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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Oct 31. 2021

수많은 '미완' 사이 사랑이라는 단 하나의 '완성'

#2. 두 번째 책) 무라카미 하루키, <1Q84>



읽기 전에는 정말 긴 책이지만, 읽고 나면 짧은 책이 되어 있습니다.

채워지지 않는 공백과 해명되지 않는 미스터리, ‘대체 이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생각하게 만듭니다.

도대체가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가운데, 그러나 그럼에도 사랑은 있다며,

끝까지 믿음을 놓지 않는 분들께 추천 드립니다.

두 번째 책,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일본, 2009.






여기는 구경거리의 세계
It's a barnum and bailey world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꾸며낸 것
Just as phony as it can be

하지만 네가 나를 믿어 준다면
But it wouldn't be make-believe

모두 다 진짜가 될 거야
If you believed in me

ㅡ ♬ <It's only a paper moon> 中



이 방대한 소설의 소설의 시작은 평범하기만 합니다. 초라할 정도로 심심하고 뻔뻔스러울 정도로 무난합니다. 주인공 '아오마메'는 꽉 막힌 도로 안에서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를 듣고 있습니다…….






달이 두 개인 세계, 공기 번데기, 마더와 도터가 있는 세계, 리틀 피플, '선구'와 리더, 리시버와 퍼시버의 세계.

이 미스터리들은 개인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하고 압도적입니다. 인물들은 전체적인 상황을 알 수 없고, 부분적으로만 이해할 뿐입니다. 그래서 혼란에 빠지고 두려워합니다. 문제는, 독자들 역시 소설 속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전체 상황의 갈피를 잡기 힘들며 부분적인 이해만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하루키는 어마어마한 미스터리를 덫처럼 풀어 놓았고, 그에 대해 국지적인 답만을 내놓고 있습니다. 미스터리의 조각 조각은 서로 연결되는 듯 보이나 한 걸음만 떨어져서 전체를 바라보면 그림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일부만 놓고 보면 논리적이지만 전체를 바라보면 그 논리는 무너집니다. 부분적으로는 질서가 있는 듯 하지만 그 역시 '국지적인 질서', 하루키가 그려낸 세계 전체를 조망하는 순간 우리는 무질서와 비논리, 부조리를 마주하게 됩니다.


너무도 많은 의문, 너무도 적은 대답, 언제나 그렇다.
-BOOK2, 458p中


혹자들은 이 점에 대해, 하루키가 자신이 만들어낸 미스터리에 스스로 빠져버린 게 아닌지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루키 본인도 감당할 수 없는 미스터리들을 산더미처럼 쌓아놓다가 결국엔 거기에 파묻혀 주체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버린 셈이라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처치곤란의 미스터리를 어쩔 수 없이 버려둔 것이 아니라, 일부러 남겨둔 것만 같습니다. 하루키가 의도적으로 미스터리의 해답을 폐기하고 영원한 물음표를 남겼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것인데, 이 생각의 근거를 소설의 맨 마지막 문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그곳에 나란히 서서, 서로 하나로 맺어지면서, 빌딩 바로 위에 뜬 달을 말 없이 바라본다. 그것이 이제 막 떠오른 태양빛을 받아, 밤의 깊은 광휘를 급속히 잃고, 하늘에 걸린 한낱 회색 오려낸 종이로 변할 때까지.
-BOOK3, 741p中


마지막 문장은 달의 몰락을 말하고 있습니다. 달의 패배, 혹은 달의 배제 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인물들을 혼란에 빠트리고 이 세계에 대한 수많은 의문을 낳았던 '두 개의 달'. 1권에서부터 3권에 이르기까지, '두 개의 달'의 존재는 작품 전체를 지탱하며 이야기를 이끌어왔습니다.


"이 세계의 시스템이 어딘가에서 헝클어지기 시작하고 있다."
-BOOK1, 192p中
"세계는 묽은 죽처럼 흐물거리고, 골격을 갖추지 못해 어디도 붙잡을 데가 없다."
-BOOK1,32p中
"이곳에 있는 세계의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픽션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BOOK2, 590p中


두 개의 달은 세계를 헝클어뜨리며, 하루키의 말을 빌리자면 일종의 '뒤틀림'을 만들어내면서, 작품 속 인물들뿐만 아니라 우리 독자들까지도 난해한 불가사의 속으로 빠뜨립니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에서, 화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달'='하늘에 걸린 한낱 회색 오려낸 종이'에 불과하다고.


가장 중요한 포인트처럼 다루어졌던 달이, 이 한 문장으로 순식간에 주제에서 배제됩니다. 달이 '이제 막 떠오른 태양빛을 받아', '밤의 깊은 광휘를 잃어버리며', 한낱 종이 쪼가리로 변하는 순간을 묘사하면서 이 방대한 소설은 (어찌보면 허무하게) 끝이 납니다. 이건 마치 하루키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달이 한 개든 두 개든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이야기의 포인트는 달에 있는 게 아니다', '달은 그저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다'…….


이제 와서 사실 달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아마 우리는 작품 속에 인용된 노래, <It's only a paper moon>을 다시 떠올려야 할 겁니다.



네 사랑이 없다면,
Without your love,

이건 그저 싸구려 연극에 지나지 않을 거야
it's a honky-tonk parade

ㅡ ♬ <It's only a paper moon> 中



<It's only a paper moon>이라는 노래의 가사와 제목, 그리고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연관지어 생각하면 이렇게 해석해볼 수 있겠습니다 :

네 사랑이 없다면, 이건 그저 싸구려 연극에 지나지 않는다, 구경거리, 처음부터 끝까지 꾸며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네 믿음이 없다면, 네 사랑이 없다면, 달도 그저 종이 쪼가리(paper moon)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소설의 처음과 끝에서 정확히 맞물리는 지점을 찾아낸다면, 이 거대한 미스터리는 한 마디 말로 일축됩니다. '사실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다' 라는 말로 말입니다.


따라서 미스터리의 해결이란, 하루키 입장에서 불필요한 것이자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알 수 없는 세계 1Q84년이든, 원래 세계 1984년이든, 어차피 세상은 다소간에 무질서하고 비논리적이기 때문에 정말로 중요한 건, 알 수 없는 것들 사이에서 해답을 찾으려는 노력이 아니라 사랑을 찾으려는 노력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 수수께끼와 의문으로 가득 찬 미완의 세상에서 '믿음'과 '사랑'이야말로 하루키가 내놓은 유일한 대답이 되는 셈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점은, 소설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진짜/가짜'의 문제입니다. 등장인물들은 '진짜'와 '가짜'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도대체 '무엇이 진짜인지' 집요하게 캐묻습니다.


뭐가 진짜고 뭐가 가짜인가. 뭐가 실체고 뭐가 분신인가. 두 개의 달 중에서 무엇이 '진짜 달'인가, 두 개의 세계 중에서 무엇이 '진짜 우리가 사는 세계'인가. 어디까지가 가설이고 어디서부터가 현실인가… 후카에리가 '마더'인지 '도터'인지 하는 문제 역시 끊임없는 진짜/가짜 논쟁의 일부로 보입니다.


누가 실체이고 누가 분신인가. 아니면 실체와 분신이라는 구별 자체가 잘못된 것인가. 혹은 후카에리는 경우에 따라 실체와 분신을 구별해 가며 쓸 수 있는 것인가?
-BOOK3, 449p中


인물들은 의심하고, 답을 찾기 위해 여전히 논리를 들이밀며 고민합니다. 이 수수께끼의 해답을 찾는 것만이,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이해하는 것만이 그들의 유일한 '선(善)'인 듯이.

미스터리의 세상 속에서, 인물들은 이해와 설명을 신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답은 없습니다. 아니, 하루키에 근거해 더 정확히 말하면 답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루키는 무엇이 진짜였고, 무엇이 사실 가짜였는지 답을 내려 주지 않습니다. 대신 진짜/가짜 논쟁을 해결하기 위한 또 하나의 방법으로, 하루키는 '문제 삼기 않기'를 택한 것입니다.


이야기 내내, 주인공들은 진짜 달이 떠 있고 진짜 피가 흐르는 진짜 세계가 어디인지 끊임없이 질문하고 의심해왔습니다. 그리고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태양빛을 받아, 달이 한낯 회색 오려낸 종이'로 변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그런 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야기의 포인트가 거기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세계에 (혹은 그 세계에) 달이 한 개밖에 없건, 두 개가 있건, 세 개가 있건, 결국 덴고라는 인간은 한 사람밖에 없다. (…) 그렇다, 이야기의 포인트는 달에 있는 게 아니다. 나 자신에 있는 것이다.
-BOOK2, 585p中


끊임없이 이어져 오던 '진짜/가짜' 라는 의미없는 질문에서 탈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믿어 주는 거지? …"
"진심으로 믿어." 덴고는 말한다.
"다행이야." 아오마메는 말한다.
"내가 알고 싶었던 건 그것 뿐이야. 너만 그걸 믿어 준다면, 다른 일은 아무래도 상관 없어. 설명 같은 건 필요 없어."
-BOOK3, 710p中


이해와 설명을 신봉하던 인물들이 '설명 같은 건 필요 없다'며 설명을 저버리고 그저 믿는 방법을 택하게 됩니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기꺼이 침묵합니다. 그런 침묵은 끝내 채워지지 못한 구멍이 되어 미완의 공백을 만들지만 사랑이라는 '완성'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하루키는 믿고 있는 듯합니다.






알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는 와중에 인물들이 단서를 찾아나간다는 점에서는 추리 소설 같고, 아무렇지도 않게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다는 점에서는 판타지 같고, 로맨틱한 연애 소설인 동시에 성장 소설이기도 하며, 하드보일드하면서도 철학적인… 하루키 본인이 직접, "이번에는 '종합 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말한 바 있듯, 소설 <1Q84>는 많은 것들의 종합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아쉽기도 합니다. 이 소설은 모든 게 너무도 많습니다. 너무나 많은 상징, 너무나 많은 의미, 너무나 많은 인용과 너무나 많은 메타포. '이 부분이 꼭 필요했을까?' 를 생각하면, 다소 과하게 여겨질 정도로 복잡하고 산만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생택쥐페리가 말한 대로, '완벽이란 더 이상 추가할 게 없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게 없을 때 도달하는 것'이라고 볼 때, <1Q84>에서 드러나는 과잉은 이 작품을 완벽에서 더욱 멀어지게 만드는 요소로 보입니다.

이 점은 조금 아쉽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 <1Q84>는 다른 무엇보다도 사랑에 관해 이야기한 소설, 지독한 러브 스토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1Q84>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은, '미완'의 일종입니다. 메워지지 않는 공백, 회복되지 않는 상실, 구별되지 않는 진짜/가짜, 해명되지 않는 미스터리.

이 작품은 사건을 충실하게 설명하지만 결코 답을 내 주지는 않고, 도달할 듯 하면서도 끝내 어느 곳에도 가닿을 수 없는, 일종의 미아적 체험을 독자들에게 제공합니다. 많은 것들이 해결되지 못한 채, '미완'의 상태로 남아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작가의 언어를 빌려 말하자면 세계 여기저기에 수많은 공백이 생긴 셈입니다.

많은 부분들이 상실되고, 끝내 채워지지 못한 구멍들이 공백이 되어 알 수 없는 상태, '세계의 룰이 느슨해진' 상태, 진짜/가짜의 경계가 모호해진 상태… 가 됩니다. 1Q84년은 그런 세계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 있는 것, '완'이 존재합니다. 하루키에게, 미완의 세계에 버젓이 존재하는 유일한 100%의 존재는 바로 사랑입니다. 하루키는 아오마메와 덴고를 통해 그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달이 한 개든 두 개든, 그런 것쯤은 한낱 종이 쪼가리로 만들어 버리는, 그런 힘에 대해 쓰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소설 <1Q84>는 하나의 성공적인 러브 스토리가 됩니다.





08.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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