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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꼬르륵 Sep 08. 2020

남편이 속옷도 못 입고 젖병을 씻는다.

7개월 차 아이와 뱃속의 아이 키우기

임신을 하고, 호르몬의 영향인지 요즘 자주 기분이 다운된다. 첫째 아이의 웃음을 보면 따라 웃다가 도 이유식을 잘 먹지 않거나 잠투정을 하거나 장난감을 떨어뜨려서 울면 전처럼 웃어넘겨지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나고, 얼굴에 색을 잃어간다.


아침 8시에 집을 나선 남편이 저녁 8시쯤에 돌아오면 나는 기력이 떨어진 상태다. 애만 챙겨야 하면 그나마 마음이 가벼울 텐데 이제 9주 차가 된 뱃속의 아이를 위해서라도 나도 잘 챙겨 먹어야 하는 게 또 일이다. 거기다 똥을 싼 아이의 엉덩이를 씻기고, 기저귀를 갈고, 이유식을 먹이고, 이유식이 묻은 옷을 간단하게 손빨래해서 두고, 분유를 타 먹이고, 재우고 그러다 저녁 8시에 남편을 보면 뭐랄까... 반갑게 맞을 힘이 없다.


오늘도 남편은 그런 내 눈치를 보았다. 내 얼굴 표정과 말투에 눌려 "나, 최대한 빨리 씻고 나올게" 하며 욕실로 들어갔다. 그 사이 나는 아이에게 줄 분유를 태워오면서 미처 씻지 못한 젖병들이 쌓여있는 것을 보았고, 남편이 샤워를 마치고 욕실을 나서는 소리를 들은 나는 "여보, 젖병 좀 씻어줘"라고 말했다. "응, 알았어" 그러고 한참. 아이가 스르르 잠이 들기 시작해 그제야 주변을 돌아봤는데 헐. 남편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을 채로 젖병을 씻고 있는 게 아닌가.


아니, 옷은 입고해도 되는데. 그렇게 급한 건 아닌데. 그렇게 내 눈치가 보였나...


남편의 뒷모습이 거참 웃기기도 하면서 짠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그러면서 '그래, 나만 고생하는 거 아니지. 지금 다 같이 고생하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며 짜증 났던 마음이 한결 누구러졌다. 남편 역시 첫째 아이가 태어나고,  둘째까지 임신한 뒤 아침밥은 먹지 못하고, 저녁도 직접 차려먹는 삶을 살고 있다.


언젠가 새벽에 울던 아이를 어르고 재우느라 잠을 설치고 출근한 남편에게 '당신도 고생이 많아. 힘내. 오늘 저녁은 내가 차려 놓을게'라고 톡을 보낸 적이 있다. 그러자 남편은 '여보, 저녁은 내가 차려먹어도 되니까 신경 쓰지 마. 내가 바라는 건 당신이 스트레스 안 받고 웃었으면 좋겠다.'


순간 울컥하다가도 '아, 내가 우울한 얼굴, 태도로 대하면 이 사람도 힘들구나' 싶었다. 그래서 요즘은 남편에게도 밝은 모습을 보이려고 애쓰는 중이다. 이런 감정은 이렇게 글로 풀어놓고. 나 역시도 어떤 면에서는 남편 눈치를 보며 내 감정을 컨트롤 중이다. 그 와중에 아이는 점점 좋고 싫음이 확실해지고, 요구사항이 늘고 있다. 눈치 안 보는 유일한 1인이다. 이렇게 부모가 되고, 아이는 자라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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