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이를 과제가 아닌 동반자로 인식하기.
언제 갑자기 이런 깨달음이 왔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아이들을 데리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던 것 같다. 직장에서 내가 사는 동네로 넘어오는 다리 위에서 오후 5시경 햇살이 택시 창문에 쏟아졌다.
그때 택시 뒷좌석에 함께 앉아있던 둘째 아이가 내 무릎 위에 올라와 내게 안겼다. 마주 안은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니 기다란 아이의 속눈썹과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솜털이 보였다.
‘휴...’
엽서 같은 장면을 보고 잠시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그런데 그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나는 이제 죽을 때까지 이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인생이 된 거구나’
지난 몇 년간 나는 마치 과제를 처리하듯이, '언젠가는 끝나겠지'라는 마음으로 달려왔다. 아이를 낳고 키운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전혀 새로운 경험이자 엄청난 과업이었고, ‘이 고비만 넘기자’며 살았다.
분유를 먹이며 ‘이제 곧 죽을 먹겠지’라고 생각했고, 죽을 먹일 때는 ‘곧 밥을 먹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기저귀를 떼면 ‘이제 대소변을 가리겠구나’라고 생각했고, 혼자 화장실을 가는 첫째를 보며 ‘이제 잘 때도 기저귀를 안 해도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늘 다음 단계를 생각하며 솔직히 이전보다 더 내가 자유로워질 것을 기대했다. 그런데 매일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 자유로움을 누리려면 생각보다 오래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앞으로 몇십 년은 이렇게 아이들을 맞으러 가야 한다 것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 외에 누군가를 계속해서 챙겨야 한다는 것이 요 며칠 참 ‘힘들다’고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택시 뒷좌석에서의 그 엽서 같은 그 장면을 보며, 나는 내가 앞으로 그 힘듦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어렴풋하게 느낀 것 같다.
나는 그 수고로움을 이제 일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됐다.
알고 시작을 했든 모르고 시작을 했든 아이를 낳는 순간, 이미 그 삶은 시작됐다. 이제는 담담하게 당연함으로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렇게 살다가 가끔 다른 일상이 펼쳐지면 그때는 소풍처럼 그 순간을 만끽하게 되지 않을까. 단풍놀이에 신난 어머니들처럼 말이다.
그러자 아이들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전에는 아이들이 내가 무엇인가 처리해줘야 하는 대상이었고, 좋은 모습만 보여야 하는 부담스러운 대상이었다면 이제는 나의 일상을 함께 살아가는 인간 그리고 동반자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싫든 좋든 이 아이들도 '나'라는 사람을 엄마로 받아들이고, 삶의 한 부분으로 수용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가족인 것이다. 그러자 한결 가벼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한때 나중에 아이가 생기면 다른 무엇보다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살아보니 행복도 능력이다. 늘 불만투성이고, 쫓기는 사람이 있는 반면 같은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고,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런 능력은 대체로 부모를 보며 갖게 된다. 늘 쫓기듯 사는 부모님을 보며 인생이 재밌다고 느낄 수 있는 자녀는 많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아이들을 과제로 여기면 아이들은 늘 쫓기는 엄마를 보며 인생이 괴롭다고 느낄 거다.
그래서 앞으로 나는 더 즐거우려고 한다. 거실에 음악도 틀고, 좋아하는 책도 마구 읽을 거다. 그리고 힘들 땐 가족에게 의지도 할 거다. 모든 책임을 다 내가 짊어지지도 않을 거다. 엄마 노릇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다. 슬픈 엄마가 되지 않겠다는 거다.
어제는 내가 아이에게 습진으로 붉어진 내 손가락을 보여주며 말했다.
“저, 의사 선생님, 저 여기 손가락이 아파요. 치료해 주세요.”
그러자 아이가 까르르 웃으며 달려왔다. 자기 존재감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아, 그러시군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가 치료해 줄게요”
그러더니 아이는 정성스럽게 연고를 가지고 와 열심히 발랐다.
“감사합니다. 이제 괜찮아요”
내가 말하자 아이가 뿌듯한 듯 웃었다.
종종 나의 작은 상처를 치료받는 정도의 의지는 해야지. 우리는 일상을 함께 하는 동반자이니까. 그리고 인생의 여정을 함께 하는 인격체니까.
그런 마음이면 비록 엄마지만 나도 조금 더 가벼운 일상을 살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