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이

김민기 다시 듣기 8

by 박신호


해 저무는 들녘 밤과 낮 그 사이로

하늘은 하늘 따라 펼쳐 널리고

이만치 떨어져 바라볼 그 사이로

바람은 갈댓잎을 살불어가는데

이리로 또 저리로 비껴가는 그 사이에

열릴 듯 스쳐가는 그 사이 따라

해 저무는 들녘 하늘가 외딴곳에

호롱불 밝히어둔 오두막 있어

노을 저 건너에 별들의 노랫소리

밤새도록 들리는 그곳에 가려네

이리로 또 저리로 비껴가는 그 사이에

열릴 듯 스쳐가는 그 사이 따라

노을 저 건너에 별들의 노랫소리

밤새도록 들리는 그곳에 가려네

이리로 또 저리로 비껴가는 그 사이에

열릴 듯 스쳐가는 그 사이 따라

해 저무는 들녘 밤과 낮 그 사이에

이리로 또 저리로 비껴가는 사이에

비껴가는 그 사이에 비껴가는 사이에

비껴가는 그 사이에


아침 기도 시간. 여명이 비치는 창문을 살짝 열어본다. 찬 기운이 틈으로 들어온다. 정신이 번쩍 든다. 기도 의자를 받치고 무릎을 꿇는다. 마음을 조율하는 시간이다. 신령스러운 기운이 내 귓가에 속삭인다. ‘늘 그런 하루란다. 그 틈으로 들어가렴.’이라고


미명이 깔려있는 거실에 앉는다. 아내와 아이들은 곤히 잠을 자고 있다. 탁자 위에는 지난밤 아내가 내어놓은 빵과 과일이 놓여있다. 혼자만의 아침 식사다. 우선 따끈한 차를 끓인다. CD플레이어에서는 브람스 교향곡 3번 3악장이 흐르고 있다. 서서히 시간의 틈이 벌어진다. 맑게 고인 연못을 마음껏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가 된 기분이다.

일상의 틈은 에너지의 근원이다. 그 자리는 새벽녘 글쓰기, 한낮의 산책, 눈을 감고 드리는 기도. 별을 바라보는 것. 장 그르니에의 산문 읽기. 바흐의 음악 감상 등. 이 모두 것들 보듬고 있는 비밀 통로다.


김민기의 <그 사이>는 틈을 노래하고 있다. 그는 치열한 시대 정신과 사유를 노래했다. 그런 탓에 그의 음악에는 늘 숭고함과 비장함이 바탕을 이룬다. 이에 비해 <그 사이>는 편안하고 나른해지는 곡이다. 듣다 보면 저절로 콧노래가 흥얼거려진다. 이 곡은 컨츄리 가수 존 덴버의 음악처럼 마음껏 자연의 틈을 노닐고 있다.


<그 사이>는 해맑은 동요, 서정적인 한 편의 시다. 노랫말의 조탁(彫琢)이 파아란 가을 하늘만큼 빛나는 곡이다. 이 노래는 1972년 양희은 2집 고운노래 모음에 실려있다. 훗날 김민기가 직접 부른 <그 사이>는 1993년 김민기 2집에 수록되어 있다. 언어를 다루는 그의 탁월한 시적 능력이 빛나는 작품이다.


얼마 전 벗들과 남평 드들강을 따라서 솔밭 유원지까지 거닐었다. 예순 고개를 앞둔 네 명의 선남선녀(?)들은 강변 코스모스 군락지에서 사진을 찍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곳 유원지 소나무들은 늙은 용처럼 꿈틀대고 있었고, 강물은 푸르른 빛을 품고 있었다. 기상 이변이 일상인 요즘이지만 아무튼 가을은 가을이었다.

넉넉하게 부푼 강물 위에는 오리 떼들이 활강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수면에 번져가는 파문들. 우리는 유원지 정자(亭子)에서 자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이 쉬어가는 순간. 그렇게 시공의 틈 사이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풀어진 마음이 미주알고주알 이야기의 실타래를 풀고 있다. 늙으신 부모와 몸 아픈 배우자, 세상에 뿌리를 내리려는 자식 등 힘겨운 삶의 사연들이 술술 나왔었다.

우리의 세상 시름을 맑은 강물이 경청하고 있었다. 울퉁불퉁한 비포장길 같은 우리의 삶을 자연이 위로해주고 있었다. 강물 빛이 힘을 잃어갈 무렵,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번엔 둑길을 걷기로 했다. 가을볕이 강물과 들녘을 금빛으로 감싸고 있었다. 그 빛에 잠긴 선남선녀들은 말없이 가을 속으로 들어갔다. 파란 드들강과 누런 벼들의 물결. 입을 쫙하니 버린 허공에서는 가을빛이 내려오고 있었다.

‘독야청청’인지 ‘왕따’인지 모를 외로운 소나무가 보였다. 왕따라는 말에 한 차례 웃음이 터졌다. 길은 하류로 이어져 있다. 그때 한 벗이 “아래 강물을 보세요”라고 외쳤다. 내려다보니 강물이 주홍빛으로 물드는 하늘을 수채화처럼 그리고 있었다. 순간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땅인지, 이른바 망아(忘我). 그저 틈만, 사잇길만이 남아 있었다.


차츰 어둠이 지상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짙은 코발트 빛 사이로 카페의 이국적인 불빛들이 하나, 둘 밝혀졌다. 별빛 찬란한 고흐의 그림을 보고 있는 착각이 들었다. 그날 그렇게 벗들과 더불어 세상의 틈을 헤집고 다녔다.

힘들 때마다 사잇길을 부지런히 찾아다녀야겠다. 어쩌면 그 자리에서 절대자를 만날지도 모를 일이다. 그 사이를 바라본다는 것. 그것은 영원으로 이어진 현존의 길이니, 지금 신발을 신고 그곳으로 떠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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