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고사성어는 <삼국지>에서 유래한 말로, 상대의 학식이나 재주가 놀랄 만큼 발전했을 때 쓰인다. 나는 오랜만에 그 말을 떠올렸다.
한 지역 신문사의 기자로 임명된 후, 출입처인 ㅇㅇ군청과 ㅇㅇ군의회를 처음으로 방문했다. 방문에 앞서, 2006년 시 인재개발원에서 1년 동안 장기 교육을 함께 받았던 동기가 현재 △△국장으로 재직 중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교육 중에 친하게 지냈던 사이가 아니고, 오랜 시간이 흘러 혹시 그가 나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염려를 안고 그의 방을 찾았다.
국장 부속실 직원에게 방문 목적을 이야기하니 출입문을 열어주었지만, 그는 자리에 없었다. 직원이 잠시 기다려 보라고 해서, 나는 문 앞의 대기 의자에 앉았다. 불과 몇 분이었지만, ‘일각이 여삼추’라는 말이 실감 날 정도로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일어나려던 찰나, 그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마치 미리 만남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에게서 함께했던 교육 동기들의 근황을 들을 수 있었는데, 그는 아직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일선에서 물러난 지 오랜 사람들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었다. 나는 퇴직 후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하고, 출입 기자로 일하게 되었기에 인사차 방문했다고 찾아온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출입 기자에 대해 자신이 아는 바를 이야기해 주었다.
내 기억 속에 젊은 날의 그는 예리하고 패기만만하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용수철과 같은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대화를 나누며 나는 그가 더 이상 19년 전 함께 공부했던 풋풋한 40세 팀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상대를 날카롭게 응시했던 눈매가 이제는 그윽하고 부드러워졌다고 느껴졌다. 올 연말에 퇴직을 앞두고 있다는 그의 원숙한 말투와 행동에서 관리자로서의 진중함과 여유로움이 보였다. 그 모습이 인상 깊어, 자연스레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고사성어가 떠올랐다. 대화를 마무리할 무렵 그는 ‘김영란법’ 때문에 친분이 있는 사이에도 식사를 함께하기 어려운 현실을 언급했는데, 짐작하기에 밥이라도 함께 먹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그럴 수 없으니 양해해 달라는 뜻을 에둘러 전하는 듯했다. 내가 홍보부서에 문서를 전달하러 가야 한다고 인사를 건네자 그는 그 부서가 자기 방 바로 앞에 있다며 선뜻 앞장서 안내해 주었다.
홍보부서에 가니 부서장과 담당 팀장은 출장과 교육으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그는 담당자에게 나를 공직 선배로 소개하며, 자신과는 장기 교육을 함께한 사이이고 유능한 분이라며 한껏 치켜세웠다. 내가 담당자와 기자 출입 관련 이야기를 나누려 하자, 자리에 앉아 함께 들으려 했다. 나는 바쁘실 테니 먼저 일어나라고 정중히 권했고, 그는 내 말을 따라 환하게 웃으며 떠났다.
살면서 수많은 인연을 맺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관계가 언제 다시 이어질지 몰라 자연스레 소홀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나는 매년 초, 휴대전화에 저장된 번호 중 1년 동안 한 번도 연락하지 않은 사람을 삭제하는 습관이 있는데 흔히 말하는 ‘인맥 다이어트’다. 나이가 들수록 내려놓아야 할 것이 많아지는데, 인맥도 그중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예외도 존재한다는 것을 배웠다. 20년 가까이 연락 한 번 없던 사람이 찾아왔는데도 반갑게 맞아주고, 기꺼이 도움을 주는 모습에서 오래된 인연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달았다. 살면서 고마워해야 할 일이 참 많다. 오늘의 만남이 그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