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매목록: 푸마 축구화
시야 끝에서 동그란 무지개 점이 번쩍인다. 내 검은 눈동자는 무의식적으로 점을 쫓았다. 무지개 점은 점점 더 커지며 수십 번 깜빡였고 내 시야는 무지갯빛으로 덮였다.
그렇게 나는 정신을 잃었다.
고요한 방에서 적막함을 뚫고 TV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떠보니 시간은 한 시간 정도 지나 있었고 인기척이 없는 걸로 봐서 집에는 아직 아무도 오지 않은 것 같다. 요즘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나는 일이 꽤 잦아졌다. 나도 어느덧 이 현상에 익숙해지는 듯했다.
우리 집은 IMF 이후 가정 형편이 부쩍 어려워졌고 더 이상 아빠 벌이에만 의존할 수 없게 되었다. 주부였던 엄마도 자식 셋을 먹여 살리기 위해 직장을 구하셨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게임을 좋아했다. 게임을 하면 시간 가는 줄 몰랐고 게임에 몰두하면 배고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성장기 시기였던 초등학생인 내게 게임으로 인한 식욕부진은 좋은 영향을 주진 못했다.
어느 날 평소처럼 혼자 PC방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 게임을 하던 도중에 또다시 무지개 점이 눈앞에 깜빡이기 시작했다. 불안했다. 증상이 시작됐나? 밖에서까지 쓰러질 수는 없었다. 하지만 무지개 점은 계속해서 커졌고 나는 또다시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하얀 천장이 보였다. 한 쪽 팔엔 링거를 맞고 있었고 눈앞엔 엄마가 보였다. 응급실이었다. PC방 사장님이 쓰러져 있던 날 발견하고 119에 신고하셨다. 기절하는 원인을 확인하기 위해 검사를 받기로 했다. 의사는 내가 보인 증상이 간질 증세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간질은 유전이기도 해서 의사는 우리 집안에 간질 환자가 있는지 물어봤다. 하지만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친척 중에서도 간질 환자는 없었다. 정확한 진단을 위해 뇌 검사, 피 검사 등 여러 검사를 거쳤고 종합적인 진단 결과 나는 간질이 아니라 영양실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훗날 어머니는 병원에서 내가 영양실조라고 진단하자 창피했다고 말씀하셨다. 요즘 시대에 영양실조라니.. 엄마는 내게 잘 못 챙겨줘서 미안하다고 하셨다. 의사 선생님은 내게 밥을 제때 먹는 것과 취미로 운동하는 것을 권했다. 운동을 하면 근육도 키워지고 활동량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밥도 잘 먹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난 살면서 운동을 해본 적도 관심도 없었다. 그래도 건강해지고 싶다는 마음은 컸기 때문에 고민이 되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 스친 생각은 내가 축구 게임을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
“아. 나 축구 좋아하지”
그래 축구를 해보자. 나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축구를 시작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축구를 좋아하는 친구들과 더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이제 게임뿐만 아니라 운동으로도 축구에 푹 빠지게 되었다.
축구를 할 때 항상 운동화나 하얀 실내화만 신고 축구를 했었는데 친구들이 신었던 축구화가 부러웠다. 평소에 마음에 담아둔 축구화가 있었는데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약 7만 원 정도 되었다. 당시엔 너무 큰돈이어서 용돈으로 사기엔 돈이 한참 부족했고 부모님께 사달라고 하기엔 죄송스러웠다. 어떻게 돈을 마련할까 고민하던 찰나 예전에 나름 높은 레벨까지 키워놨던 게임 캐릭터가 생각났다. 많은 시간을 갈아 넣어야만 레벨 업을 할 수 있었던 노가다성 게임이라 레벨만 높아도 꽤 많은 사람들에게 수요가 있었고 값을 꽤 후하게 쳐줬다. 계정을 판매하면 축구화를 살 수 있었다. 파는 결정이 쉽진 않았지만 결국 축구화를 사기로 결정했다.
검은색 푸마 축구화. 내가 그토록 사고 싶었던 축구화였는데 오늘 처음 신는 날이라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다행히 사이즈는 딱 맞았고 착용감도 좋았다. 나는 축구화를 신고 운동장으로 나가 친구들과 신나게 공을 차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축구화를 신고 나서야 마침내 눈동자 너머로 무지개가 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