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빛 새털구름 하하 고운데. 학교 나간 울 오빠 송아지 타고 저기 오네. 읍내 나가신 아빠는 왜 안 오실까. 엄마는 문만 빼꼼 열고 밥 지을라 내다보실라
미루나무 따라서 곧게 난 신작로 길 시커먼 자동차가 흙먼지 날리고 달려가네. 군인 가신 오빠는 몸 성하신지. 아빠는 씻다 말고 먼 산만 바라보시네
이웃집 분이네는 무슨 잔치 벌였나 서울서 학교 댕긴다던 큰 언니 오면 단가 뭐. 돈 벌러 간 울 언니는 무얼 하는지. 엄마는 괜히 눈물 바람 아빠는 괜히 헛기침만
겨울 가고 봄 오면 학교도 다시 간다는 데. 송아지는 왜 판담 그까짓 학교 대순가 뭐. 들판엔 꼬마애들 놀고 있는데. 나도 나가서 뛰어놀까 구구단이나 외울까 말까
<식구생각>은 난산 끝에 태어난 곡이다. 때는 1975년, 김민기는 카투사에서 괜찮은 군대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무렵 유신 반대 투쟁이 본격화되었는데집회 현장에서는 그의 노래가 불렀던 모양이다. 이에 보안사는 김민기를 연행했고, 중앙정보부 요원에게 혹독한 조사를 받게 된다.
김민기는 조사 과정에서 요원들에게 의식이 가물거릴 정도로 두들겨 맞았는데, 문득자신 때문에 이 사람이 죄를 짓는구나 싶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이때 중정요원은김민기에게 반성하는 의미로 건전가요를 만들라고 요구했다. <식구생각>은 이런 강압적인 상황에서 창작되었다. 중정 요원은 완성된 노랫말을 보면서처음에는 고개를 갸웃 뚱하더니잠시 뒤 “이거 말로는안 되겠군”이라고했단다.
<식구생각>은 서정적이지만 당시 피폐화된 가난한 시골에 대한 이야기였다. 결국 김민기는 군 영창에 갇혔다가, 얼마 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란 말로 유명한 12사단에 재배치받게 된다. 만약 그들이 원하는 대로 ‘동방의 아름다운 대한민국 우리의 겨레~ 어쩌고저쩌고’ 따위의 노래를 만들었다면 김민기는 계속 카투샤에서 스테이크를 먹으면서 군 생활을 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와같은 살벌한 상황과 달리 <식구생각>은 한 폭의 수채화와같은 작품이다. 선율은 애잔하면서도 느린 타령조에 가깝다. 가사를 보면 ‘분홍빛 샛털구름’ 같은 노을이 퍼질 무렵 아빠를 기다리는 아이의 시선으로 시작된다. 이어서 오빠는 군대에, 누나는 돈을 벌기 위하여 서울로 갔다. 집은 가난해서 송아지를 팔았고, 아빠는 한숨을, 엄마는 눈물을 짓는 서러운 사연이 즐비하게 나온다. 그야말로 산업화에 피폐된 딱한 시골에 대한 이야기다.
요즘도 노랫말처럼 어려운 가정들이 많이 있다. 절대 빈곤은 넘었다고 하지만 상대적 박탈감으로 마음은 더 가난해졌는지, 가족 간에 상처를 주는 일도 흔하다. 이혼율도 높고, 부모 형제간의 요란한 법정 다툼도 비일비재하다 . 가족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과 재산 싸움은 무간지옥과 다름없다.
장 폴 사르트르는 <닫힌 방>에서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했다. 타인과의 난해한 관계를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피붙이는 지옥 같은 타인보다도 심한 트라우마를 남기곤한다. 남들이야 싫으면 인연을 끊으면 될 일이지만, 식구는 미워도 싫어도 얽힐 수밖에 없는 사이다. 피할 수 없는 질긴 인연. 그것은 커다란바위를 끝없이 밀고 올라가야 하는 시치프스의 운명과닮았다.
가족과 식구는 헷갈리는 말이다. 굳이 구별하자면 가족의 족(族)과 식구의 식(食)이란 글자에 의미가 나타나 있다. 가족이 혈육의 개념이라면 식구는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를 의미한다. 그런 까닭에 제아무리 친한 이웃이라도 식구는 될 지언정, 가족은 될 수 없는 법이다.
식구든 가족이든 시작은 남녀의 만남에서 비롯된다. 그 인연이 결혼으로 이어지면 배우자의 모든 세계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녀’만, ‘그이’만이 영원한 사랑을 속삭일 수는 없다. 그것은 시가댁과 처갓 집이라는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결혼이란 문을 열고또다른 낯선 혈연의 세계와조우하면서 어른이 되어간다.
저출산으로 우울한 미래가 염려되는 시절이다. 요즘 보면 혼령기의 청춘들은 ‘나 혼자 산다’와 같은 예능프로를 즐기면서 혼자 사는 생활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이른바 비혼주의. 살아가는 방식이야 다양할 것이니 달리할 말은 없지만, 혹시 삶에 대한 두려움 때문은 아닌지 생각했으면 한다.
어느 현자가 말했다. 자신의 수행력을 알고 싶다면 혈육을 대하는 자신의 마음을 보라고. 오죽하면 예수도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라고 했을까. 그만큼 가족이란 극복하기 힘든 대상임과 동시에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존재라는 뜻이다.
이처럼 피붙이는 난해한 인생 텍스트이자 사랑의 실천체험장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짜 사랑의 배움터는 교회나 절이 아니라 식구들과 아웅다웅 살아가는 집이 아닐련지.그것이 즐거운 집이든, 무간지옥 같은 집이든. 서로 지지고 볶으면서 사랑을 배울 수밖에 없다.
어쩌다보니 지상에서 얽힌 나의 인연들. 이 또한 신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일 것이니 할 말은 없다. 그러니 '식구'라는 삶의 멍에를 짊어지고 가는 것도 수행일 것이다. 그나저나 김민기 선생님도 부부싸움을 했을까? 아마도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