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있는 탄생과 이유 없는 향유
어차피 할 일도 더럽게 없어서 계속 뭔가를 찾으며 산다. 지난 몇 년을 돌아보면 어딜 싸돌아 다니면서 사람을 만나고 생기 있게 놀거나 힙하고 용하다는 곳에 들러 간지나게 생활한 기억보다는 종일 어딘가의 구석탱이에 틀어박혀 곧장 구글에 접속해 좋아하는 브랜드나 아티스트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역사적 레퍼런스나 뒤적이며 혼자 감탄하던 기억밖에 없다.
정 심심하면 주말에 인천에 내려가 친구를 만나거나 집에서 가까운 건대, 성수, 서울숲을 정처 없이 걸어 다닌다. 혼자 다닐 땐 딱히 멋도 안 부리는데 성수나 서울숲까지 운동 삼아 걸어가다가 콧물을 질질 흘리며 주변을 둘러보면 나 빼고 다 멋있고 예뻐서 괜히 위축이 든다. 아, 썅, 그냥 집에 갈까?
그래도 브랜드 선택에는 상당히 예민한 사람이라서 집 앞에서 장을 볼 때에도 대충 브랜드 깔은 맞춰 입고 나가지만(눈치 과잉+자의식 과잉), 일터에 나갈 때나 운동할 때나 쇼핑할 때나 '트레이닝팬츠'를 인생사 디폴트의 개념으로 잠금 설정하고 다녀서 그런지 나를 아는 사람이 우연히 저 멀리서 걷기 운동하고 있는 나를 목격한다면 저 인간 참 볼품없이 마르고 영 없어 보인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매우 자연스러우며 합당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부모님께서는 가끔씩 내게 "좀 갖춰 입고 다녀야 하지 않겠니?"라고 넌지시 우려 섞인 조언의 말씀을 건네시는데, 그 추레한 아들내미가 지금 간신히 스트링으로 조여 입고 있는 그 방댕이가 푹 꺼진 추리닝 한 벌에 얼마를 태웠는지를 두 분께서 아시게 된다면 뒷목을 바싹 잡으실 것이다. 제정신이니?
그건 그렇고 어제는 퇴근하고 잠들기 전까지 80년대와 90년대를 주름잡은 'Rave' 문화 그리고 그것의 패션에 대해 검색하며 놀았다. 블로그에서는 패션 브랜드 '마틴 로즈'를 소개하다가 관련 썰을 풀기도 했고, 90년대 패션을 이야기하면서 몇 번 떠든 기억이 있다.
그럼에도 짧게 썰을 또 풀자면 레이브는 80년대 후반부터 영국에서 성행한 일종의 클럽 문화인데,
적을 두지 못하고 잘 섞이지 못하던 이민자들 그리고 건수를 찾아 헤매던 불타는 청춘들이 주로 버려진 웨어하우스나 가라지, 어디엔가 꼭 널린 넓은 들판에 모여(프로모터에 의해 비밀리에 설정된 파티 장소는 입소문을 통해 빠르게 전파되었다) 일렉트로닉 뮤직을 틀어놓고 열몇 시간을 잠도 안 자고 춤을 추던 문화였다.
착하게 춤만 추었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인데, 그곳에는 늘 엑스터시와 같은 마약이 널려있었다. 그래서 시끄러운 음악과 취해 망가지는 약의 혼합 그리고 이어지는 섹스와 잦은 범죄는 커다란 사회 문제로까지 번졌다.
하지만 향락주의의 끝을 달리며 국경까지 넘어 번진 레이브 속 패션은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소위 엣지 있는 패션 레이블이 참고하는 귀한 레퍼런스가 되어준다.
그들의 패션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생활 밀착형 패션?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에 지나치게 솔직한 패션?
80년대와 90년대의 레이브 스타일을 가장 맛깔나게 잘 살려내는 브랜드 '마틴 로즈'의 패션 스타일로 예를 들면 너무 좋겠다.
마틴 로즈의 시그니처 아이템으로 손꼽히는 '바이크 쇼츠'와 '사이클링 져지'는 당시 레이브 파티 속 여성들이 즐겨 입던 옷이다. 편안한 착용감과 자유로운 움직임, 통풍과 건조성까지 뛰어난 사이클링웨어는 땀에 흠뻑 젖어 몇 시간이고 계속 춤을 추던 그녀들에게 아주 제격이었다. 아이조아~
마틴 로즈 특유의 유치 찬란한 카툰 프린팅과 네온 컬러감, 사이키델릭 간지의 타이 다이 염색 스타일도 당시 레이브 패션 스타일을 대표하는 시그니처였다.
청소년의 일탈을 닮은 유치한 놀이 문화를 있는 그대로 대변할 수 있으면서도 곧 죽어도 튀어야 하는 파티의 조명 아래에서 그들을 돋보이게 해주는 스타일로서 그보다 좋은 패션 무기는 없었을 것이다.
레이버 남성들은 화려하게 춤 추기 좋고 편한 통 넓은 배기팬츠 위에 말도 안 되는 옷(이민자들의 혼이 담긴 지역 스타일부터 스리프트 샵에서 주워 입고 형 누나로부터 훔쳐 입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이라면 무엇이든 믹스매치했다. 패션은 결국 재미이니까.
특정 패션 스타일의 원천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일에는 사실 끝이 없다. 고대나 중세까지만 안 가도 천만다행일 것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내 삶에 적당히 와닿는 수준의 시기를 대략적으로 설정하고 파고드는 일은 그 자체로 너무 재밌어서 가끔 까무러칠 것 같을 때가 있다. 그리고 관련 하이퍼링크에는 끝이 없어서 지칠 정도다.
레이브 패션 스타일을 공부하다가 메가 히트송 '라스트 크리스마스'로 유명한 '왬'의 '조지 마이클'의 옛 패션 스타일까지 뒤적이고 있는 내 인생이란 정말 레전드가 아닌가?
아무튼 시대를 대표하는 패션 스타일에 '이유 없는 탄생'이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요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무엇이든 이미지적으로 소비하거나 당장 보여주기 식으로 떠벌리기에 급급해서 '패션'을 이해하고 입으려는 노력보다는 동시대 유행 만족적인(특정 브랜드를 지나치게 숭상하거나 유행 패션 클랜의 일원이 된다는 것에 굉장히 뿌듯해하는) '쇼핑' 행위에 골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을 말하자면) 앞선 이야기는 내 억지스럽고 과장된 생각이었고, 사실 보기 좋고 예쁜 옷을 자기 개성에 맞게 잘 찾아 입으면 그만인 것이다! 패션은 자기 만족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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