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시작

by 꼬르륵

모든 것은 그 골목에서 시작되었다.


"제발. 내가 너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잖아."

'아니, 왜 이 골목에서 저래.'

울먹이는 여자아이와 냉담한 남자아이. 전혀 궁금하지 않은 남의 연애사였다.

조금 전 미나는 어쩔 수 없이 이 골목에 들어섰다. 평소 가던 편의점으로 가는 길이 공사 중으로 막힌 상황. 집으로 다시 갈까, 생각도 했지만 조금 전 현관문 앞에서 엄마 아빠가 다투는 소리를 듣고 말았다. 그것도 미나를 수학 학원에 보낼지 말지를 두고 일어난 다툼 같았다.

"아, 진짜. 내가 널 안 좋아하는데 어떻게 하라고"

언뜻 보기에도 학생인 것 같이 보이는 남자아이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미나는 빨리 좀 끝내고 길 좀 비켜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용히 지나가면 모를 수도 있을 거야'. 저 멀리 가로등이 있었지만,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면 모르는 척 빠져나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자 여자아이가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근데 너 이렇게 헤어지자고 할 거면서 어제 내 선물은 왜 받은 거야?"

몇 걸음 더 앞서가 보니 여자아이가 입은 교복은 미나가 입은 교복과 같은 교복이었다. '설마, 우리 학교 애인 거야?' 두 아이가 서 있는 곳과 거리가 좁혀질수록 미나가 느끼는 민망함은 더 커지기 시작했다.

"뭐? 이 옷? 뭐, 뱉으라는 거냐? 야, 가져라. 가져. 지가 사진 찍으라고 입혀놓고는."

갑자기 남자아이가 웃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놀란 미나는 순간 이대로 직진해도 될지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번 가속이 붙기 시작한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런데 털썩.

"아니, 그게 아니라... 제발. 나 어제 너랑 찍은 사진도 올렸는데."

갑자기 여자아이가 무릎을 꿇고 울기 시작했다.

미나는 이제 다섯 발자국만 더 걸으면 모른 척 지나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자아이가 무릎꿇는 바람에 미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멈춰 섰다. 그리고 인기척을 느낄 새도 없이 다투던 두 아이가 마침내 미나의 얼굴을 봤다. 가로등 불빛 아래 무릎을 꿇고 있는 여자아이의 얼굴이 드러났다.

최수빈이었다.

분명 최수빈이었다. 자타공인 SNS 스타. 얼굴도 예쁘고 무엇보다 패션 센스도 좋아서 학교에서도 유명했다. 연예인을 하고 싶어 한다는 소문이 있었고, 늘 옷을 잘 입는 남자친구와 다녀서 선망의 대상이 되곤 했다. 이번에 미나와 같은 반으로 배정되면서 미나와는 아직 말을 해보지 않았지만 얼굴은 분명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최수빈이 무릎을 꿇고 헤어지지 말자고 매달리고 있다? 그런데 최수빈도 마주친 미나의 얼굴을 알아보는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볼 수 없겠지. 제대로 쪽팔린 듯한 표정이 어쩐지 분노로 뒤바뀌던 순간, 당황한 미나가 말했다.

"내가 지금 이 길을 지나가야 해서..."

망부석이 된 남자아이 뒤로 재빨리 지나친 미나가 한참을 걷는 동안에도 어쩐지 저 멀리 두 아이가 미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에 미나는 뒤통수가 뜨거웠다.

'아니, 왜 하필 이 골목에서 저래.'

자꾸만 최수빈의 얼굴이 떠올랐다.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던 그 눈이. 미나가 무심코 발로 길가의 돌을 걷어찼다.

"딱!"

깨지는 소리. 작은 문구점의 진열대에 플라스틱 장난감이 바닥에 꼬꾸라져 있었다.

'정말 오늘 왜 이러는 걸까!!!'

미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조심스럽게 주변을 돌아봤다. 다행히 미나가 장난감을 부신 걸 본 사람이 없어 보였다.

'빨리 여길 떠야겠다'

미나가 일어나 발길을 돌리려던 그때

"학생!"

앙칼진 목소리가 미나의 뒤통수에 꽂혔다. 미나는 한숨을 내쉬며 돌아봤다. 그러자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 알 수 없는 할머니 한 분이 서 있었다. 파마한 머리에 얼룩진 앞치마를 두르고, 낡은 운동화를 신은 할머니가 수레에 종이 상자를 가득 실고 문구점 입구에 서 있었다. 손에는 반쯤 비닐 벗겨진 돋보기 안경을 들고 있었다.

"아이고, 이게 우리 집에서 제일 잘 나가는 장난감인데 박살을 내놨네. 이렇게 다 부셔놓고, 그냥 내빼면 어떻게!"

할머니의 목소리에 경상도 사투리가 섞여 나왔다.

미나가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말로만? 요새 애들은 맨날 죄송합니다만 하고 튀더라. 나 그거 안 먹혀."

할머니가 곧바로 받아쳤다. 아무래도 장난감을 변상하라는 말인 것 같았다. 미나는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허둥지둥 지폐를 찾았다. 미나의 바쁜 손가락 움직임에 이천 원이 주머니 바깥으로 빼꼼 머리를 내밀었다. 슬쩍 내려다본 미나는 다행이다 싶었다.

"아니요. 제가 망가뜨렸으니까 제가 살게요. 얼마 드리면 될까요?"

"오만 원"

"네? 오만 원이요?"

미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때마침 할머니가 들고 있는 장난감 인형의 팔 하나가 덜렁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 플라스틱 덩어리 한 개에 오만 원? 아무래도 호구가 될 것만 같은 불안함에 미나는 안 되겠다 싶어 목소리에 한껏 힘을 줘 말했다.

"저, 할머니, 제가 장난감 부서뜨린 건 죄송한데요. 저 장난감 하나에 오만 원은 좀... 가격표 좀 봐도 될까요?"

"가격표는 무슨, 다 내 머릿속에 있는데. 야, 나도 장사가 안 되서 죽겠는데 이런 거라도 팔아야제. 내가 안 불렀으면 도망가려고 했지?"

할머니가 허리에 손을 얹고 미나를 쏘아봤다. 손등에는 검버섯이 송송 박혀있었다.

도망가려고 했던 건 사실이라 미나는 말문이 막혔다. 이번 달 용돈은 진작에 다 썼고, 남은 건 주머니 속 이천 원인데, 엄마에게 오만 원을 달라고 하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할머니, 죄송한데요. 제가 지금 이천 원밖에 없거든요. 제가 다음에는 정말 조심할게요. 이천 원만 받아주시면 안 될까요?"

미나가 인생에서 가장 간절한 표정으로 할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안 되지. 나도 먹고 살아야 되는데."

무 자르듯 단칼에 거절하는 할머니의 말만 돌아왔다. 할머니가 한숨을 푹 쉬더니 주름진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아이고, 요새 장사가 안 돼서 원... 편의점들이 다 먹어버려서 우리같이 구멍가게 하는 사람들은 다 죽게 생겼어."

그러다 잠깐 고심하는 듯하던 할머니가 미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했다.

"그러면 노동으로 갚아. 내가 이천 원도 안 받을게. 그렇게라도 할래? 요새 일손 구하기도 힘든데."

엄마에게 오만 원을 달라고 하지 않아도 된다면, 이천 원이라도 아낄 수 있다면...

"네..."

"벌 건 아니고, 우리 가게 뒤에 쌓여있는 상자들을 다 펴서 수레에 담아주면 돼. 나 따라와. 아이고 무릎..."

할머니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게 뒤로 걸어갔다. 무릎을 살짝 절뚝이는 할머니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펼쳐지는 상자들의 마당. 그곳엔 언제부터 쌓인 건지 알 수 없는 종이상자들 수십여 개가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젊은 친구는 뭐 이거 한 시간이면 다 하지. 나는 무릎이 아파서 이거 하나 펴는 데도 한참 걸리는데. 다 하면 불러."

할머니가 안으로 들어가면서 중얼거렸다.

"아이고, 이 일도 언제까지 할 수 있을런지..."

할머니가 사라지자 남겨진 문구점 뒷마당에 적막이 둘러쌌다.

박스가 뒹굴고 있는 뒷마당 뒤로 저 멀리 주택가와 아파트의 불빛이 반짝거렸다. 어쩐지 동화 같은 그 불빛들을 보고 있자니 미나는 정말 한 시간이면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가방을 벗어 벽에 무심코 세운 뒤 미나는 상자를 하나씩 집어 상자에 붙은 테이프를 떼고 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개의 상자를 뜯어내자 살짝 땀이 나기 시작했다. 아빠와 엄마의 다툼, 학원비, 그리고 최수빈까지. 하지만 단순 노동을 하다 보니 신기하게 미나는 마음이 편해졌다. 복잡했던 마음이 잠시 가라앉는 듯했다. 그러다 잠깐 시계를 보니 8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9시까지는 집에 가야 돼.'

미나는 바쁘게 움직이던 손의 속도를 붙여 상자의 테이프를 뜯었다. 마지막 상자까지 수레에 쫙쫙 펴고 이제 할머니에게 어서 빨리 알려야겠다고 돌아서던 찰나,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 할머니가 서 있었다.

"역시, 금방 하네. 나 같으면 허리 아파서 반나절 걸릴 일을. 중간에 빼먹고 도망갈 줄 알았더니 이건 또 다 했네."

할머니가 좋아하며 미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할머니 손에서 파스 냄새가 났다.

"저... 이제 가봐도 될까요?"

미나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미나의 얼굴을 유심히 보더니 말했다.

"야, 있다 가. 내가 뭐 하나 줄 거 있어."

할머니를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형광등 불빛 아래 낡은 진열대와 먼지 쌓인 문구들이 보였다. 할머니는 계산대 뒤 서랍을 열더니 한참을 뒤적이다가 노트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다른 문구들처럼 선반에 진열된 게 아니라, 따로 보관해둔 것 같았다.

"이거."

할머니가 노트를 내밀면서 미나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순간 장난기 가득하던 할머니의 눈빛이 묘하게 진지해졌다.

"옛날에... 그래, 아주 옛날에 누가 맡겨놓고 안 찾아간 거야. 근데 그냥 버리기는 아까워서 갖고 있었는데, 오늘 보니까 네가 쓰면 되겠다 싶더라고."

노트 표지에는 먼지가 살짝 쌓여있었다. 할머니가 앞치마로 슥슥 닦아내더니 미나의 손에 쥐어줬다.

"요새 애들은 다 핸드폰에다 뭐 쓰고 그러던데, 너는 이거에다 네 하고 싶은 거, 네 속에 있는 거 다 써봐라. 뭐든지 좋으니까."

할머니의 목소리가 묘하게 낮아졌다.

"근데 말이야..."

할머니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미나의 어깨를 톡톡 쳤다.

"함부로 쓰면 안 된다? 쓸 때는 진짜 네가 원하는 게 뭔지 생각하고 써야 돼. 알았제?"

'쳇. 노트 하나 주면서 무슨 훈계까지.' 하지만 미나는 내색하지 않고, 그저 감사하다고만 했다.

"그래그래. 잘 쓰고."

가게 문을 나서는데, 뒤에서 할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아, 맞다. 다음부터 여기 지나갈 일 있으면 장난감 조심하고!"

그리고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

"이번 애는... 잘 쓸 수 있으려나..."

그렇게 노트를 받아 들고 다시 돌아오는 골목길에서, 문득 미나는 의문이 들었다. 이 골목에 문구점이 언제부터 있었던 걸까? 돌아오는 길, 최수빈은 이제 없었다. 다행이었다.

"띠띠띠 삐리리리릭-"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에 들어서자 사방이 깜깜했다. 아빠의 신발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어딘가 나간 듯했다. 엄마는 일찍 잠이라도 든 걸까. 부엌을 지나 조용히 방으로 향하는데, 식탁에 앉아있던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미나. 너 어디서 뭐 하다가 이제 들어와?"

"... 채린이랑 배고파서 뭐 좀 먹었어..."

채린이 말고는 둘러댈 게 없다. 미나는 결국 내일이면 다 밝혀질 변명을 일단 내뱉었다. 다행히도 아직 엄마는 채린이 엄마에게 연락을 해보진 않은 것 같다. 엄마의 앞에 먹다 만 맥주 캔이 보였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흘러내린 엄마의 머리.

"엄마 또 마셔?"

미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이번에는 엄마가 흠칫하더니 미나에게 말한다.

"얼른 씻고 들어가서 공부나 해."

기분이 상한 미나는 방문을 열고 가방을 던진 채 그대로 침대에 누워버렸다. 뻐근한 어깨, 그리고 자꾸만 떠오르는 최수빈의 얼굴, 이상한 할머니... 최수빈 같은 애도 차이는구나... 그런데 정말 그 문구점은 언제부터 있었던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따라 미나의 눈도 감기고 있었다. 내일부터 펼쳐질 일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