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야, 문제는 체력이야

아무 노래 - 지코

by 꼬르륵

아무 노래나 일단 틀어

아무거나 신나는 걸로

아무렇게나 춤춰

아무렇지 않아 보이게

아무 생각 하기 싫어

아무개로 살래 잠시

(지코, 아무노래)


때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싶을 때가 있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순간,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며 그저 움직이고 싶었다.

지난 11월, 회사의 재정 위기는 가속화됐다. 9월, 10월의 월급은 전혀 나오지 않았고, 이미 6월부터 임금이 30~40% 삭감된 상황이었다. 앞자리가 바뀐 월급을 보며 비로소 조직의 위기가 실감 났지만, 그렇다고 회사를 떠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매일 아침 오리 떼처럼 지난밤 가족과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함께 커피를 사러 가던 선후배가 아직도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었다. 우리의 프로그램을 듣는 청취자들도 있었다. 제작 인력의 부재로 하루에 수십 장의 원고를 기계처럼 쓰고 방송 출연을 직접 하면서도, 오히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늘었다는 데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2022년 8월부터 시작된 제작비 삭감과 2년에 걸친 재정 위기가 지속되자 우리는 지쳐갔다. 지난밤 걱정에 잠을 설쳤을까. 진하게 내려앉은 선배들의 다크서클과 부쩍 늘어난 본부장님, 실장님들의 흰머리를 보며 사무실은 점점 더 고요해졌다.

급기야 누군가 사무실에 앉아있는 직원들이 패잔병 같다는 자조 섞인 말을 했다. 처음 제작비가 삭감되었을 때는 그래도 서로에게 커피를 사며 사과나무(우리는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던 스피노자처럼 끝까지 방송을 하자는 의미로 방송을 사과나무라고 하곤 했다.) 심으러 가자고 했었는데, 이제는 웃음기마저 사라져갔다. 다들 예민해져 갔고, 서로가 그 예민함을 이해하기에 더 이상 함께 무언가를 하러 가자고 하지 않게 되었다.

11월 즈음부터 나는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장 본 물건의 포장지를 뜯는데 좀처럼 쉽게 뜯기지 않았다. 시름하다가 갑자기 화가 치솟았고, 나도 모르게 물건을 바닥에 던지며 외마디 욕설을 툭 내뱉고 말았다.


'나 뭔가 이상하다.'


잠시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무시했다. 그리고 어느 날, 다시 한번 힘든 시기지만 내 옆자리 동료와 주변 사람에게 긍정 기운을 전파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아침부터 방송 원고를 폭풍 작성하는데, 연달은 회의 참석 때문에 다른 코너 원고도 네가 작성해줘야겠다는 부장님의 연락에 왈칵 화가 섞인 눈물이 차올랐다.

마흔 언저리의 나이인데 사무실에서 이게 무슨 창피인지. 절대 티 내지 않으려 할수록 얼굴은 더 울그락불그락해지더니, 급기야 옆자리 선배님이 눈치를 챘다. 오가는 넋두리 속에 피차 힘든 시기에 말하지 않으려 했던 나의 힘듦을 선배에게 늘어놓고 있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저 멀리 다가오시는 부장님께 선배가 장난스럽게 한마디 툭 던졌다.


"아, 부장님, 얘 원고 좀 그만 쓰게 해요. 부장님이 좀 더 쓰시던가요."


술자리에서 부장님과 멱살까지 잡아봤다던 사이시라더니 옆자리 선배님의 말이 거침없었다. 그 말을 들으며 다시 서러움에 눈까지 벌게지는데 부장님이 멋쩍은 듯, 다 안다는 듯 뒷자리에 털썩 앉으시며 하는 말.


"너 같은 애들은 운동을 해야 돼."


진짜 어의가 없어서 설움이 그냥 쏙 들어가버렸다. 하긴 어떤 일이든 대수롭지 않게 말씀하시는 부장님은, 언젠가 아이들이 밤에 잠을 늦게 자서 정말 힘들다는 내 넋두리에 '잘 시간에 애들한테 밥을 먹이라'고 하셨다. 또 진로체험을 하러 온 고등학생에게는 "너희 아빠 한 달에 얼마 버냐? 너 반에서 몇 등하냐?"라고 서슴없이 물으시고는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며 "돈 준 사람은 기억한다더라"고 하시며 만 원을 주고 사라지기도 하셨다.

예상할 수 없는 말로 상대방을 어이없게 만들어 웃게 하시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중요하고 맞는 말씀을 하시는 분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요즘 '나 같은 애들은 운동을 해야 한다'는 부장님의 말씀이 희한하게도 맞는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바보야, 문제는 체력이야.'


1992년 미국 대선에서 빌 클린턴 캠프는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슬로건으로 당시 미국 국민의 불안 심리를 정확하게 짚어냈다. 경제 문제야말로 모든 불안의 근원이라는 이 메시지는 클린턴을 대통령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3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우리 시대의 불안에 대한 또 다른 답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체력'이었다. 나이 들수록 회복이 더딘 체력, 점점 버거워지는 업무량, 여기에 가중되는 육아와 가사 부담까지. 체력이 떨어질수록 불안은 더 커지고, 불안이 커질수록 밤잠을 더 설치게 된다.

결국 나는 몇 주 전부터 헬스장을 등록하고 근육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운동을 하던 어느 날 갑자기 이런 깨달음이 왔다.

'아, 그때 내가 그 위기를 담을 정신적 여력이 안 됐던 거구나. 몸이 안 되니까 정신도 무너진 거구나.'

상담전문가 이호선 교수님이 언젠가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불안과 우울을 느끼는 중년에게 일단 무조건 냅다 뛰라고 이야기를 하신다고. 사실 우리가 살면서 힘든 상황은 항상 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힘듦을 느끼고 불안을 느끼기 시작한다면, 사실 진짜 문제는 바로 내 체력일 수 있다.

‘아무 노래나 일단 틀어, 아무거나 신나는 걸로, 아무렇게나 춤춰’. 빠르게 굴러가는 러닝머신을 힘차게 내달리는 내 두 다리의 속도에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이 노래는, 정말 황당하리만큼 나의 불안을 해소시킨다.

마음이 힘들다면 일단 나의 몸을 잘 보살펴보자. 잘 먹이고 잘 재우고, 그리고 냅다 뛰자. 그리고 뛰면서 신나는 음악을 들어보자. 신기하게도 나의 정신력의 그릇이 조금씩 넓어지는 게 느껴진다. 정말 해보면 안다.

여전히 상황은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나는 처음보다 무게를 이겨낼 힘이 생기고 있다. 우리 모두가 겪고 있을 이 시대의 불안. 그 불안을 이겨내는 힘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는지도 모른다. 바로 우리의 몸, 우리의 체력 안에.


글속에 등장하는 노래

-아무 노래(지코)

https://www.youtube.com/watch?v=UuV2BmJ1p_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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