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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눕피 Jan 13. 2021

부드럽게 연결되는 노래와 문장처럼

오랜만에 돌아온 스눕피의 단상



트랙과 트랙 사이에 짜임새가 있어 부자연스러움 없이 흘러가는 앨범은 사람의 기분을 째지게 한다. 부드럽게 짝을 맞춰나가며 제 모습을 갖춰가는 레고 조립이나 퍼즐 게임이 주는 상쾌한 감각을 연상케 한달까. 그렇기에 미국의 전설적인 프로듀서 겸 래퍼 DR.DRE 닥터 드레의 정규 데뷔 앨범 <THE CHRONIC>(1992)의 4번 트랙 ‘The Day The Niggaz Took Over’가 끝나고 5번 트랙 ‘Nuthin’ But A “G” Thang’으로 연결될 때의 그 짜릿한 감각은 내겐 영적이다.



영적인 앨범, 이것은 종교다.



지난해 10월부터 오늘까지 미국의 힙합 프로듀서 Metro Boomin 메트로 부민과 래퍼 21 savage 투애니원 새비지가 함께한 앨범 <SAVAGE MODE ll>(2020)를 적어도 이삼일에 한 번 꼴로 완주하고 있다. 하나의 트랙이 숨 가쁜 달리기를 마치고 다음 트랙에게 바통을 넘겨주는 순간이 다가오면 딴짓하던 정신도 제자리로 돌아오는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 기분이 글로 쓴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라서 답답할 뿐이다. 인트로와 인터루드에 등장하는 원로 배우 모건 프리먼의 미소가 절로 나오는 사뭇 진지한 중저음 내레이션은 앨범의 무게감을 다져주면서 트랙과 트랙을 사이좋게 연결하는데, 이것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앨범의 즐거움이다.




2020년, 새로운 종교가 탄생했다.




트랙과 트랙 사이뿐 아니라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도 그러한 상쾌한 감각과 만날 수 있다. 어떤 조사를 쓸까, 고민하며 문장 하나를 가지고 며칠을 고민하며 담배만 태웠다던 작가 김훈의 소설 <내 젊은 날의 숲>의 시작 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오는데, 이것은 대학 시절의 내게 ‘매력적인 한글 글쓰기’의 기준을 확립해주었다.



아버지는 작년 9월에 이감되었다.

(중략)

교도소 개소식 때 법무차관이 왔었다.

교도소 운동장에 ‘날마다 새롭다. 새 삶으로 새 출발!’이라는 현수막을 걸어놓고 법무차관이 모범수들 앞에서 테이프를 끊었다. 법무 차관은 단상에 올라가서 모범수들을 향해,

ㅡ여러분, 반성 잘하고 있습니까?
라고 물었고, 모범수들은
ㅡ네, 반성 잘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인데, 아버지는 그즈음에 이감된 모양이었다.

김훈 <내 젊은 날의 숲> 중에서



'네, 반성 잘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인데, 아버지는 그즈음에 이감된 모양이었다.'



나는 이 문장을 수십, 수백 번 읽고 또 읽으며 감탄하였다. 방금 또 감탄하였다. 캬! 아버지의 이감 시기를 이토록 신선하게 표현할 수 있다니! 문장과 문장을 이토록 매력적으로 연결할 수 있다니!





이 소설의 모든 문장은 신적이다.




연결성 없이 툭툭 끊기는 노래나 문장은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조금도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건 역시 ‘다음’을 염두에 두지 않은 불친절함 때문일 것이다. 어휴, 불편해!



누군가 애써 예쁘게 만들어놓은 눈사람을 깨부수는 정신 나간 인간들 뉴스를 보며 어제오늘 화가 많이 났다. 심지어 어떤 인간은 부러 차에서 내리는 수고를 무릅쓰면서까지 예쁜 눈사람을 박살 내던데, 그 인간은 예쁜 눈사람과 마주하게 될 다음 사람과 그다음 사람, 또 그다음 사람의 소소한 연쇄 행복을 무시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다. 인생은 결코 제 뜻대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미국 시트콤 <The Office>는 인생사 바이블과도 같다.



'다음'을 염두에 두고 착실히 준비하고 실행하기 딱 좋은 새해의 1월인데, 여러분의 만사가 부드럽고 상쾌하게 연결되길 희망해봅니다. 선생님들, 새해엔 자주 더 많이 행복하세요!




* 프런트 이미지 출처: Compl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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