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에 한무숙 선생님의 소설을 읽고 새롭게 다짐한다.
아무튼 이상한 고집이라고 생각하는데, 2000년대의 소설에는 좀체 손이 가질 않는다. 동시대의 배경이 손에 잡히는 글을 읽으면 반갑고 또 가깝게 느껴져야 하는 것이 정상일 텐데 말이다.
어떤 현대 소설 작가가 나와 같은 공기를 마시며 일산의 세련된 카페의 테라스 석에 자리 잡고 앉아 브런치를 주문하고는 그것을 아이폰의 정방형 카메라 테두리 안에 예쁘게 담으려 애쓰는 모습을 상상하거나 송도 현대프리미엄아울렛에서 '산드로'나 '마쥬'의 싱글 코트나 양가죽 재킷을 두어 벌 구매해서 흐뭇한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하면 소설가에 대해 남몰래 품어오던 환상이 깨지곤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대단히 이중적인 사람이라서 뮤지션이나 음반에 대해서는 또 생각이 다르다. 고전 힙합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나이지만, 최신 힙합에는 더욱 환장하고 보는 식이다. 불과 어제만 해도 내가 가장 아끼는 래퍼 'Swae Lee스웨 리'가 사운드클라우드에 신곡을 하나 발표했는데(노래 제목은 Back 2 Back Maybach이다), 곡을 발표했다는 그의 인스타그램 포스팅에 얼마나 가슴이 떨리던지 하마터면 스마트폰을 아스팔트 바닥으로 떨어뜨릴 뻔했다.
소설가와 가수를 바라보는 이토록 이중적인 시선이 언제 어떻게 형성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관련하여 또렷이 기억나는 경험이 하나 있긴 하다.
대학교 1학년을 무사히 넘기고 찾아온 겨울 방학을 나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의 샬럿이라는 조용한 도시의 한적한 동네에서 보냈는데, 저녁이 되면 도무지 할 게 없어서 사촌 동생의 책장에 빡빡하게 꽂혀있는 대한민국 현대 소설 모음집을 읽곤 했다. 현진건, 염상섭, 하근찬, 이상 등 슈퍼 스타 선생님들의 작품들이 마치 접착제로 딱 붙인 듯 서로를 꽉 껴안고 있었는데, 그것들을 서로 떼어내기 위해 애썼던 쓸데없이 세세한 기억도 난다. '쫙' 소리가 나며 분리되는 두 책, 어떤 느낌의 책인지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처음에는 오로지 시간을 죽이기 위해 시작했던 독서였는데, 며칠이 지나서는 해가 지고 할 일이 더럽게 없는 저녁 시간의 그 고요함이 은근히 기다려질 정도로 마음 상태가 바뀌었다. 아직 초등학교에 다니던 두 사촌 동생들은 책상에 조용히 앉아 그날의 과제를 하거나 아이패드로 앵그리버드 게임을 했고 나는 침대에 엎드려 누워 스탠드 불빛에 의지해 한 장 한 장 소설을 읽어 내려가며 감탄했다. 난생처음 보는 한국말이 가득해 놀라기도 했고, 오늘날과 같은 생각을 그때도 똑같이 했구나, 라며 아이처럼 신기해하기도 했다. 은근하게 세련된 문장의 맛과 흥미로운 전개는 말하나 마나.
시간이 허락하면 다시 한번 그때 그 작품들을 찬찬히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방학을 맞이한 대학교 1학년생의 그 무한한 자유 시간이 당분간 다시 찾아올 리 만무하겠지만.
어제는 한무숙 선생님의 <정의사>(1948)와 <얼굴>(1954)이라는 두 단편을 우연히 읽고 많은 생각을 하였다. 둘 중에서도 특히 내 마음을 크게 울린 건 <얼굴>(1954)이라는 소설이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명희'이다. 명희를 제외한 남매 넷은 미인 어머니를 닮아 모두 고운 얼굴인데, 명희는 투박한 아버지를 닮아 홀로 못생긴 얼굴을 가졌다. 명희가 열두 살 되던 해, 명희의 아랫 동생, 인형처럼 곱던 '여희'가 급성 폐렴으로 죽게 되는데 이때 명희의 어머니를 위로하러 온 어머니의 사촌 형님을 향해 어머니가 말한다.
"글쎄 없어도 좋은 못생긴 것은 저렇게 피둥피둥 살아 있고, 하필 그 귀여운 것이, 아이 언니, 참 너무해요."
'없어도 좋은 못생긴 것'이라는 낙인은 이후 '명희'에게 열등감이 된다. 또 존재를 짓누른다. '명희'는 아버지를 닮아 공부도 잘했으나 그 '우수한 성적'이란 것도 그녀를 위로하진 못한다.
아름다운 미모를 믿고 까부는 오만한 친구 '정순'을 볼 때마다 '명희'는 아픔에 가까운 동경을 느낀다. '명희'는 '정순'을 위해 무엇이든 한다. 아무리 피곤해도 숙제를 도와주고 그녀의 부탁을 처리하느라 잠이 부족하고 몸이 괴로워도 그 희생과 소모는 그녀의 외로움을 덜어주는 보람이 된다. '정순'은 '명희'가 자기 앞에서 우월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정순'은 친구들과 함께 간 일요일 교외 소풍의 현장에서 '명희'에게 악의적인 장난을 하고 빈정댄다. 하지만 '명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눈치와 인내뿐이다.
소풍을 마치고 시내로 돌아가는 길, 교통사고로 좁은 고갯길이 혼잡하다. 길이 트이기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소녀들, 소녀들 앞에 호화로운 승용차가 한 대 머물러 있다. 수습할 수 없는 기업체를 간신히 지탱하며 시름에 싸인 한 신사, 급한 일로 교외에 사는 사람을 찾았던 길이 막혀 초조한 신사는 담배를 붙였다가 끈다. 곧이어 신사의 눈에 든 '명희'의 못생긴 얼굴, 그 얼굴에 깃든 '엄숙한 희생'과 '참을성'과 '괴로움'의 모습이 의욕과 허영에 헤매는 신사의 초조한 마음을 친다. 이내 막혔던 길의 흐름이 뚫리고 신사가 탄 차도 움직인다. 신사는 계시라도 받은 사람처럼 가슴이 거뜬해진다. 양심에만 거리끼지 않는다면 이젠 파산도 무섭지 않다. 전부 '명희' 덕이다.
소설은 말한다. 얼결에 무심코 내뱉는 가장 가까운 가족의 작은 말 한마디는 한 사람의 인생을 반쯤 죽이고도 남는다는 것을. 또 인내와 희생, 고통으로 쌓아 올린 인간 정신의 엄숙함은 외면을 뚫고 나와 인생의 벼랑 끝으로 몰린 한 인간의 고통을 보듬어줄 수도 있다는 것을.
어머니의 '말'로 인해 입은 마음의 상처로 방황하고 인내하던 소녀의 '못생긴' 얼굴에 깃든 '정신'은 어쩌자고 이름 모를 신사의 고민과 상처를 가려준다. 스스로 거울을 보는 것도 싫어하는 '명희'는 자신의 그 못생긴 얼굴이 누군가의 인생의 고통을 덜어주었다는 사실을 알기나 할까.
한무숙 선생님은 다만 못생겨도 다 괜찮다, 라는 하나 마나 한 위로를 던지려고 이 소설을 쓴 건 아니었을 것이다.
공생 관계
인간이란 쉽게 상처 입고 괴로워하는 연약한 존재이지만 결국 이 사회는 '공생 관계'로 돌아간다는 것, 다시 말해 한 인간은 그 존재 자체로 반드시 '필요한'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 말이다. 아주 하찮다고 생각해 온 자기 존재가 사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구원의 빛을 자꾸만 발산해오고 있었다는 것! 한무숙 선생님은 이런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으셨던 게 아니었을까.
한무숙 선생님의 은혜로 나는 내가 제일 못하는 세 가지를 2020년 2월에 다시 한번 되새겨보는 기회로 삼는다.
1. 입 조심
2. 평가 조심
3. 자기 비하 조심
[프런트 이미지 출처: 한무숙문학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