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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준 정을 오래 간직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보니, 정을 준다는 개념에 굉장히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7살 때부터 알고 지낸 학원 선생님과는 17년째 정을 이어오고 있다.
어제는 날이 더워져서, 몇 달 만에 아이스크림 10개를 사 들고 학원에 갔다. 내 나이보다 오래된 학원에서 일하시던 선생님은 이제 부원장이 되어 계셨고, 반가운 얼굴로 웃으며 나와주셨다.
"어떻게 지냈어?"
"아뇨, 뭐 그냥!
(저 요즘 글도 쓰고요, 공부도 하고, 장래에 관심은
있지만 확신은 없어서 그냥 인생을 골골대며 살고 있어요.) 그렇게 말을 마무리했다.
곧이어 손에 든 아이스크림 10개를 보시곤,
"이게 다 뭐야! 왜 이렇게 많이 샀어, 고마워 정말.
"아뇨, 뭐 그냥.
(날이 덥잖아요. 정을 한 번에 드리긴 어려워서 열 등분했어요.)
"맛있게 드세요."
선생님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완전히 다 얽히지 않아도 그런 나를 배웅해 주셨다. 시간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지만, 17년이라는 존재감은 무시할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며, 선생님이 했던 말을 곱씹는 습관이 어김없이 따라왔다.
"어떻게 지냈어, 고마워 정말, 다음에 또 와." 그 말들 앞에서, 아뇨 뭐 그냥 이게 과연 최선이었을까.
3초의 법칙처럼, 후후 불어 주워 먹을 수 있는 음식이면 괜찮겠지만, 말은 입에서 떨어지기도 전에 귀로 먼저 들어가 버려, 자연스레 조심스러워졌다. 거기에 더해, 군대에서 겪은 성희롱과 부조리로 말미암아 나는 말이라는 것 앞에 늘 열린 괄호 하나를 다는 버릇이 생겼고, 닫힌 괄호도 곧 뒤따랐다.
어찌나 문을 걸어 잠갔는지 괄호는 굳게 자리를 잡아버렸다. 문을 여는 일은 다음 '아뇨, 뭐 그냥' 때, 빈틈을 찾아야겠다. 4년째 동결이지만 말이다.
건물을 나서니 어느새 어둑해졌고, 장마철이라 그런지 먹먹한 구름이 위를 덮어왔다. 곧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우산이 없던 탓에 집으로 뛰어가려 발에 힘을 주었다. 파다닥 하는 아스팔트 위로 떨어지 는 물방울과의 마찰음에 괄호가 열린 느낌이 들었다. 보다는 싱겁고, 눈물보다는 시원해서였을까. 이번엔 아스팔트를 피하지 않고, 맞아보기로 했다.
집에 도착해 수많은 물방울을 옷에서 털어내고 샤워를 했다. 아직도 씻겨 내려가지 않은 것들이 많지만, 깨끗함을 보장한다는 바디 워시와 샴푸를 믿어, 박박 문지르곤, 퍽퍽하게 머금었던 말들도 얼음 동동 띄운 냉수에 삼켜 넘기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자기 전 주황색 램프 앞 달달거리던 선풍기 바람에 묻혀, 조용히 나에게 물었다
미상아, 오늘 하루 어땠어?
아니, 뭐 그냥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