. 단둘이 만나는 것도 아니고 나와 내 친구를 포함해 네 명이나 모이는 자리이니, 연인 관계로의 발전 가능성 같은 건 염두에 둘 필요조차 없었다. 잘 보일 사람이 없어서 조금의 긴장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몸에 힘을 빼니 말과 행동이 자연스러워지고 어색했던 분위기도 금세 사라졌다. 초면인 사람이 둘이나 있었는데도 오래된 친구들을 만난 것처럼 마음이 편안했다.


나는 나다울 수 있었다. 그건 거기 모인 사람들 모두가 예의를 지키며 서로의 대화를 경청해 주었기 때문이리라. 우리의 대화는 술술 이어졌고, 술도 술술 들어갔다. 술이 술을 삼키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겨우 자리를 파했다. 막판에는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어떻게 집에 돌아갔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바로 다음 날 아침의 묘했던 기분만큼은 방금 전의 일처럼 선명하다. 그 술자리에서 딱히 인상 깊은 대화가 오갔던 것도,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상황은 이미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나는 몸에 힘을 준 채 계속해서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같은 장면을 몇 번이고 되돌려보면서 흐릿해지는 기억을 의도적으로 붙잡았다. 머릿속에 남은 전날 밤의 잔상, 누군가의 표정과 웃음소리 같은 것들을. 한참 동안 똑바로 누워 밀려드는 낯선 감정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 감정의 실체를 확인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아서였다. 곧바로 그와의 다음 약속을 잡았다.


밥 먹기, 커피 마시며 대화 나누기, 영화 보기, 산책하기, 술 마시기. 친구들과의 만남에서 흔히 하는 모든 것들을 우리는 반나절 만에 다 해버렸다. 길고도 진솔한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첫 만남 때처럼, 나는 나다울 수 있었다. 밀도 높은 만남이었으나 이전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사건이 있지는 않았다. 그날 이후로 내가 그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에게 궁금한 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내가 확인해보고자 했던 감정이 사랑이었음을 자각하게 되었을 뿐.


여러 차례 만남을 거듭할수록 우리 사이는 편안해졌지만, 편안해서 내 마음은 불편했다. 그와 잘해보고 싶으면서도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누구도 사랑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지켜온 마음과 페미니스트로서 굳게 쌓아온 신념이 파도 앞의 모래성처럼 순식간에 부서질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없었다. 신념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무너질 리 없지. 그것도 겨우 사랑 때문에? 웃긴 소리 하지 말아라.


그러나 나는 분명 기억한다. 함께 걸을 때 그의 손을 바라보며 망설이던 순간들, 며칠 내내 나의 주위를 맴돌던 기분 좋은 불안과 긴장감을. 그것은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것도. 부풀어 오르는 마음이 터질 것 같던 어느 날, 그에게 머리가 아프다고 말했다. 도무지 너의 마음을 알 길이 없어서 계속 머릿속이 울려댄다며 짜증을 냈다. 그는 한참을 웃었다. 그리고 곧 입을 열었다. 내 마음이 너와 같지 않으면 지금 이 새벽에 내가 여기에 있겠냐고.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나를 그만 다그치기로 했다. 사랑은 잘못된 것이 아니니 마음 가는 대로 하라고, 그렇게 파도에 휩쓸려가는 나를 그저 내버려 두었다.




누군가를 알게 된다는 건 낯선 세계의 문을 여는 것과도 같다. 그해 여름, 나는 그가 평생에 걸쳐 구축해 놓은 그의 우주를 자유롭게 헤엄치며 매일 새로운 것들을 접했다. 그가 좋아하는 음악을 같이 듣고, 재미있게 보았다던 영화와 드라마를 같이 보고, 그가 참새처럼 쫑알쫑알 늘어놓는, 단 한 번도 관심 가져본 적 없던 것들에 대한 다채로운 이야기를 들으며 나의 세계를 넓혀갔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나를 궁금해했고 또 흥미로워했다. 내가 지나치듯 꺼낸 사소한 이야기들까지도 전부 기억해 주었다. 우리는 만나지 않는 날에도 하루에 네다섯 시간 이상 전화를 하며 쉴 틈 없이 대화를 이어갔다.


그는 내가 먹어본 적 없었던 것을 먹여 주었고, 가본 적 없던 곳에 데려가 그중에서도 가장 멋진 풍경을 보여주었다. 그와 함께 있을 때 내 마음이 얼마나 안정적이었는지. 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면 시원한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한여름에 만난 우리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매미처럼 서로에게 착 달라붙은 채 좀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다. 나는 여름방학을 맞이한 초등학생처럼 늘 들뜬 기분이 되었다. 별거 아닌 일로도 크게 웃을 만큼 마음이 느긋하고 여유로워졌다.


하루는 어이없게 그를 곤란에 빠뜨린 적도 있다. 그는 일자로 누워있었고, 나는 옆에 엎드려 턱을 괸 채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떠드는 사이, 문득 두려움이 찾아왔다.


쿵, 쿵, 쿵.


심장 박동이 귓속에서 느껴질 정도였다. 그것은 지금 손에 쥔 행복의 크기가 너무도 커서 언젠가 우리가 헤어지게 된다면 내가 아주 많이 힘들지도 모른다는 예감으로부터 비롯된 마음이었다.


사람들이 왜 굳이 결혼을 택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데이트를 한 후에 헤어지기 싫어서 결혼해 버렸다던 이들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었음을 알아챘다. 그걸 스스로 이해한 나 자신이 어찌나 낯설고도 무서웠는지. 지난날의 신념이 와장창 깨져버렸다는 데 적잖은 실망감을 느꼈던 것도 같다. 해일처럼 닥친 감정들을 주체할 수 없어서 나도 모르게 그냥 눈물만 주르륵 흘렸다. 그는 갑자기 우는 나를 보고 놀란 눈으로 벌떡 일어나 앉아 당황스러워하면서도 내가 진정될 때까지 나를 토닥여주었다. 그 손길이 따듯하고 다정해서 또 겁이 났다.


이 모든 것이 사랑이었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일 것이다.




그해 여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또 똑같은 결정을 내릴까? 아마도 그럴 것 같다. 마냥 설레고 행복했던 숱한 날들도 분명 존재했으니까.


그러나 만약 내게 진짜로 그럴 기회가 주어진다면,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 동안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없었음을 이제는 알기 때문에. 그로 인해 나의 영혼이 얼마나 크게 훼손되었는지를 알기 때문에.

keyword
이전 02화여자 되기를 중단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