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장 이상한 하루

by 꼬르륵

1장


이상한 하루

저녁 7시, 바깥은 벌써 어둑해져 있었다. 학원 간판 아래 우두커니 서 있던 미나의 등을 누군가 가볍게 톡 쳤다.


"가는 길에 떡볶이 먹고 갈래?"


채린이었다. 언제부터인가 키가 훌쩍 크기 시작한 채린은 이제 미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치원부터 초등학교까지 내내 같은 학교를 다닌 채린은 미나에게 가족 같은 친구였다. 같은 중학교를 다니는 두 사람은 학원도 같은 곳으로 다녔다. 미나와 채린의 엄마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 중 한 명이 영어학원을 가면 영어학원으로, 피아노 학원을 가면 피아노 학원으로 같이 보내기 시작했다. 외동딸을 둔 엄마들의 일종의 안전띠였다.


"엄마가 나 다음 달부터 수학 학원도 다니래."


크게 입을 벌려 떡볶이 하나를 입에 넣으며 채린이 말했다. 식당을 하는 채린의 부모님은 늘 바빴다. 어릴 때부터 식당을 해오신 채린의 부모님은 어느 날은 칼국수를, 어느 날은 해장국을, 지금은 감자탕집을 운영하고 계셨다. 덕분에 미나도 많이 얻어먹었지만, 어느 때는 놀러 가는 것조차 눈치 보일 정도로 힘들어 보이셨다. 다행히 요즘은 장사가 꽤 된다고 한다. 그러니 채린의 학원비도 전보다는 여유 있게 댈 수 있겠지.

채린이 수학학원에 간다고 하면, 미나의 엄마도 분명 미나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미나는 벌써부터 한숨이 새어 나온다고 느꼈다. 미나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채린이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근데 나는 수학학원까지는 진짜 못 다니겠어. 이번에는 엄마한테 진짜 못 한다고 말하려고."


아무리 그래도 결국 채린은 수학 학원을 가게 될 것이라는 걸 미나는 안다. 고생해서 공부시키는 엄마 아빠 말을 끝까지 거역할 채린이 아니다. 채린 부모님의 간절한 바람과 뒷바라지 덕분인지 채린의 성적은 중학교 3학년이 된 후로 줄곧 상위권이었다. 반면 미나는 그렇지 못했다. 엄마는 그게 아빠의 월급이 적어서 채린이처럼 더 많은 학원을 다니지 못해 그런 거라고 말했다. 지난밤, 피곤한 얼굴로 저녁상을 치우던 엄마의 얼굴이 떠오른 미나는 순간 떡볶이를 하나 세게 콕 찔렀다.


"근데 말이야, 내가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나는 공부머리가 없는 것 같단 말이지."


상대적으로 더 높은 성적의 채린이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걸 듣자니 미나는 쓴웃음이 났다.


"그럼 나는? 아주 머리가 없는 거겠네?"


그러자 채린은 무안한 듯 웃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나 요리를 하고 싶거든. 너도 알잖아, 내가 얼마나 요리 잘하는지."


채린은 요리를 정말 잘했다. 언젠가 채린의 집에 놀러 갔을 때 채린이 만들어준 스파게티에 미나는 너무 맛있어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근데 우리 엄마 아빠는 내가 요리의 '요' 자만 꺼내도 학을 뗀다고. 왜 그 고생을 하려고 하냐고. 근데 나는 아무리 공부를 해도 애매할 것 같거든..."


미나는 문득 하고 싶은 것이라도 확실히 아는 채린이 더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미나는 아직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미나는 오히려 애매한 건 자신인 것 같았다. 좋아하고 재미있어하는 것이라고는 정말, 책 읽기. 주로 소설. 그것 하나뿐이다. 특별히 예쁘지도 않다. 공부도 잘 못한다. 운동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노래를 잘 부르거나 춤을 잘 추지도 않는다.

미나는 너무 평범한 자신이 더 답답하게 느껴졌다.


"다 먹었으면 가자."

"그... 그래."


포크를 내려놓고 일어서는 미나를 따라 채린이 급하게 떡 하나를 입에 밀어 넣고 일어섰다.


"야, 손미나. 나 수학학원 다니게 되더라도 무조건 학교 끝나면 일단 만나는 거야. 아니면 너도 같이 다니..."


거기까지 말하던 채린이 멈칫한다. 아마도 채린은 요즘 미나의 집 사정을 엄마에게 들었을 것이다. 건설업계의 불황, 건설사 소장으로 일하며 계속 승진에서 누락되는 아빠,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엄마까지.

미나는 채린이 사는 아파트 단지 앞에서 채린과 헤어진 후 조금 더 낡은 아파트 단지로 향한다. 저 멀리 얼마 전 이사 온 미나의 집이 있는 아파트가 보인다. 공동현관문으로 들어서며 보니 미나네 7층 거실에 불이 켜져 있다. 그리고 보이는 중년 남자의 실루엣.


'아빠다!'


미나는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걱정을 달고 사는 엄마와 달리 아빠는 담담하게 미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때가 많다.


"애한테는 물어본 거야? 지금 다니고 있는 영어학원도 힘들어 보이던데 무슨 수학학원이야?"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현관문 앞에 서자 아빠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휴, 답답한 소리 좀 그만해. 채린이 엄마도 돈이 남아돌아서 수학학원 보내겠어? 요즘 수학 학원 안 다니면 절대 못 따라가."


역시나. 벌써 엄마가 들었나 보다.


"학원을 가더라도 일단 애가 공부를 해야 성적이 느는 거지. 애가 필요하다고 하지도 않았는데 왜 항상 당신이 더 안달이냐고."


"안달? 당신, 미나 성적표 봤어?"


높아지는 소리에 미나는 더 이상 현관 비밀번호를 누를 수 없다. 결국 미나는 발길을 돌렸다. 공동현관문을 나서고, 아파트 단지를 나와 이어진 인도를 걷는 내내 미나는 이 모든 게 다 자신의 탓만 같다. 딱히 잘하고 싶지도 않은 공부. 엄마의 등살에 겨우 의자에 앉아있곤 했지만, 미나는 결국 관심 가는 책을 몰래 읽거나 음악을 듣곤 했다. 엄마는 그런 줄도 모르고, 미나가 열심히 해도 성적이 잘 안 나오는 게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라고 했다.


'편의점에 가서 시간이나 때우다 오자'


"공사 중

출입을 금합니다"


그렇게 미나가 생각에 잠겨 따라 내려간 인도 끝에 어쩐 일인지 '공사 중'이라는 글자와 함께 긴 펜스가 보였다. 하수구에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뚜껑은 열려있고 통행이 차단된 길. 저만치 보이는 편의점이 유독 멀어 보였다. 그때 보이는 옆 골목. 평소에 잘 다니지 않던 골목이었다. 뭔가 으슥했지만 안 그래도 기분이 좋지 않은 미나는 될 대로 돼라 하며 골목길로 향했다. 5분 정도만 골목을 걸으면 돌아서 편의점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저 멀리 교복을 입은 듯한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미나는 한숨을 쉬었다. 또 무슨 일이지. 이런 데서 애정행각이라면 곤란한데... 돌아가야 하나 망설이며 멈칫하는데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제발. 내가 너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잖아."


"내가 널 안 좋아하는데 어떻게 하라고."


울먹이는 여자와 냉정한 남자. 전혀 궁금하지 않은 남의 연애사였다. 미나는 빨리 좀 끝내고 길 좀 비켜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미나는 속으로 혼잣말을 하며 천천히 걸어갔다. 가로등이 있지만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면 모르는 척 빠져나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자 여자아이가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근데 너 이렇게 헤어지자고 할 거면서 어제 내 선물은 왜 받은 거야?"


"뭐? 이 옷? 뭐, 뱉으라는 거냐? 야, 가져라 가져. 지가 사진 찍으라고 입혀놓고는."


갑자기 남자아이가 웃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놀란 미나는 순간 이대로 직진해도 될지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번 가속이 붙기 시작한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런데 털썩.


"아니, 그게 아니라... 제발. 나 어제 너랑 찍은 사진도 올렸는데."


갑자기 여자아이가 무릎을 꿇고 울기 시작했다.


미나는 이제 다섯 발자국만 더 걸으면 모른 척 지나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자아이가 무릎을 꿇는 바람에 미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멈춰 섰다. 그리고 인기척을 느낄 새도 없이 다투던 두 아이가 마침내 미나의 얼굴을 봤을 때, 가로등 불빛 아래 무릎을 꿇고 있는 여자아이의 얼굴이 드러났다.


최선빈이었다.


분명 최선빈이었다. 자타공인 SNS 스타. 얼굴도 예쁘고 무엇보다 패션 센스도 좋아서 학교에서도 유명했다. 연예인을 하고 싶어 한다는 소문이 있었고, 늘 옷을 잘 입는 남자친구와 다녀서 선망의 대상이 되곤 했다. 이번에 미나와 같은 반으로 배정되면서 미나와는 아직 말을 해보지 않았지만 얼굴은 분명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최선빈이 무릎을 꿇고 헤어지지 말자고 매달리고 있다? 순간 미나는 놀랐지만, 빨리 이 현장을 벗어나고 싶었다. 내 인생도 버거운데 남의 연애사까지, 더더욱 같은 반 여자애의 연애사는 더더욱. 그런데 최선빈도 마주친 미나의 얼굴을 알아보는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볼 수 없겠지. 제대로 쪽팔린 듯한 표정이 어쩐지 분노로 뒤바뀌던 순간, 당황한 미나가 말했다.


"내가 지금 이 길을 지나가야 해서..."


망부석이 된 남자아이 뒤로 재빨리 지나친 미나가 한참을 걷는 동안에도 어쩐지 저 멀리 두 아이가 미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에 미나는 뒤통수가 뜨거웠다.


'아니, 왜 이 골목에서 저래.'


불평을 하며 걷는데 자꾸만 최선빈의 얼굴이 떠올랐다.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던 그 눈이. 도대체 무슨 일이 이렇게 꼬이는 건지. 미나가 무심코 발로 길가의 돌을 걷어찼다.

"딱!"


깨지는 소리. 한 번도 본 적 없는 작은 문구점의 진열대에 플라스틱 장난감이 바닥에 꼬꾸라져 있었다.


'정말 오늘 왜 이러는 걸까!!!'


미나는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keyword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