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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호 Dec 22. 2023

봉우리

김민기 다시 듣기 17.

  

사람들은 손을 들어 가리키지. 높고 뾰족한 봉우리만을 골라서. 내가 전에 올라가 보았던 작은 봉우리 얘기해 줄까?     


봉우리, 지금은 그냥 아주 작은 동산일 뿐이지만 그래도 그때 난 그보다 더 큰 다른 산이 있다고는 생각지를 않았어. 나한테는 그게 전부였거든.     


혼자였지,  난 내가 아는 제일 높은 봉우리를 향해 오르고 있었던 거야. 너무 높이 올라온 것일까, 너무 멀리 떠나온 것일까? 얼마 남지는 않았는데, 잊어버려. 일단 무조건 올라 보는 거야. 봉우리에 올라서서 손을 흔드는 거야, 고함도 치면서. 지금 힘든 것은 아무것도 아냐. 저 위 제일 높은 봉우리에서 늘어지게 한숨 잘 텐데 뭐 

    

허나 내가 오른 곳은 그저 고갯마루였을 뿐. 길은 다시 다른 봉우리로, 저기 부러진 나무등걸에 걸터앉아서 나는 봤지. 낮은 데로만 흘러 고인 바다. 작은 배들이 연기 뿜으며 가고    

 

이봐, 고갯마루에 먼저 오르더라도 뒤돌아서서 고함치거나 손을 흔들어 댈 필요는 없어. 난 바람에 나부끼는 자네 옷자락을 이 아래에서도 똑똑히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 말야. 또 그렇다고 괜히 허전해하면서 주저앉아 땀이나 닦고 그러지는 마. 땀이야 지나가는 바람이 식혀 주겠지. , 혹시라도 어쩌다가 아픔 같은 것이 저며올 때는 그럴 땐 바다를 생각해. 바다, 봉우리란 그저 넘어가는 고갯마루일 뿐이라구.     


하여 친구여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바로 지금 여긴지도 몰라. 우리 땀 흘리며 가는 여기 숲 속의 좁게 난 길. 높은 곳엔 봉우리는 없는지도 몰라. 그래 친구여 바로 여긴 지도 몰라.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작고하신 박완서 작가의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라는 수필이 있다. 꼴찌로 달려가는 푸른 유니폼의 마라토너에게 힘찬 응원을 보내는 내용이다. 선두그룹은 이미 결승선을 통과했고, 관중마저 자리를 뜨고 있음에도 오로지 완주를 위하여 달려가는 꼴찌를 위한 박수갈채가 따뜻하들려오는 작품이다.   

   

대학 졸업 무렵이었다. 하루는 아침에 신문을 펼쳐보곤 깜짝 놀랐었다. 한 면에 가득 찬 광고 때문이었다. “역사는 일등만 기억합니다. 이등은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습니다.” 일등주의를 내세운 광고 문구는 위협적이었다. 곧이어 가족만 빼고 다 바꿔라.’는 상상 불가의 문장까지 등장했다. 일등 경험이 없는 나와 같은 다수에게는 불편한 광고였다.   

  

 하지만 일등주의 덕분인지 해당 광고 기업은 글로벌하게 몸집을 키웠고, 우리 사회도 과거 경험하지 못했던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되었다. 그렇게 한 세대 동안, 최고, 최선, 우월, 으뜸과 같은 단어가 미덕이었다. 다들 그렇게 달려갔다. 그래서 결과는? 행복해졌고, 안전해졌으며, 평화로워졌나? 일등주의 선언 삼십 년. 이제 세상은 우리 사회를 피로사회 부르고  있다.     


 김민기의 <봉우리>는 꼴찌를 위한 응원가다. 1984LA 올림픽이 있었다. 메달은커녕 초반 탈락한 선수들은 일찍 감치 선수촌을 떠나야 . 남은 올림픽 기간을 즐길 수 있는 배려는 없었다. 당시 모 지상파에서 탈락한 선수들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제작되었는데. <봉우리>는 이때 만들어진 노래다. 김민기의 손으로 탄생한 이 곡은 위로와 희망의 찬가였.     

예당초 곡명은 <봉우리>가 아닌 <우리가 오를 봉우리>였다. 1985년 양희은의 <찔레꽃 피면> 앨범에 처음의 곡명으로 수록되었다가, 훗날 김민기가 직접 노래한 앨범에서 <봉우리>제목을 바꿨. 청아한 음색의 양희은과 사유하는 김민기 목소리. 어느 버전 할 것 없이 <봉우리>는 빼어난 곡이다. 특히 무대 위의 배우가 읊조린 듯한 독백은 백미(白眉)가 아닐 수 없다.   


 <봉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몫을 뜻한. 산을 오르는 것은 희망고문일 수 있. 정상을 바라보면서 걷는 것이 얼마나 고되던가. 마음이 저 높은 곳에 가 있으니, 몸까지 힘들어지는 까닭이. 이때 필요한 해결책이 ‘조고각하 (照顧脚下)다, 네 발밑을 보라는 선가(禪家)에서 전해오는 말이다. 실제로 발밑을 보면서 산에 오르면 수월하게 정상에 이를 수 있다.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저 하루살이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시공을 정성껏 살아내는 것 말이다. 거창한 계획보다 하루의 작은 일과가 소중한 법이. 아침에 일어나서 마시는 따끈한 물 한 잔, 의식하면서 식사를 하고, 성실한 일과를 보낸 다음, 해가 저물면 흩뜨려 진 영혼을 기도로 쓰다주는 것. 이 소소한 것들이 우리를 봉우리로 이끌어 줄 것이다.   

   

 삶의 경계마다 성장통을 겪기 마련이다. 학창 시절과 수험생 시절, 군입대와 피 말리는 취준생 시절. 결혼 생활 등. 생의 모든 계절이 순탄치 않다. 산 넘고 물 건너는 수고로움을 마땅히 감내해야 한다. 남의 힘으로 그 순간을 잠시 모면하더라도 결국에는 대가를 치르기 법이니, ‘아픔만큼 성숙한다는 말은 식상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진리다.     


 쑥쑥 자라는 대나무도 성장의 시기별로 마디를 남긴다. 대나무가 거센 바람에도 이길 수 있는 은 마디의 유연과 버팀의 조화로움 때문이.  비록 세파에 흔들거리더라도 대나무처럼 의연하게 서 있는다면 우리에게도 삶의 마디가 자랑스럽게 생길 것이다..   

   

 그러니, 조고각하(照顧脚下), 그저 발밑을 주시하면서 꾸역꾸역 주어진 길을 . 어쩜 그 길이 당신의 ‘봉우리’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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