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찐 송아지 한 마리 어어 철둑 길로 뛰어가요. 새끼 염소도 한 마리 송아지만 쫓아가요. 얘야 얘야 누렁아 기차 오면 다친다. 얘야 얘야 할배야 누렁이한테 깔릴라. 꽃 따줄게 이리 와.
내 말 안 듣고 가더니 흐응 기차한테 받혔지. 촐랑거리고 가더니 흐응 누렁이한테 깔렸지. 그러길래 뭐 래든 글루 가면 안 된댔지. 어떡할래 어떡해, 나도 인젠 모르겠다. 아이구 아이구 속상해
살찐 송아지 한 마리 어어 철뚝길로 뛰어가요. 새끼 염소도 한 마리 송아지만 쫓아가요. 그러길래 뭐 래든 글루 가면 안 된댔지. 어떡할래 어떡해 나도 인젠 모르겠다. 속상해서 죽겠네.
인류학자 호이징가는 인간을 호모 루덴스라고 했다. 놀이하는 인간이란 뜻이다. 몇 해전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유명 광고가 있었다. 여가를 바라는 생활인들의 소망을 잘 표현한 광고였다. 현대인들이 이른 아침부터 야근까지 하면서 죽어라 일하는 것도 어쩌면 놀기 위함일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제대로 놀지 못할뿐더러 그럴 기회도 마땅치 않다. 심지어 휴가도 반납하고 일을 해야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 더 수승(秀昇)한 경지는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라고 한다. 가정생활도 직장 업무도 놀이하듯 해보라는 말이다. 말이 쉽지 ‘즐기면서 일하라’는 것은 실행하기 어려운 주문이다. 설혹 일과 중에 휴식이 주어져도 인터넷 게임이나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같은 SNS의 미로를 헤맬 뿐이다. 경제적,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이라면 골프장을 찾을 것이나 이는 선택받은 마이너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놀지 못하는 인간의 표정은 화가 난 사람처럼 보인다. 그들은 인간 관계도 교묘하여 말뜻을 빙빙 돌리기 일쑤다. 사는 것에 겁을 먹었으니 놀 줄 아는 능력이 사라진 것이다. 이웃들과 단절되고, 대지의 숨결도 느끼지 못한다. 그저 생활에 치여서 제 몸 하나 건사하기에도 버거워한다. 이런 지경이니 만사 제치고 놀이를 즐기는 인간이 되기란 무쇠에서 꽃이 피어나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물론 놀이의 달인도 있다. 이들은 혼자만의 놀이를 즐긴다. 절대로 무리 짓지 않고 외로운 사자처럼 도심과 자연을 거침없이 다닐 뿐이다. 대신 잔잔한 음악 감상이나 독서, 또는 배낭 하나 걸치고 홀로 빈티지 여행을 감행하기 한다. 이 또한 각자도생의 여가를 향유하는 고수일뿐, 여럿이 함께하는 놀이에는 익숙하지 않다.
유년 시절에는 TV가 있는 집도 드물뿐더러 컴퓨터나 핸드폰도 없었으니, 혼자 논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대신 등교 때부터 하굣길까지 친구들과 놀이하기에 분주했다. 집에 오자마자 가방을 던져두고 어둠이 내려오는 시간까지 흙투성이가 되어 놀았다. 그때 동네 공터는 늘 구슬치기, 딱지놀이, 술래잡기,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해시계 놀이, 공기놀이, 고무줄놀이, 공차기 등 각종 놀이를 하는 아이들로 넘쳐났다. 골목길과 공터는 어린이들의 공화국이었다.
우리 세대는 또래들과의 놀이들을 통해서 세상의 규칙과 연대 의식 그리고 공정함과 부당함을 익혀갔다. 반면에 지금의 아파트 놀이터에는 아이들 소리가 없다. 미끄럼틀과 그네는 녹이 슬어있고 회전기구도 멈춰있다. 아이들의 함성이 사라진 놀이터는 종말을 맞이한 듯 썰렁하다. 놀이터에서 사라진 아이들은 엄마의 지시에 따라 부지런히 학원을 다니거나 스마트 폰에 빠져있다.
인지학자 루돌프 슈타이너는 교육에 있어서 놀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가 설계한 발도르프 교육은 놀이를 중요한 교육과정하고 있다. 슈타이너는 어린 시절 놀이를 즐기지 못한 채 성장한 어른들 가운데는 인간관계에 서툴거나 중독에 쉽게 빠져든다고 설명한다. 영국의 썸머힐 교육도 놀이를 통하여 영혼이 맑은 아이들을 길러내고 있다. 이처럼 놀이를 통한 공동체 학습은 대안 교육의 장점이다.
천진난만하게 웃고 달리는 아이들은 반짝이는 보석이다. 예수께서도 어린아이 같은 이라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했다. 잘 놀지 못하는 내게 천국 가는 길이 멀게 보인다. 나는 술도 못 마실뿐더러 노래와 춤에도 영~ 젬병이다. 골프, 당구 같은 것과도 담이 쌓고 있다. 그러다 보니, 무아지경에 빠져 재미있게 노는 이들을 볼 때면 부럽다. 에고를 녹여낸 이들이 뿜어내는 유희의 에너지는 눈부시고 아름답다.
김민기의 <고무줄놀이>는 고무줄놀이하면서 부르는 동요다. 노랫말에는 송아지 한 마리, 새끼 염소, 누렁이라는 황구가 줄줄이 나온다. 요즘 같으면 반려견이나 반려묘가 나오겠지만 1970년대 농촌 풍경은 이러했다. 고무줄놀이는 주로 여자아이 몇이 고무줄을 사이를 넘나들면서 폴짝폴짝 뛰는 동작이다. 당시 어린 숙녀들은 고무줄놀이하다가 느닷없이 줄이 끊어지는 변을 당하곤 했다. 어린 더벅머리들이 고무줄을 싹둑 자르고 도망치면 꼬마 숙녀들은 개구쟁이들을 죽어라 쫓아갔다. 그렇게 도망치고 쫓아가면서 놀이를 즐겼다.
언제쯤 어린아이들처럼 망아(忘我)의 경지에서 노닐 수 있을까? 가능할까? 잘 모르겠다. 오는 주말에 만사를 제치고 한나절 놀아보련다. 기분을 예열시키기 위해 신나는 노래를 흥얼대면서 도심 길을 걸어보겠다. 지나는 행인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더라도 어색하지 말 것. 그럴수록 시선 무시. 오래 전 고무줄놀이에 신나 했던 꼬맹이들의 해맑은 웃음 소리가 어딘선가 들리는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