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자랑할게 뭐가 있노”
설날 이른 아침 제사가 끝난 후 고모들이 모여 앉아 각자의 자식 자랑을 길게 늘어놓고 있을 때 아빠 옆구리를 쿡 찌르며 “아빠도 딸 자랑 좀 해봐~”하니 돌아온 아빠의 대답이었다. 어릴 때는 까맣고 코가 들창코라 큰일 났다고, 10대 때는 뚱뚱한 데다 게을러서 여드름이 많이 나는 거라는 소리를 내내 들었으며 스무 살 때는 얼굴이 크고 엄마 닮아(?!) 기미가(최근 치료를 시작해 알게 됐는데 기미가 아니라 피부병의 일종이라고) 빨리 올라와 얼굴을 다 버렸다는 말도 들었던 내가 스스로를 예쁘고 가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 성인애착 유형 중 미해결형(불안형)에 해당하는 것도 전혀 놀랍지 않았다.
연애 때부터 결혼 후 최근까지 시부모님을 뵐 때마다 사실 나는 매번 얕거나 깊은 소외감을 느끼는데 남편을 향한 애정과 자랑스러움, 한 번도 본 적 없는 가족의 화목함이 드러날 때면 ‘아빠도 내가 보지 않는 곳에서는 나를 자랑스러워하겠지? 아빠와 엄마가 이혼하지 않았다면 나도 남편을 맘 편히 데려가고 거실에 대자로 누워있어도 되는 친정이 있었을 텐데... 그렇다면 명절에 할머니 집과 아빠와 아줌마가 사는 집에 들르지 않아도 되겠지? 엄마와 아저씨가 있는 미국을 자주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간다고 하더라도 맘이 편하진 않아. 결국 명절에 방문하는 곳 중 내 맘 편한 곳은 어디 하나 없네...’ 하며 우울감이 바닥을 친다. 시부모님을 포함해 우리 가족 중 누구 한 사람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 속에서 부대낄 때 그들로 인해서 가라앉거나 화가 나는 건 여전하다.
“우리가 헤어지는 건 네 탓이 아니며 여전히 널 사랑한단다.”
‘아빠가 단 한 번이라도 이렇게 말해줬다면 지금과는 달랐을까?’라는 의미 없는 질문을 오래 한 사람으로서 결과에 상관없이 자식 있는 부모들은 이혼한 후 이런 식의 말을 자주 하고 반드시 행동으로 표현해줘야 한다고 본다. 아이들이 어리다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비슷한 말조차 듣거나 느껴본 적 없는 청소년기를 보내고 찢어진 가정 속에서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던 사람은 결혼을 하고 난 뒤에도 새로운 가족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버겁다. 요즘엔 EMDR의 안전지대 훈련을 자주 하고 세심하게 나를 챙겨주는 남편 덕에 많이 나아지고 있지만 친정 시댁 상관없이 가족행사나 명절 동안의 불면증이 심해지는 건 변함없다. 그럼에도 내가 괜찮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남편과 이혼할 일은 절대 없을 거라는 확신 덕분이다.
어떤 의미에서, 당신이 지금의 당신으로 되는 과정은 이미 있었던 가능성들을 쳐내는 과정이다.
당신이 지금의 당신으로 된 것은 당신의 뇌 속에서 무언가 성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무언가가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이글먼 <더 브레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