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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호 Jan 06. 2022

안녕하세요. 베토벤 음악감상실

#1

눈이 내립니다. 퍼붓는 눈발이 허공에 가득합니다. 하얀 세상을 헤집으며 베토벤 음악감상실로 가는 길입니다. 눈 때문일까요? 금남로 8차선이 환합니다. 이런 날, 집에만 있다면 서운한 일입니다. 고소한 커피와 함께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지요. “, 청승?”이냐며 비아냥대도 좋습니다. 위기 한 번 잡아보는 겁니다. 우산을 받쳐 들고 눈길을 조심하면서 베토벤 음악감상실로 찾아갑니다.

 

 건물에 들어서 우산을 접습니다.  눈이 우수수 떨어지네요. 설레이는 마음으로 승강기 6번 단추를 누릅니다.  베토벤 음악감상실 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아~ 투명한 유리창과 빛바랜 의자와 탁자가 오래전 그대로입니다. 마치 젊은 날로 시간 이동을 한 것 같네요. 늘 익숙했던 창가 옆 테이블에 앉습니다. 내리는 눈 사이로 학 모양의 대학건물과 아시아문화전당이 보입니다. 수도원처럼 고요한 공간입니다.  

   

#2

 텅 빈 공간 사이로는 ‘멘델스존의 무언가’ 피아노 선율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때 사장님께서 ‘누구신가?’ 하는 얼굴로 나옵니다. 나는 “안녕하세요..”라고 짧게 말할 뿐, 정겨운 말을 건네지 못합니다. 오래전 단골이었고 그나마 절반의 얼굴이 마스크로 가려졌으니 몰라볼 것입니다. “아. 오랜만에 오셨소. 잘 사셨소. 눈이 무지하게 오는디 반갑네요”라는 사장님 말이 포근합니다. 아직껏 기억하시다니 감사했습니다.    

 

 사장님은 도심 속 여성 수행자입니다. 변함없이 눈이 맑습니다. 법정스님과 이해인 수녀님도 광주에 오면 이곳을 찾곤 했는데, 아마도 사장님의 기운 때문일 것입니다. 마음 맑고, 귀 밝은 이들의 쉼터였지요. 대통령이 여러 번 바뀌고, 도청과 분수대도 사라졌고, 땅 밑으로 지하철이 다니지만, 베토벤 음악감상실은 세월을 이겨내고 있습니다.      


 라흐마니노프 7번이나 슈베르트 아르페지오 소나타를 듣고 싶네요라고 말합니다. 흐린 날이면 듣기 좋은 곡입니다. 사장님은 한동안 앨범을 찾더니 라흐마니노프는 DvD로만 있네. 어쩔까요?”하며 웃습니다. 하긴, 이런 날 슈베르트 좋지요라고 하시네요. 내가 앉은 테이블로 오시는 사장님의 얼굴이 환합니다. 시간이 잘 숙성된 감상실은 세월의 기품이 스며있습니다. 사장님도 그렇습니다.

   

   

#3

 이제는 법사님도 안 오세요. 다른 곳으로 이사 갔다고 하던데요.라며 사장님이 말을 건넵니다. IMF로 세상이 흔들거리던 시절, 이곳에서 법사님을 자주 만났습니다. 법사님은 나를 포함한 몇몇 인연 있는 이들에게 수행과 삶에 대하여 말씀을 해주셨지요. 쿤달리니와 수행의 증세, 바른 구도에 대한 말씀은 진리의 비밀을 여는 열쇠였습니다. 나는 주말마다 산행하면서 법사님의 말씀을 녹음된 테이프를 듣곤 했습니다. 그럴 때면 무등산도 히말라야였습니다.


 언젠가 법사님께서 여기 베토벤 음악감상실은 고급영혼들이 드나드는 곳이야라고 하셨지요. 덕분에 덩달아 나도 고급영혼이 되었습니다. 법사님은 내 영혼에 자양분을 듬뿍 주셨습니다. 그분의 형형한 눈빛을 보면서 ‘요가난다, 아르주나, 라마나 마하리쉬 ,달라이라마, 예수 그리스도, 밀라래빠 등. 빛나는 영혼의 스승들을 만났습니다. 이곳은 진리의 학당이었습니다.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 소나타가 조용히 끝났습니다. 여전히 손님은 나밖에 없습니다. 사장님은 이런 날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은 어떠냐며 음악을 틀어줍니다. 창밖을 보니 어둠이 가까이 있습니다. 검푸른 허공이 하얀 눈을 흡입하고 있습니다. 사장님도 내리는 창밖을 말없이 바라봅니다. 눈 쌓인 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4

 관옥, 일부 목사님도 잘 알지라?라고 사장님이 묻습니다. ~, 기억력이 대단 하네요. , 요즘도 자주 찾아뵈고 있습니다.” 웃으며 말합니다. 내 삶의 뒷이야기를 꽤나 아시는군요. 그리고 <풍경소리>에 대한 이야기도 나눕니다. 나와 사장님은 이 책의 독자입니다.     


 이제는 어둠이 눈을 토해내고 있습니다. 비창 교향곡 의 마지막 악장은 언제나 쓸쓸합니다. 일어설 때가 되었네요. 커피잔을 주방으로 가져다 놓습니다. 사장님. 예전에 이곳에서 일했던 루시아 씨와 자주 놀러 오던 아가씨들 기억나세요?”라고 묻자, 사장님은 알다마다 아마 지산동 성당을 다니던 아가씨들이었지라며, 그때가 기억난다는 듯 미소를 짓습니다. 공간이란 추억의 저장소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5

 몇 해 만에 들려본 베토벤 음악감상실인가요. 이제는 광주의 유일한 고전음악실,  무등산이 환히 보였던, 눈 맑은 이들의 쉼터, 영혼의 보금자리. 또다시 눈이 온다면 이곳을 찾을 겁니다. 가끔 얼굴을 내밀더라도 베토벤 음악감상실과 사장님은 변함없이 반겨주겠지요. 아 참! 아가씨 시절, 친구 루시아를 만나기 위해 자주 찾았노라며 이곳과의 인연을  강조하는 아내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눈 내리는 날, 다시 올께요. 안녕~    

 

  좋은 음악을 들으면 / 너도나도 말이 필요 없지

   한 잔의 차를 사이에 두고 / 강으로 흐르는 음악은 / 곧 기도가 되지

   사랑으로 듣고 / 사랑으로 이해하면 / 사랑의 문이 열리지

   낯선 사람끼리도 / 금방 벗이 되는.../ 음악으로 가득한 집/

   여기서 우리는 / 우정의 향기를 날리며 / 고운 아픔으로 하나가 되지.”

                                -이해인 <베토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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