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없는 20대 푸념
지하철 계단을 오르다 보면 문득 멈칫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낮은 천장과 인공 조명이 끝나는 지점, 그 틈 사이로 바깥 풍경이 액자처럼 펼쳐질 때. 가로로 길게 찢긴 하늘 사이로 구름이 둥둥 떠다니고 그 아래로는 뜨거운 햇빛에 데워진 도시가 미동 없이 펼쳐진다.
날이 아주 맑은 날이면 그 장면이 컴퓨터 배경화면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정말 누가 일부러 거기 걸어둔 그림처럼.그럴 땐 숨이 차서가 아니라, 그냥 가슴이 벅차서 걸음을 멈춘다.
마지막 턱에 오른발을 얹고, 작은 한숨처럼
‘아, 예쁘다’ 혼잣말을 내뱉으면 조금 구겨졌던 마음이 쓱 펴지는 기분.
별일은 아니지만 그런 날엔 하루가 조금 덜 버겁다.
입구 근처 전봇대엔 ‘강남 도보 3분, 분양가 n억부터’ 같은 현수막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그 위엔 매미가 벗고 간 허물이 바삭하게 매달려 있다.
이미 떠나버린 여름의 몸.
소리는 진작 사라졌는데, 껍질은 아직 그 자리에 남아 있다. 그런데 누군가는 벗고 지나간 계절을 나는 아직도 입고 있다.
제자리에 멈춘 껍질처럼 나도 이 여름에 걸려 있는 사람 같다.
지하철은 종착역이라도 있지만 나는 아직 목적지가 어딘지 모른다.
출근하고 퇴근하고,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고르고.
새벽 세 시에 야식 배달앱을 들여다보다가 불 꺼진 방에서 혼자 멍하니 누워 있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달팽이도 집이 있고 거북이도 집이 있는데 나는 아직도 부모님 집에 산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서랍 속 통장 잔고와 부동산 앱만 들여다보는 집 없는 사람이다.
집이 없다는 건 단지 잠잘 공간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현관 비밀번호를 내 손으로 바꾸어본 적 없고,
냉장고 속 반찬이 전부 내가 고른 게 아니라는 뜻.
‘돌아갈 곳’이 아니라 늘 ‘머무를 곳’을 상상해야 하는 삶.
어디에도 나만의 자리를 갖지 못한 채 계절과 계절 사이 어딘가에 매달려 있는 사람. 그게 지금의 나다.
몇 달 전엔 친구가 신림에서 혼자 살기 시작했다.
반지하 월세 42만 원짜리 원룸.
채광은 없지만 곰팡이도 없고, 천장에 금도 없었다. 그는 이사 첫날 원목 선반을 조립하고 작은 식물을 들였다. 에어컨 대신 커다란 선풍기, 공기청정기 대신 향초 두 개. 살기 위한 최소한의 물건들 그리고 살아 있다는 걸 증명하는 작은 풍경들.
“내 공간이 생기니까… 이상하게 마음이 덜 외로워.”
그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지만 속으로는 약간 멍했다. 질투도 부러움도 아닌 그냥 뭔가를 놓쳐버린 느낌. ‘나는 언제쯤 진짜 내 공간을 갖게 될까.’ 그 생각이 혀끝까지 올라왔다가 아무 말 없이 목구멍 아래로 삼켜졌다.
독립은 멋진 이벤트가 아니었다.
생활비를 맞추고, 보증금을 빌리고, 전기세 고지서를 들여다보다가 다시 엎어놓는 일.
퇴근 후 불 꺼진 방에 들어와 스스로에게 ‘오늘도 잘 버텼다’고 말해주는 일. 누군가에겐 로망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의 나에겐 그냥 생존 방식처럼 느껴진다.
계단 끝에서 내리쬐는 햇빛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 모든 걸 생각한다. 현수막, 매미, 내 방, 친구의 반지하,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를 스쳐 지나가는 뜨거운 바람.
누구는 이맘때쯤 피서 계획을 세우고,
누구는 이직을 준비하고,
누구는 또 사랑에 빠지고,
나는 그저 오늘도 이 계단의 턱을 넘는다.
여름은 그렇게, 또 한 칸 올라간다.
글, 편집 | 유옥(瑜)
@0k.Y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