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매목록: PS2 월드 사커 위닝일레븐 9 라이브웨어 에볼루션 게임 CD
친구네 집에 플레이스테이션 2라는 비디오 게임기가 있었다. 친구 집에 놀러 갈 때마다 늘 그 게임기를 가지고 놀았는데 가격도 비싸서 쉽게 가질 수 없었던 플레이스테이션 2는 내 로망과도 같았다. 자꾸만 눈에 아른거렸기에 갖고 싶은 욕망은 점점 커졌는데 아빠한테 조르고 졸라 마침내 초등학교 5학년 때 생일 선물로 갖게 되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보고 축구에 빠져서 자연스럽게 축구 게임도 좋아했다. 학교가 끝나고 잠자기 전까지 하루 종일 게임만 했다. 위닝일레븐이란 축구 게임인데 이 게임은 매년 시리즈 별로 선수들의 최신 이적과 능력치를 반영하고 그래픽, 게임성 등을 업데이트해서 신작을 출시했다.
올해도 변함없이 위닝일레븐 신작이 출시되었고 작년 시리즈(위닝일레븐 8)는 사지 않고 건너뛰었기 때문에 이번에 출시된 위닝일레븐 9이 너무너무 갖고 싶었다. 동네에 있던 대형마트 2층엔 전자제품 코너가 있었는데 위닝일레븐 신작 가격을 확인해 보니 5만 원이 훌쩍 넘는 가격이었다. 5만 원이라... 5만 원은 초등학생이 구매하기엔 감히 넘볼 수 없었던 가격이었다. 엄마한테 사달라고 졸라봤지만 끝끝내 엄마를 설득할 수 없었다. 나한텐 옛날에 샀던 위닝일레븐 7 시디가 이미 있었기에 엄마 눈엔 전부 똑같은 축구게임으로 보였나 보다.
나는 강한 유혹에 시달렸다. 신규 물리엔진과 새롭게 추가된 선수와 클럽팀. 다양한 기능이 업그레이드된 위닝일레븐을 즐기고 있는 상상 속의 내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순간 서랍 속에 엄마가 간직해 놓으셨던 비상금이 떠올랐다.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버린 나는 집에 사람이 없을 때 엄마 비상금에 손을 대었다. 너무나도 쉽게 수중에 5만 원이 생겼다. 양심에 찔려 수도 없이 고민했지만 나는 이미 마트 안에 있는 게임 CD 진열장 앞에 서있었다. 한참을 바라보다 결국 CD를 구입했다.
갈팡질팡했던 것도 잠시 나는 집에 도착해서 게임을 켜는 순간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게임을 즐겼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엄마는 누군가 자신의 비상금을 훔쳤다는 사실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나는 거짓말하면 티가 나는 스타일이다. 상대방이 쉽게 눈치채기 때문에 거짓말을 되도록 안 하려고 한다. 엄마는 나에게 비상금에 손을 대었냐고 물어보셨고 나는 두렵고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입이 떨어지지 않아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내 예상보다 상황은 더 심각했고 막내의 비상금 스틸 소동이 우리 집 군기반장이었던 큰누나한테까지 전해지면서 분위기는 더욱 무거워졌다. 큰누나는 집에 있던 노란색 둥근 플라스틱 의자에 있던 뚜껑을 떼서 내 머리를 임팩트 있게 강타했다. 얼얼하게 맞아서 그런지 머리가 멍했다. 누나는 지금 당장 마트에 가서 게임 CD를 환불해오라고 했다. 평소에 그랬던 적이 없던 애가 게임에 눈이 돌아가서 저지른 일이기에 더 크게 혼이 났다. 결국 나는 게임을 즐긴지 하루도 넘기지 못한 채 환불하러 가게 되었다.
그 이후로 사건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어릴 적 일이라 자세히 기억은 나질 않지만 사실 게임 CD 포장지도 뜯었고 이미 CD를 사용했기 때문에 100% 환불은 불가능했을 거다. 확실한 건 그 게임 CD를 집에서 두 번 다시 플레이하진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로 나는 두 번 다시 남의 돈이나 물건을 훔치지 않게 되었다.
1년 후
설날 명절이 되었다. 나는 친척들이 주신 용돈을 차곡차곡 모아 설레는 마음으로 한국판으로 나온 위닝일레븐 9 CD를 구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