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번째 책) 박정대, 『단편들』(1997)
박정대의 시에서 형식 파괴는 그 자체로 하나의 형식처럼 보인다. 그의 시편들은 기존의 형식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일관되게 형식적이다. 그 형식 파괴란 「SADANG 가는 길」과 「물질적 황홀 2」에서처럼 시 안에 그림이나 신문 기사를 삽입하는 방식, 또는 「거울 속에 빠진 양조위」와 「나는 희망에 관해 말하려고 한다」에서처럼 각주의 내용을 시에 포함시키는 방식, 혹은 「나 자신에 관한 調書」에서처럼 두서가 없는 잠언식의 말 100개를 모아 무질서하게 나열하는 방식 등으로 이루어진다. 다양하고도 화려하게 기존의 시 문법에서 탈피하는 그의 시작(詩作)은 전통을 부정하고 불온해지는 것으로부터 시작(始作)한다. 시의 뿌리가 노래에 있다고들 하지만 이러한 박정대의 시에서 ‘음악성’을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노래가 아니라 차라리 괴성이거나 중얼거림에 가깝다고 할 그의 시 중에서, 두 편을 골라 읽어 본다.
남들이 모두(일부분이) 물질적 황홀에 빠져 있을 때
나는 항상(가끔씩) 물질적 황홀을 노래했다
눈을 뜨면 빛나는 것은 물질들의 예각 혹은 둥근
천정의 하늘, 바람의 광장에서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들은 새들처럼 재빠르게 황홀 속을 통과해
갔다, 나는(우리는) 담배를 피우거나
담배를 피우는 女子(男子)를 끊임없이 피워올렸지만
비가 오는 날이면 비에 젖은 자지(보지) 끝에서
보지(자지)들이 팽이처럼 돌고 있었네 (그는 늘
우산대 끝으로 돌렸지) 나도 돌았던가 돌고,
돌고, 도는 이 가혹한(물질적인) 지구에서
나는 아침밥을 먹고 토하고(어지러워) 또 술을 마셨네
가끔씩(늘) 악마가(천사가) 내 곁에 있었다(있었나)
혼미한 기억이란 부서진 하늘의 살결이다, 눈발
맨발의 눈들이 달려가고 있는 시린 풍경의 끝
검은 새 몇 마리 조깅하고 있는(있었는가)
희미한 기억의 끝 다 부서진
집들이 다시 일어서고 있다
-71면, 「물질적 황홀 12 -둥근 하늘 아래에서의 生」 전문
먼저 「물질적 황홀 12」는 세 가지 이유 때문에 읽기 어려운 시다. 첫째로 이 시는 우리의 호흡을 교란한다. “예각 혹은 둥근/천정의 하늘”이나 “황홀 속을 통과해/갔다”처럼, 일반적인 언어 사용에서 요구되는 휴지의 구간이 적용되지 않고 뜬금없는 장소에서 행이 교체된다. “참을 수 없이 가벼운/존재들은”과 “그는 늘/우산대 끝으로 돌렸지”도 그렇다. 소위 ‘행간 걸침’이나 ‘시행 엇갈림’이라 불리는 이러한 기법은, 의도적으로 문장의 의미 단위와 표현의 호흡 단위가 일치하지 않게끔 설계함으로써 편안한 독해를 방해한다. 예상하지 못한 구간에서 끊어진 문장들이 유발하는 긴장감은 독자를 불편하게 만들 뿐 아니라 불안하게 만들 수 있다.
둘째로 이 시는 언어를 교란한다. 가령 이런 식, “남들이 모두(일부분이)” 혹은 “가끔씩(늘) 악마가(천사가) 내 곁에 있었다(있었나)”. 괄호 친 단어들은 주로 앞의 말과 반대되는 의미로 병렬되어 놓인다. “모두”이면서 “일부분”일 수는 없고, “가끔씩”이면서 “늘”일 수는 없으며, “악마”이면서 “천사”일 수도 없다. 모든 것을 꿰뚫는 창과 모든 것을 막아내는 방패를 팔던 사기꾼이 있었고, 누군가 그에게 그 창과 방패를 서로 부딪히면 어떻게 되느냐 묻자 결국 대답하지 못하고 도망쳐 버렸다는 그 유명한 '모순(矛盾)' 설화에서처럼, 최고의 창과 최고의 방패가 만나는 그 모순의 지점을 언어는 결코 표현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시에서 그가 구사하는 모순 어법은 언어와 언어를 충돌시켜 비(非)언어에 도달하는 양상을 보인다. 누군가 “천사”이면서 동시에 “악마”라면 그는 모든 것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이 시의 괄호들은 모든 것을 말하고 있거나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있다. 어느 쪽이든 간에, 명확한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같다.
마지막으로 이 시는 의미를 교란한다. 말들이 너무 넓은 의미를 거느리고 있는 탓에, 문장들은 자주 모호하고 부정확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비에 젖은 자지(보지) 끝에서/보지(자지)들이 팽이처럼 돌고 있었네”.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발화의 근원에는 술에 취한 화자가 있다. “먹고 토하고(어지러워) 또 술을 마셨네”에서 보듯 이 화자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서, 어쩌면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난센스일지 모른다. 특히 2연의 횡설수설은 대체 무슨 말인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그는 “혼미한” 상태이고, “어지러워” 하고 있다. 뜻 없는 말을 무작위로 내뱉으면서 그는 “돌고, 도는” 중인데, 여기서 우리가 궁금해해야 할 것은 그 말들이 무슨 의미인지가 아니라 그가 왜 이렇게 취했는지다. 그는 왜 “아침밥을 먹고 토하”면서도 “또 술을 마셨”는가.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망가뜨렸나. 이 질문에 대답이 되어 줄 만한 내용을 그의 다른 시 「물질적 황홀 6」에서 찾을 수 있다.
비가 왔어, 저 너머에서, 숨이 찬 듯
나뭇잎들의 폐활량 그 갸륵한 숨결을 적시며
비가 왔어, 저마다 살아 있는 것들의 몸짓이
꿈틀거리며 빗물에 젖어들고 있었어, 생각해봐
따스한 중심을 향하여 더욱 낮아지는 빗방울들의
패거리, 끼리끼리 욕지거리하며 몸을 섞는
광활한 바다에서의 사랑
월요일이 죽고, 화요일이 죽고 그리
비가 내린 다음 수요일이 죽어갔다 나는 그리운
햇볕 한 조각 만나지 못하고 주말까지 계속해서 죽어갔다
세상의 물빛 머금은 모든 것들은 경건한 자세로
꽃을 피울 태세였지만 꽃의 어깨를 건드려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월요일이 죽고, 화요일이 죽고
그리고 주말까지 계속해서 비가 내려 습기찬 들판이거나 어두운
영화관에서 팔짱을 낀 채 들꽃이 죽고 들꽃의 視線이 죽고
자막처럼 빠르게, 자동차들은 거리를, 물방울들을
튕기며 사라져갔다
일주일간의 죽음 끝에 햇살은 輓章처럼 나부낀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만이 죽음을 피해갔다, 음습한
관에서 부활하듯 나는 외출한다, 가로수들이 읽고 있는 거리
거리는 간판들의 무표정과 행인들의 그림자를 안고
도시의 페이지 속에 書標처럼 꽂혀 있다, 피가 마르는 것 같다
봄볕에 불탄다, 유곽과 성당을 지나온 나의 긴 그림자
나는 읽혀지지 않는 한 권의 책과 싸우듯
그렇게 걸으며, 이 거리가 나에게 전해주는 불임의 메시지를
피가 마르듯 그렇게 외로운 가슴의 강들을 스쳐지나며
씨팔, 모든 강들 흘러가 아우성치며 만날
바다를 생각하였다 죽음보다도 깊을
바다의 사랑을 생각하였다
-67~68면, 「물질적 황홀 6 -봄날은 간다」 전문
그의 첫 시집에서 가장 참혹한 작품 중 하나일 이 시에서, 그는 폐허를 묘사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월요일이 죽고, 화요일이 죽고 그리고/비가 내린 다음 수요일이 죽어갔다”로 시작되는 강렬한 도입부는, ‘죽음’을 마치 주인공처럼 등장시킨다. 이 주인공은 도시의 거리를 활보하며 그곳을 일주일 내내 비만 오는 곳, “햇볕 한 조각”조차 볼 수 없는 곳, 따라서 “주말까지 계속해서 죽어”가야만 하는 곳으로 만든다. 시의 후반부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만이 죽음을 피해갔다”는 말은 곧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죽었다는 말과도 같으므로 섬뜩한 말이다. “들꽃”이 죽었고 “거리의 간판들”이 죽었고 “행인”들이 죽었다. 그가 폐허를 폐허로 만드는 시적 방법론이 여기에 있다. 그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죽음과 결부시킨다. “이 거리가 나에게 전해주는 불임의 메시지”라는 표현은 그가 자신이 서 있는 거리의 모든 것을 “불임의 메시지”이자 ‘죽음의 암호’로 여기고 있음을 알게 해 준다. 삶은 관점에 따라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일 수도, 하루하루 죽어가는 것일 수도 있다. “일주일간의 죽음 끝에 햇살은 輞章(망장)처럼 나부낀다”라는 문장을 읽어 보면, 그가 날마다 살아가는 사람인지, 매일 조금씩 죽어가는 사람인지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진정 이 시를 참혹하게 만드는 것은 ‘죽음’이 아니고 ‘사랑’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죽음의 한복판에서 사랑을 떠올리기 때문에 이 시가 그리는 폐허는 더 끔찍해진다. 시의 맨 앞에 작은 글씨로 삽입되어 있는 부분에서(이 부분을 전주라고 부르자), “바다에서의 사랑”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다. 그리고 이 말은 시의 맨 끝에서 “바다를 생각하였다 죽음보다도 깊을/바다의 사랑을 생각하였다”며 다시 한번 등장한다. 총 두 번 등장하는 “바다의 사랑” 사이에 폐허의 풍경이 놓임으로써 이 시는 사랑-폐허-사랑이라는 내용적 삼분할이 가능해지는데, 첫 번째 경계는 시의 전주가 끝나는 부분에서, 두 번째 경계는 후반부의 “씨팔,”이라는 말을 통해서 형성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 시조는 초장-중장-종장의 3단으로 구성되며 종장의 첫 부분에서 ‘낙구’ 혹은 ‘격구’라고 불리는 감탄적 어구를 붙인다는 규칙이 있다. 박정대 시인이 이 작품을 쓸 당시 이와 같은 시조의 형식적 규칙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몰라도, 저 “씨팔,”이라는 감탄사는 그와 동일한 위치에서 동일한 역할을 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화자가 사랑에서 출발해 지독한 폐허를 경유한 뒤 다시 사랑을 떠올리지만, 그 사랑은 처음에 말한 사랑과 이미 거리가 멀어진 사랑이라는 점이다. 전주에서의 “비”가 “저마다 살아 있는 것들의 몸짓이/꿈틀거리며 빗물에 젖어들고 있었어”에서 보듯 생명과 결부한 비였다면, 이후의 “비”는 “햇볕 한 조각 만나지 못하고 주말까지 계속해서 죽어”가게 만드는, 죽음과 결부한 비가 된다. 같은 이유로 “바다의 사랑” 역시 생명보다는 죽음에 더 가까운 무엇이 된다. 아마도 이것이 “씨팔, 모든 강들 흘러가 아우성치며 만날/바다를 생각하였다”에서 “바다” 앞에 “씨팔,”이 붙게 된 이유일 것이다. 온몸이 “봄볕에 불”타는 듯하며 “피가 마르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는 “나”에게 “사랑”이란 죽음보다 더 죽음 같은 것이고, 그렇게 “죽음보다도 깊을/바다의 사랑”을 생각하며 이 시는 가장 생명에 가까웠던 것들을 가장 죽음에 가까운 지점으로 내몰고 있다. 전주의 “끼리끼리 욕지거리하며 몸을 섞는”과 후반부의 “불임의 메시지”를 비교해 보라. 생명의 말이 있던 자리에 남은 것은 죽음과 불모의 말들이다.
죽음과 불모의 말들은 「물질적 황홀」 연작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일관되게 발견된다. 예컨대 「물질적 황홀 2」에서 “그에게는 별로 친하지 않은 죽음이/그의 방문을 두드리며 그를 방문한다면”과 같이, 그리고 「물질적 황홀 4」에서 “빛을 향해, 몰락한 누군가가 황홀하게/떨어지고 있었다”와 같이, 그리고 「물질적 황홀 8」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어둠을 틈타 술을 마시고 저녁에 죽어갔다”와 같이 말이다. 이 말들은 시인이 거듭해 천착하고 있는 저 “물질적 황홀”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힌트를 준다. 감당할 수 없는 세계의 비극 앞에, 시인은 정신적으로 대항하기를 포기하고 차라리 물질적으로 도취하기를 택하는 것. 그 “물질”이란 우선은 술이나 담배로 이해할 수 있지만(“술”과 “담배”는 그의 첫 시집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시어이므로), 약일 수도 있다(“마약”(「SADANG 가는 길」), “몰핀”(「틈 사이로 엿보다」), “진통제”(「라라를 위하여」)와 같은 시어들을 보라). 이것들이 그에게는 최후의 방편이었을 것이다. 그를 황홀경에 빠트리는 “물질”이 술이든 약이든 담배든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절대로 싸워 이길 수 없는 현실이라는 괴물 앞에 놓인 이가 불가항력적으로 택한 것들이다. 그는 망가질 수밖에 없어서 망가진 사람임과 동시에 망가질 걸 알면서 망가진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의 시를 ‘자기 파괴의 시’라 부르는 것도 가능하다. 그는 자기를 파괴함으로써 진정한 자기에 도달하는, 이상한 방식으로 시를 쓴다. 수많은 실험적인 요소들로 가득한 그의 시적 형식 파괴도, 시인으로서 자기 파괴의 일종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시에는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망가진 자아가 있으며, 그들은 기존에 아름답다고 여겨졌던 안정적인 형식을 무너뜨림으로써 얻은 불안정하고 기이한 형식과 만난다. 말하자면 그의 시에서 우리는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자기 파괴적 잔재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저지르는 파괴는, 그것이 화자 내면의 파괴이든 시적 형식의 파괴이든, 결국은 자기 자신을 향해 있다는 점에서 언제나 자의식적 파괴다.
다시 「물질적 황홀 12」로 돌아오자. 이 시가 호흡과 언어와 의미를 교란하면서 쓰인 시라고 앞서 이야기했는데, 그 모든 교란들이 정교하게 의도된 장치라기보다는 차라리 고통스럽게 발현된 하나의 증상에 가깝다고 생각되는 것은, 그것들의 원인에는 물질적 황홀경에 빠져 스스로 파괴된 화자가 있기 때문이다. 폐인처럼 보이는 그는 니코틴과 알코올의 황홀경 속에서 정상적인 ‘호흡’을 잃고, 명확한 ‘언어’를 잃었으며, 삶의 ‘의미’마저 잃어버린 자다. 이 시를 읽을 때 우리는 지독한 폐허에 다름없는 세상 속에서, 스스로 폐허가 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었던 한 사람을 본다. 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취해서 살아야 한다면 꿈속에서 죽으리”(「短篇들」). 그가 구사하는 문장들이 현실에 뿌리내리고 있기보다 꿈속에서 떠다니는 듯했던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이열치열’이라는 말처럼 눈에는 눈이고 이에는 이이듯 폐허에는 또 다른 폐허로만 맞설 수 있다면, 그의 혼미한 기억과 혼몽한 정신 상태는 자기 파괴를 통해 스스로 폐허가 됨으로써 현실의 폐허에 맞서고자 한 까닭이 아닐까.
때마침 그의 다른 시집에 이런 문장이 보인다. “시인은 밤을 끝내는 사람 아침의 햇살을 끌어와 만물에 되돌려주고 스스로 다시 어둠이 되는 사람”(「시」). 이 말에 따르면 그는 밤에 맞서기 위해 스스로 밤이 되고, 그 대가로 다른 이들에게 빛을 되돌려주는 사람이다. 이 말은 그가 자신의 시에서 그토록 처연하게 거듭해온 ‘죽음’이 그냥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위한 죽음이며, 그가 일삼는 ‘파괴’ 역시 그저 파괴일 뿐 아니라 건설을 위한 파괴라는 근거가 되어 준다. 그러니 이렇게 말하자. 이 자기 파괴의 시학에는 자기희생이 뒤따른다. 그리고 박정대의 시가 이러한 자기희생의 소산임을 알 때, 우리는 그의 난해함 속에서 한 줄기 아름다움을 길어 올릴 수 있다. 불편하고 불안하게만 느껴지던 그의 시가 어느 순간 아름다워지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일찍이 신형철 평론가가 “몰락의 에티카”란 말을 쓴 적이 있거니와, 스스로를 희생한 자의 몰락은 윤리적이기 때문이다.
06.2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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