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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호 Dec 16. 2021

             아내의 독립 전쟁

                         화개의 인생순례기

 #1

아내의 눈빛이 비장하다. 늦은 새벽까지 분주했던 그녀가 이른 아침부터 일찍 일어났다. 오늘은 김장하는 날이다. 며칠 전부터 각종 양념을 준비하고, 도와줄 주변 지인을 찾는 등 바빴던 그녀이다. 결혼 후 줄곧 시어머니, 올케 함께 김장을 했는데, 이번부터는 혼자서 감당하게 되었다. 아내가 주도하는 첫 김장이다.     


 아내의 음식 솜씨는 혼자 먹기 아까울 만큼 훌륭하다. 가끔 의견이 달라서 충돌할 때도 그녀가 식탁에 차려준 음식을 먹다 보면 용서가 된다. 아닌, 용서를 빌고 싶어진다. 오랫동안 산속에서 수행한 도인(道人)이 따뜻한 밥 한 공기와 된장국에 무너져 하산했다는 말이 있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가끔 지인의 집에서 요리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면 아내는 물 만난 고기처럼 주방을 장악한다. 잠시 후, 모든 이들의 기대치를 훌쩍 넘는 요리가 등장하곤 했다.  

   

#2

 요리와 조리에 자부심이 가득한 아내에게도 김장은 두려운 것이었다. 결혼 후 매년 시어머니와 함께 김장을 했었다. 아무래도 경험이 풍부한 어머니가 메인 세프가 되었고, 아내는 수육을 삶고 김치통 닦는 보조 세프 역할에 머물렀다. 아내가 직접 김장을 해도 충분히 잘 해낼 것 같았건만, 정작 그녀는 자신 없어 했다김장을 겁내는 이유는 번거로움과 더불어 홀로서기에 대한 부담 때문일 것이다.     


 김장을 앞 둔 주부들에게 식구들의 지원과 협조는 필수 아이템이다. 김장은 제사만큼이나 가족 공동체의 힘이 검증되는 행사이기도 하다. 그래서 김장 때면 집안의 남자들은 공손한 자세가 된다. 그저 김장을 주도하고 연출하는 그녀들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 집안의 여성들이 아웅다웅 모여 김장을 할 때면, 고래고래 소리치던 가장(家長)도 고무장갑 끼고 다소곳이 서 있어야 했다. 중간에 옛슈 ~ 맛이 좀 어떠요하면서 그녀들이 김치 한 쪽을 찢어 줄 때까지 말이다.     


#3

  해마다 김장철이면 아내와 어머니, 여동생이 함께 김치를 담았다. 물론 그날은 내게도 바쁜 날이다. 전날부터 절인 배추 옮기랴, 아침 일찍 아내님을 모시고 어머니 집으로 가랴 분주했다. 도착하면 어머니는 먼저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 탓에 김장하는 날 아침은 늦으면 안 된다는 부담이 컸다. 일찍 주무시는 어머니와 늦게 잠드는 아내와의 시간 간격은 좁혀지지 않았다.     


김장이 시작되면 어머니의 지휘 속에 아내와 여동생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나 역시 배추를 나르고 양념을 버무리는 등 눈치껏 일했다. 간혹 김장 중에 그녀들이 나에 대한 근거 없는 험담을 경계하면서 말이다. 김장이 끝난 후에 들었던 어머니가 그러시던데~”라거나, 에미가 그러더라~” 따위의 말에 흥분할 나이가 지나고 있음이 다행이다.       


 새 김치가 담긴 통을 김치 냉장고에 무사히 입고시키고 나면, 곳간에 쌓인 쌀가마를 바라보는 농부의 마음이 된다. 이웃 집을 다니면서 김치 한, 두 포기에 감사의 마음을 담아 드린다. 드디어 김장의 모든 전례가 끝났다. 김장과의 전쟁을 끝낸 아내는 거의 혼절 직전이다. 이럴 때면 연로하신 어머니 건강도 은근히 염려된다. 남편이자 아들인 나는 그녀들에게 괜히 미안해진다. 쓰러질 듯 위태롭던 아내가 다시 힘을 낸다. 늦은 저녁까지 김치통을 닦고, 냉장고를 정리하는 아내는 아마존의 여전사 원더우먼이었다.

 

#4

 팔순이신 어머니께서는 몇 해 전부터 김장을 벅차하셨다. 복용하는 약봉지가 관절, 심장, 혈액순환, 위장 등으로 늘어나면서부터였다. 어머니의 몸을 봐서라도 김장을 포기하던지 일감을 대폭 줄여야만 했다. 작년, 어머니께서 김장을 끝내시면서 아이쿠~ 내년부터는 따로 해자구나. 에미 솜씨가 좋으니 충분히 잘 할거야라고 말씀하셨다. 언제가 닥칠 독립이었다. 아내도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었다. 눈치를 보니 어느 정도 자신 있어 하는 눈빛이었다.    

  

 올 해,

 아내는 김장 독립전쟁을 잘 치렀다. 물론 몇몇 것들은 어머니로부터 조달을 받았지만 말이다. 아내는 친한 동네 언니 한 분과 김장을 했다. 그것도 식구 없는 한낮 평일에 말이다. 그래야 집중이 된다고 했다. 아내가 김장한 날, 나는 직장에서도 고춧가루, 배추, 각종 양념 등과 한판 뜨고 있을 그녀를 자주 생각했다. 아들과 딸도 이 전쟁에 참전하지 못한 채, 전황만을 궁금해했다. 드디어 늦은 오후에 가족 단톡방에 사진 몇 장이 올라왔다. 예쁜 김치 포기들과 김치통이었다. ~ 김장과의 전쟁이 끝난 것이다.      



#5

 저녁에 식구들이 들뜬 표정으로 식탁에 모인다. 얼굴빛이 창백하다 못해 배추처럼 푸르러진 아내가 새 김치를 놓는다. 김장 독립 기념으로 새롭게 구입한 김치냉장고에서 김치가 나온다. 배추에 버무려진 붉은 양념과 젓갈 향이 알싸하다. 아내가 애써 담근 김치를 먹어본다. 어찌 맛이 없겠는가? 배추의 적절한 사각거림과 알맞은 양념의 향연. 게다가 일품 수육까지 말이다. 아이들도 맛있다를 연발한다. 그제야 배추보다 더 절여있던 아내의 얼굴이 조금 살아난다.      


 진짜?”, “갈치젓을 괜히 많이 사용해서 맛이 별루일 것 같던데..” 아내는 여전히 의심스런 눈빛으로 식사를 하는 우리를 쳐다본다. 그러면서 내년부터는 김장할 배추 포기와 장소를 다시 생각해 봐야겠단다. 어머니 집 김치보다 못하지?”라고 그녀가 묻는다. 나는 아니 ~ 우리 집 김치가 더 맛있는데라고 말한다. 절인 배추마냥 풀이 죽어있던 아내가 그래?”하고 싱싱한 배춧잎처럼 활짝 웃는다. 허무한 립서비라고 오해하지 마시라.  언제나 우리 집(?) 김치는 맛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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