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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새 이름, 브런치스토리 작가

퇴직 후

by 백승인

퇴직하고 나서 아쉬운 것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명함이다. 현직에 있을 때는 너무 흔해서 그 가치를 특별히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막상 손에 쥘 수 없게 되니, 그 빈자리가 생각보다 크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낯설었던 건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이었다. 명함도 없고, 직함도 없는 나를 누군가에게 설명해야 하는 자리가 애매하고 조심스러웠다. 명함을 건넬 순간에 내밀 것이 없다는 사실이 어색하고 머뭇거려지는 모습을 만들어냈다.


다행히 비슷한 시기에 퇴직한 동료들과 함께 사무실을 마련하며 '행정사 합동사무소 공동대표'라는 명함을 만들었다. 이어서 퇴직자 단체인 행정동우회 분회를 설립하여 중앙회로부터 인증을 받아 '동우회 사무국장'이라는 명함도 생겼다. 나는 상황에 따라 두 개의 명함을 번갈아 사용하며, 4년이 넘도록 ‘퇴직했다’는 걸 거의 느끼지 못한 채 지냈다.


그러다 올해 1월, 동우회 사무국장 자리를 유능한 후배에게 넘기고, 2월 초에는 사무실 문을 닫았다. 그제야 비로소 ‘퇴직했다’는 사실이 진짜로 마음에 와닿았다. 이제 더는 명함도, 직함도 없었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징표를 잃어버린 셈이었다. 앞으로 어떤 이름으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지 고민이 많아졌다.


2월 중순, 퇴직 전에 근무했던 기관의 한 위원회에 위원으로 위촉되어 첫 회의에 참석했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나는 익숙한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사무실 배치가 많이 달라져 있었지만 낯설지 않아, 자연스럽게 부속실을 지나 기관장 방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만난 기관장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 다른 위원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대부분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서로 명함을 주고받는 순간, 기관의 국장이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 위원님은 예전에 저희 기관에서 근무하셨던 선배님입니다.”


그는 아마도 내가 퇴직한 지 오래되어 명함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걸 고려해서 소개한 것이리라. 그의 짧은 한마디가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명함 하나 없는 내가 이 자리에 외부인으로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한때 이곳의 일원이었고 함께 시간을 쌓아온 사람이었다는, 조용하고도 따뜻한 인정 같았다. 그 말 덕분일까. 실내 공기가 조금 달라졌고, 나를 향한 시선에도 친근함이 실려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날 나는 명함이 단순한 연락처가 아니라, 사회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 증명해 주는 도구였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런 명함이 사라진다는 것은 곧 내 정체성의 일부가 빠져나가는 일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오랜 시간 함께 나눈 관계와 기억이 그 빈자리를 따뜻하게 채워줄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런 관계들만을 기대하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고, 결국 명함이 없는 삶, 직함 없는 삶이 이제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라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사무실 문을 닫던 날 내가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이제 과거의 직함을 모두 내려놓고, 오직 하나의 이름만 담긴 멋진 새 명함을 만들어야겠다. 잃어버릴 걱정 없고, 누구를 만나도 머뭇거릴 일도 없는,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담아낼 수 있는 이름.

나의 새 이름은 ‘브런치 스토리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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