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곡학아세(曲學阿世)’는 『사기(史記)』 유림열전 원고생 편에 나오는 고사성어로, ‘학문을 굽혀 세상에 아첨한다’는 뜻이다. 이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실을 외면하고 권력이나 대중에게 아부하는 태도를 비판하는 말이다. 유학에서 강조한 예의와 도리를 지키는 데서 출발해, 오늘날에는 지식인이 자신의 전문성을 악용해 세속적 이익을 추구할 때 자주 인용된다.
지난해 연말,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자 국회는 이를 신속히 해제하고, 이어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선고를 앞두고, 대통령과 대학 동문인 한 헌법학자가 방송에 출연해 탄핵이 기각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재판의 불공정성, 증거 불충분, 국민의 비상계엄에 대한 이해 증가 등을 이유로 들며, 비상계엄이 실질적 피해 없이 일단락된 사건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 외에도 다수의 헌법학자, 변호사, 그리고 판사·검사 출신 국회의원들이 탄핵 기각이나 각하를 주장하며 여론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일반 시민은 ‘상식’을 기준으로 사안의 정당성과 부당성을 판단한다. 국어사전은 ‘상식(常識)’을 “일반적인 사람이 다 가지고 있거나 가지고 있어야 할 지식이나 판단력”이라 정의한다. 군대를 동원해 국회를 마비시키려 했던 비상계엄이 명백히 위헌·위법이므로 탄핵 인용은 당연하다는 것이 시민 다수의 판단이었다. 그럼에도 탄핵 기각이나 각하를 예상하는 법률 전문가들의 발언은 시민의 상식과 충돌했고 혼란을 부추겼다. 특히 헌법재판소가 변론 종결 이후 선고를 지연하던 시점에는 ‘내란성 불면증’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시민들은 불안에 시달렸다. 결국 헌법재판소는 오랜 숙고 끝에 전원일치로 탄핵을 인용했다.
사법적 판단과 시민의 상식이 항상 일치할 수는 없다.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에서는 기대와 판결 사이의 간극이 더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비상계엄 당시 국회 운동장에 헬기가 착륙하고, 무장 군인들이 국회의사당에 진입하는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본 시민들이 느꼈을 충격과 공포는 단순한 해프닝으로 치부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그것은 헌정 질서에 대한 위협이자, 위헌적이고 위법한 행위로 비쳤다. 따라서 전문가라면 법률적 판단을 할 때 상식과 법의 균형을 고려했어야 마땅하다.
고도의 법률 교육을 받고도 상식적인 판단 하나 제대로 내리지 못한다면, 그들이 쌓은 지식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만일 그것이 단지 자신의 입지를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면, 이는 곡학아세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판사나 검사, 변호사, 교수, 정치인의 자리에 올랐다고 해서 상식 위에 군림할 자격을 갖는 것은 아니다. 사회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고위 공직자나 전문가일수록 상식을 견지하고 양심을 지켜야 한다.
천 년, 이천 년이 지나도 여전히 살아 숨 쉬는 고사성어가 있다. 곡학아세도 그중 하나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경계해야 할 지식인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보여준다. 왜곡된 전문성보다, 정직한 눈과 양심을 지닌 평범한 시민들의 판단이 더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밑거름이 된다. 그저 기초적인 상식이 통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