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침 이 슬

김민기 다시 듣기 19

by 박신호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민중가요가 널리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아마도 86세대라면 민중가요에 대한 추억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집회와 시위 현장에서 퍼졌던 격렬한 선율과 강렬한 노랫말. 이러한 민중가요집 중에서 <노래를 찾는 사람들 1, 2집>과 <노래마을 2집>은 지금껏 내가 아끼는 음반이다.

1980년대 거리를 달궜던 민중가요를 헤아려본다. 샹송 번안곡이었던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훗날 범능스님이라 불렸던 정세현의 <광주출정가>, 백기완과 황석영이라는 걸출한 입담가들이 만든 <오월의 노래>, 비장한 선율이 압도했던 <반전반핵가> 그리고 트롯풍의 <서울에서 평양까지>. 그때 민중가요는 고정 팬을 거느린 시대 현상이었다.


1985년 겨울. 김대중 선생의 귀국과 12대 총선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듀란듀란의 뉴웨이브와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에 빠진 무료한 방학을 보내고 었다. 북풍이 귀를 때리던 날이었다. 하루는 학과 친구로부터 내일부터 돈을 벌어보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야당 후보 선거운동원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일당 만 원에 점심까지 제공하는 조건이었다. 당시 짜장면 한 그릇이 1,500원이었으니, 나름 괜찮은 금액이었다.


다음 날 아침, 유세현장인 학동에 있는 모 초등학교로 향했다. 주어진 임무는 우리 후보가 등장하면 그를 감싸고 연호하기와 상대 후보(민정당)가 연설할 때는 야유 퍼붓기였다. 반면에 우리 후보가 단상에 서면 기립해 선동하듯 손뼉 치는 것도 주된 미션이었다. 나와 함께 동원된 국문과 학우 6명은 이를 충실하게 수행했고, 받은 수당으로 다 같이 자취방으로 몰려가 삼겹살을 구워 먹곤 했다.(다들 선거권이 없는 만 19세였음)


선거운동 기간은 열흘이었는데, 셋째 날 유세 현장에서 돌출사건이 일어났다. 우리 6인방 가운데 한 명이 민정당 후보의 연설 중에 "독재의 앞잡이를 회 처먹자."라고 느닷없이 크게 외쳤다. 놀란 후보는 잠시 연설을 멈췄고 어느 틈에 사복형사가 다가왔다. 순간 그와 우리 사이에 몸싸움이 났고 유세장은 아수라판이 되었다. 다행하게도 우린 의로운 시민들의 도움을 받아서 담장 너머 달아날 수 있었다. 겨우 숨을 돌린 우리는 과격한 그를 욕하면서 추어탕을 먹었다. 뽐뿌집이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식당이었다.

선거 결과는 양김씨가 이끌던 신민당의 승리였다. 선거의 짜릿함에 휩싸인 나는 그때부터『김대중 옥중서신』, 『행동하는 양심』, 『대중경제론』 등의 책을 열독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 학기부터 달아오른 교내 집회 뒷줄에서 구호를 따라 외치는 학생이 되었다. 시위 때마다 선창자의 지시에 따라 구호를 외치거나 민중가요를 불렀는데, 나는 그와 중에도 '피!' '칼!' '따르라!' 등 쌀벌한 가사를 들으면서 음악성 낮은 노래라 여겼다. 하지만 집회 종료 때 자주 불렸던 <아침이슬>만큼은 그 수려한 선율 때문인지 몸이 짜릿해졌다.


스무 살 적 내가 감동했던 <아침이슬>을 모르는 국민은 없으리라. 요즘 태극기를 들고 다니는 할배들도 <아침이슬>은 따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신촌로터리를 매운 백만 군중이 합창했던 노래. 2016년 촛불 집회 당시 양희은이 백만 시민들과 떼창을 했던 <아침이슬>이 아니던가. 시대의 얼터너티브 김민기의 대표곡이자 명예 국가(國歌)로 평가받는 <아침이슬>. 여타 민중가요와는 결이 다른 우리 현대사의 명곡이다.


<아침이슬>은 1971년 김민기 데뷔 앨범과 양희은의 <고운노래> 앨범에 수록되어 있다. 김민기의 <아침이슬>이 나지막이 울리는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면, 양희은은 청아하면서도 단호한 음성으로 시원하게 노래했다.


이 곡은 전통 가요 기법인 A(메인)–A’(변주)-B(절정)–A(메인)라는 도식이 아닌 A–A’-B–C(새로운 테마)라는 형식이다. 발표 당시에는 건전가요로 분류되었지만 1975년에는 아무런 설명 없이 금지곡이 되었다. 훗날 알려진 바로는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라는 부분이 불온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궁색한 변명이었다. 과연 나훈아가 <아침이슬>을 불러도 금지되었을까. 어쩌면 김민기 자체가 시대의 금지는 아니었을까.

흥미로운 점은 <아침이슬>이 북한에서도 금지곡이라고 한다. 북쪽에는 1991년쯤 알려졌는데, 북한 주민들도 따라 부르는 노래로 유행했단다. 한데 북한의 김정일이 고난의 행군 시절, <아침이슬>을 금지시켰다고 전한다. 남과 북, 할 것 없이 부당한 정권과 <아침이슬>은 상극이었으니, 아이러니라 하겠다.


독일의 헤겔은 역사 발전은 정(正), 반(反), 합(合)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지금 우리 사회도 정과 반이 서로 격렬하게 충돌하는 형국이다. 부디, 시대의 모순을 극복하고 새롭고 희망찬 합(合)의 사회가 도래할 때까지 <아침이슬>은 계속 불려야 할 것이다.


바야흐로 이순의 계절이다. 스무 살의 거리와 캠퍼스가 엊그제 일 같건만 이제는 60 갑자의 거리감만큼이나 아득하다. 몸의 노화를 순하게 껴안으면서, 좌충우돌했던 어설픈 내 청춘의 나날을 돌아본다. 그리고 <아침이슬>의 마지막 소절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를 떠올리면서 다시 걸어야 할 길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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