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현실 사이, 그 경계에서」
오늘 나는 오랜만에 꿈을 꿨다.
평소의 나는 꿈을 꾸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는 기억하지 못한다. 잠든 순간과 깨어나는 순간 사이의 그 긴 어둠 속에서 나는 아무것도 건져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소녀가 있었다. 하얀 머리, 하얀 옷, 그리고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슬픈 미소. 천사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천사치고는 너무 쓸쓸해 보였다. 소녀는 내 손을 잡았고, 나는 그 차가운 손길에 이끌려 따라갔다. 아니, 따라가고 싶었다. 그 얼굴이 마음에 걸려서, 계속 눈에 밟혀서.
소녀는 나를 이곳저곳으로 데려갔다. 어디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장소가 아니었으니까. 중요한 건 그 순간의 느낌이었다. 소녀와 함께 있을 때,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저 그 가녀린 뒷모습만 바라보면, 내 안의 무언가가 충족되었다. 검은색이 전혀 없는, 오직 하얀색만 존재하는 그런 세계.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소녀의 마음처럼, 암흑색이 없는 삶.
꿈에서 깨어난 후, 나는 평소와 다른 아침을 맞았다. 가슴속에 남아있는 그 하얀 잔상이 하루를 다르게 만들어주었다.
엄마와 타임스퀘어에 갔다.
여전히 바깥은 무섭다. 사람들의 시선이 날카로운 칼처럼 느껴지는 날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꿈속 소녀가 가르쳐준 것처럼, 나도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기로 했다. 사람들의 얼굴을 직접 보지 않고, 그들의 배나 어깨, 혹은 발끝을 보며 걸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하니 숨이 덜 막혔다.
카페에 들어가 아인슈페너를 주문했다. 커피를 잘 마시지 않는 나지만, 저번에 우연히 맛본 그 달콤 쓴 맛을 잊을 수 없었다. 오늘의 아인슈페너는 조금 더 썼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쓴맛도 나의 일부니까. 앞으로는 이게 내 고정 음료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작게 웃었다.
팩토리에서 발견한 하얀 점프슈트. 입어보는 순간, 꿈속 소녀가 떠올랐다. 하얀색. 그 순수하고도 텅 빈 색. 나는 거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이것을 입으면 나도 조금은 달라질 수 있을까? 수없이 고민한 끝에 결국 사기로 했다. 지금 생각해도 잘한 선택이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니, 나는 조금씩 요령을 찾아가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는 법. 나만의 안전지대를 만드는 법. 두려움과 함께 살아가는 법.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숙제이자, 앞으로도 계속 깨달아가야 할 것들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오늘처럼 작은 진전만 있어도 충분하다.
꿈속 소녀의 슬픈 미소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왜 슬펐을까. 왜 그렇게 쓸쓸해 보였을까.
어쩌면 그 소녀는 나의 또 다른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순수하고 싶지만 상처받기 쉬운, 하얗지만 그래서 더 쉽게 더러워질 수 있는 그런 마음.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오늘의 나는 그 소녀의 손을 잡고 걸었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니까.
오늘의 이 마음을 잊고 싶지 않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발견한 이 작은 용기를.
그래, 나는 천천히 나아가고 있다. 하얀 소녀의 손을 잡고, 한 걸음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