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백 년 패션 장인 '장 폴 고티에' 옹 가라사대
독일의 명문 발레 스쿨에서 공부하고 전문 클래식 댄서로 활약하다가 패션 디자이너로 전직한 이색 경력을 보유한 '빅터 웨인산토 Victor Weinsanto'에 관해 알아보다가 그가 인턴십을 진행했던 '장 폴 고티에'에서의 경험을 하도 극찬하길래, 제길슨! 건드리지 말아야 할 인물을 슬쩍 건드리고야 말았다.
장 폴 고티에 翁
프로 디거(Pro Digger)라면 공감할 것이다.
끝을 볼 수 없으면 애초에 건드리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는 사실 말이다.
대강 알고 있는 것이 때로는 정신 건강에 더 좋을 때가 있다. 아예 모르고 사는 게 낫지, 대충 알면 간지럽고 안타깝고 아쉽고 막 그런다.
어느 분야에나 몇 개월, 아니, 몇 년을 잡고 꾸준히 파 들어갈 때, 그제야 손톱만큼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막대하고 위대한 것들이 있는 법이다.
예전에 인기를 끈 대한항공 광고의 카피를 잠깐 빌려오자면, (그래서 넌) 어디까지 가봤니?
어쨌든 훌륭한 감독은
가장 엄숙한 기회를
찾아낼 수 있어.
아이들에게
뭔가를 이루어내고자 하는
의지를 주는 거야.
- 존 업다이크 <달려라 토끼> 중
남자로 태어났지만 남자의 세상에 좀체 어울리지 못했던 소년 '장 폴 고티에',
축구보다는 인형이 더 좋고, 창을 열고 바깥 풍경을 감상하며 조용히 공상하기를 즐겼던 그는 자크 베케르 감독의 영화 <파리의 장식 Falbalas(Paris Frills)>(1945)을 우연히 보고 패션 디자이너가 되길 꿈꾼다.
그의 말에 따르면 영화를 깊이 감상한 후 무려 천직, 소명을 찾은 기분이 들었다고.
세상 모든 쿠튀리에들에게 자신의 스케치를 보낸 십 대의 장 폴 고티에, 열여덟 살의 그를 받아들여준 오직 한 사람은 이탈리아의 패션 디자이너 '피에르 가르뎅'이었다.
장 폴 고티에는 그가 크리에이티브와 재무적 감각 모두에 능한 사람이었다고 말하면서 무엇보다 본인에게 하고 싶은 디자인을 추구할 수 있는 '예술적 자유'를 선물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런데 재밌는 건 이후 그를 스쳐 간 많은 어시스턴트들이 그와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는 것이다. 상업성이나 한계를 생각하지 말고 자유롭게 생각하며 디자인하라는 고티에의 가르침 말이다.
보고 배운 건 또 보고 배우도록 자동 설계된 인생의 법칙이란 게 있는 건가?
벼룩시장이 자신에게 생애 첫 패션 스쿨이었다고 말하는 장 폴 고티에는 전쟁통에 아버지의 오래된 바지로 스커트를 만들어 입던 어머니의 작업으로부터 그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관련하여 그는 돈이 없지만 옷을 잘 입고 싶은 이들을 위한 조언으로 "적게 사되, 좋은 걸 사세요"라거나 "이미 가지고 있는 옷을 변주하세요."라며 명쾌하게 답했다.
보고 배운 걸 또다시 보고 배우게 하는 사람, 장 폴 고티에.
장 폴 고티에 曰
"저희는 벼룩시장을 샅샅이 뒤지던 세대죠. 그곳에서 네이비 스트라이프 셔츠를 발견해 입기 시작했는데 그게 제 코드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 하퍼스 바자 코리아 <중고 명품 전성시대> 中
지난 2020년, 무려 50년의 패션 커리어에 마지막 정점을 찍고 내려온 그는 평소 관심을 두고 지켜보던, 자신의 바통을 넘겨받을 후배 게스트 디자이너를 매 시즌 선정해 브랜드 운영을 이어가고 있다.
지금까지 사카이의 아베 치토세, 와이 프로젝트의 글렌 마틴스, 하이더 아커만, 시몬 로샤 등이 참여했다.
그는 무려 50년이라는 패션 경력을 지닌 바, 컬렉션 진행 작업의 많은 부분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후배들에게 쉽게 훈수를 둘 수 있기에, 그것을 경계하며 자기 브랜드의 역사와 자산을 그들에게 모두 오픈해 최대한의 작업적 자유를 선물한다고 말했다.
후배를 진심으로 존중하는 마음이 참으로 낭낭한 것 같은 장 폴 고티에,
2004년에 그는 에르메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직을 수락한 이유를 들며 그것은 곧 자신의 제자였던 '마틴 마르지엘라'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이유인즉슨 에르메스라는 전통 브랜드의 오랜 역사 코드를 잃지 않으면서 완전히 새로운 모던 럭셔리 감성을 수혈한 제자의 작업물에 강한 인상을 받았고, 처음 몇 번은 디렉터 직 제안을 고사했으나, 후배도 멋지게 해냈는데 나도 나만의 방식으로 잘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스쳤다고 밝혔다.
치마를 입는다는 것이
남성적이지 않다는 걸
의미하진 않아요.
남성성은 옷으로부터
나오는 게 아닙니다.
당신 안의
그 무언가로부터
나오는 거죠.
- 1984년의 장 폴 고티에
<비웃음으로부터 안전한 유일한 공간은 평범함 뿐>이라는 그의 뮤즈 '디타 본 티즈'의 멘트를 철학으로 삼고, 결코 (조금도) 평범하지 않은 디자인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 장 폴 고티에 - 남성 스커트 패션의 원조, 마돈나의 콘 브라 코르셋의 제작자, 그는 보고 듣고 배운 걸 누군가가 또 보고 듣고 배우도록 앞서 실천한 사람이었다.
1987년, 파리에서 열린 마돈나의 콘서트에 참석한 장 폴 고티에, 그녀를 처음 본 그는 그녀의 에너지에 압도된다. 하지만 무대 의상만은 탐탁지 않게 여긴다. 그리고 스스로 이렇게 되뇌었단다.
'내게 코스튬을 부탁했어야지! 내가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정확히 2년 후에 마돈나로부터 직접 연락을 받은 장 폴 고티에는 결국 그녀의 세 번째 콘서트 투어였던 <Blond Ambition Tour 블론드 엠비션 투어>의 코스튬을 담당하게 된다.
그리고 세상에 공개된 전설적인 콘 브라 코르셋은 젠더의 경계를 무르고 놀라움을 선사한 세상 상징적인 패션 아이템이 되었다.
그런데 사실 장 폴 고티에가 디자인한 마돈나의 콘 브라 코르셋은 남달랐던 어린 시절, 인형을 사달라고 조르던 소년 고티에를 걱정하던 그의 부모님이 대안으로 선물했던 '나나'라는 이름의 곰 인형에게 그가 직접 만들어 준 의상이었다.
세계 최고 팝스타의 코스튬을 담당하며 직업인으로서의 꿈은 물론 어린 시절의 꿈을 덧입혀 두 가지를 모두 동시에 이룬 사람, 장 폴 고티에.
2013년에 그는 자신의 40년 패션 아카이브 전시에 대한 소감을 밝히며 자신은 스스로 제작한 모든 컬렉션 아이템을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으며, 그것들이 모두 자식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단순한 옷 그 이상의 생각과 테마의 집적으로 작품을 이해하는 자신에게는 옛 작품이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 매우 기쁘다고 말했다.
자신이 보고 듣고 배워 만든 제작물로부터 다시 또 스스로 보고 듣고 배우는, 희망적인 자기 복제로 시대를 앞서 사는 사람, 장 폴 고티에.
요즘 옛날 무한도전을 하나하나 다시 골라 보며 미친 사람처럼 웃곤 하는데, 문득 없없무(없는 게 없는 무도)가 왜 가능할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관련 생각 전개를 말하자면 좀 긴 데다가 하찮기도 해서 결론부터 그냥 말하자면,
사실은 매일의 자질구레함 속에 세상의 모든 세련되고도 핵심적인 정답이 들어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는 것.
구차하게 또 연결해 글을 마무리짓자면 (어디 감히 내가) 장 폴 고티에 옹의 데일리 작업이 자질구레했다는 게 아니라 TV 보고 영화 보는 게 제일 좋다는 그의 시시콜콜한 일상의 충전이 있었기에 그 모든 위대한 작업도 가능했을 거라는 거다.
일주일 내내 옛날 무도만 봐도 배울 것이 낭낭하더라!
마지막으로! 개인적으로 참 인상 깊었던, 환갑을 맞이한 지난 2012년의 장 폴 고티에 옹께서 밝힌 생일 계획을 소개하며 이만 물러나보겠다.
침대에 누워있을 거예요.
울면서ㅜㅜ
- 2012년의 장 폴 환갑 고티에
<글을 끝내며>
하루에 적어도 하나씩, 패션 브랜드와 디자이너를 랜덤으로 골라 되는대로 파봅니다.
오늘 아쉬우면 내일 혹은 주말에 더 파보는 식으로 나름의 당연한 대안도 마련했어요.
그래서 이번 주 초에는 '빅토 웨인산토'의 지난 컬렉션과 인터뷰를 멍하니 감상했네요.
근데 이 삽질의 효용이 나름 있습니다.
사실 꽤 분명하고도 이롭죠.
일단 따로 영어 공부를 안 해도 돼서 좋고, 취향 연마에 도움이 많이 되며, 무엇보다 관심 분야를 보다 깊이 있게 즐기기 위한 토대를 매일 한 층씩 쌓아 나가는 기분이라서 내일을 기대하게 만듭니다.
더구나 삽질과 함께 최종적으로 필터링된 이야기가 블로그의 소재가 되어서 여러분과 다시 만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니까 딱히 거를 일이 없어요.
오늘은 아주 끝날 때까지 말이 많았군요.
한 해 마무리 잘하시구요.
건강하세요.
항상 감사합니다.
- 스눕피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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