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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이상한 할머니

by 꼬르륵


고개를 숙이고 주저앉은 미나의 머리 위로 적막이 돌았다. 미나는 조심스럽게 머리를 들었다. 다행히 미나가 장난감을 부신 걸 본 사람이 없어 보였다.


‘빨리 여길 떠야겠다’


미나는 일어나 발길을 돌렸다. 그때


“학생!”


앙칼진 목소리가 미나의 뒤통수에 꽂혔다. 미나는 한숨을 내쉬며 돌아봤다. 그러자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 알 수 없는 할머니 한 분이 서 있었다. 머리카락은 허연데 어쩐지 얼굴은 늙은 느낌이 들지 않는 할머니가 수레에 종이 상자를 가득 실고 문구점 입구에 서 있었다.


“아이고, 이게 우리 집에서 제일 잘 나가는 장난감인데 박살을 내놨네”


할머니가 미나가 멈춰 선 걸 확인하고, 떨어진 장난감을 주우며 말했다.


“이렇게 다 부셔놓고, 그냥 내빼면 어떻게!”


미나가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말로만?”


할머니가 곧바로 받아쳤다. 아무래도 장난감을 변상하라는 말인 것 같았다. 미나는 주머니 속 손을 넣어 허둥지둥 지폐를 찾았다. 미나의 바쁜 손가락 움직임에 이 천 원이 주머니 바깥으로 빼꼼 머리를 내밀었다. 슬쩍 내려다본 미나는 다행이다 싶었다.


“아니요. 제가 망가뜨렸으니까 제가 살게요. 얼마 드리면 될까요?”


"오만 원"


"네? 오만 원이요?"


미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때마침 할머니가 들고 있는 장난감 인형의 팔 하나가 덜렁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 플라스틱 덩어리 한 개에 오만 원? 아무래도 호구가 될 것만 같은 불안함에 미나는 안 되겠다 싶어 목소리에 한껏 힘을 줘 말했다.


"저, 할머니, 제가 장난감 부서뜨린 건 죄송한데요. 저 장난감 하나에 오만 원은 좀... 가격표 좀 봐도 될까요?"


"가격표는 무슨, 다 내 머릿속에 있는데. 그리고 학생은 물건값만 내야 되는 게 아니야. 양심값도 내야지."

'양심값?'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내가 안 불렀으면 도망가려고 했지? 정직하게 행동을 안 해서 남의 양심까지 상처 줬으면 책임을 져야지. 학생 때문에 내 마음까지 상했잖아."


도대체 이건 무슨 논리인지 싶었다. 하지만 도망가려고 했던 건 사실이라 미나는 말문이 막혔다. 잠깐이지만 미나는 이럴 때는 납작 엎드리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달 용돈은 진작에 다 썼고, 남은 건 주머니 속 이천 원인데, 엄마에게 오만 원을 달라고 하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할머니, 죄송한데요. 제가 지금 이천 원밖에 없거든요. 제가 다음에는 정말 조심할게요. 이천 원만 받아주시면 안 될까요?"


평소 무뚝뚝한 미나가 인생에서 가장 간절한 표정으로 할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안 되지."


무 자르듯 단칼에 거절하는 할머니의 말만 돌아왔다. 그런데 잠깐 고심하는 듯하던 할머니가 말했다.


"그러면 노동으로 갚아. 그러면 내가 이천 원도 안 받을게. 그렇게라도 할래?"


미나는 썩 맘에 들지 않았지만 엄마에게 오만 원을 달라고 하지 않아도 된다면, 이천 원이라도 아낄 수 있다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벌 건 아니고, 우리 가게 뒤에 쌓여있는 상자들을 다 펴서 수레에 담아주면 돼. 나 따라와."


할머니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게 뒤로 갔다. 뒷짐을 지고 걷는 할머니의 발걸음이 너무 힘차서 미나는 순간 할머니가 맞나 싶었다. 그리고 펼쳐지는 상자들의 마당. 그곳엔 언제부터 쌓인 건지 알 수 없는 종이상자들 수십여 개가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젊은데 뭐 이거 한 시간이면 다 하지. 다 하면 불러."


할머니가 사라지자 남겨진 문구점 뒷마당에 적막이 둘러쌌다.


박스가 뒹굴고 있는 뒷마당 뒤로 저 멀리 주택가와 아파트의 불빛이 반짝거렸다. 어쩐지 동화 같은 그 불빛들을 보고 있자니 미나는 정말 한 시간이면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가방을 벗어 벽에 무심코 세운 뒤 미나는 상자를 하나씩 집어 상자에 붙은 테이프를 떼고 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개의 상자를 뜯어내자 살짝 땀이 나기 시작했다. 아빠와 엄마의 다툼, 학원비, 그리고 최수빈까지. 하지만 단순 노동을 하다 보니 신기하게 미나는 마음이 편해졌다. 복잡했던 마음이 잠시 가라앉는 듯했다. 그러다 잠깐 시계를 보니 8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9시까지는 집에 가야 돼.'


미나는 바쁘게 움직이던 손의 속도를 붙여 상자의 테이프를 뜯었다. 마지막 상자까지 수레에 쫙쫙 펴고 이제 할머니에게 어서 빨리 알려야겠다고 돌아서던 찰나,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 할머니가 서 있었다.


"역시, 젊은 사람은 금방 하네. 나 같으면 반나절 걸릴 일을. 중간에 빼먹고 도망갈 줄 알았더니 이건 또 다 했네."


할머니가 좋아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미나는 좋은 일을 한 것 마냥 뿌듯함마저 들 뻔했다. 하지만 9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더 늦어지면 엄마가 걱정할 시간이었다.


"저... 이제 가봐도 될까요?"


미나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미나의 얼굴을 유심히 보더니 말했다.


"내가 선물 하나 줄게. 받아가."


이건 또 무슨 병 주고 약 주기인지. 하지만 미나는 빨리 가야 했다. 일단 할머니를 따라가자 할머니가 가게 안 문구 중에서 노트 하나를 빼들었다.


"큰맘 먹고 주는 거니까. 열심히 쓰라고."


'쳇. 노트 하나 주면서 생색은.' 하지만 미나는 내색하지 않고, 그저 감사하다고만 했다. 그렇게 노트를 받아 들고 다시 돌아오는 골목길에서, 문득 미나는 의문이 들었다. 이 골목에 문구점이 언제부터 있었던 걸까? 돌아오는 길, 최수빈은 이제 없었다. 다행이었다.


"띠띠띠 삐리리리릭-"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에 들어서자 사방이 깜깜했다. 아빠의 신발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어딘가 나간 듯했다. 엄마는 일찍 잠이라도 든 걸까. 부엌을 지나 조용히 방으로 향하는데, 식탁에 앉아있던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미나. 너 어디서 뭐 하다가 이제 들어와?"


"... 채린이랑 배고파서 뭐 좀 먹었어..."


채린이 말고는 둘러댈 게 없다. 미나는 결국 내일이면 다 밝혀질 변명을 일단 내뱉었다. 다행히도 아직 엄마는 채린이 엄마에게 연락을 해보진 않은 것 같다. 엄마의 앞에 먹다 만 맥주 캔이 보였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흘러내린 엄마의 머리.


"엄마 또 마셔?"


미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이번에는 엄마가 흠칫하더니 미나에게 말한다.


"얼른 씻고 들어가서 공부나 해."


기분이 상한 미나는 방문을 열고 가방을 던진 채 그대로 침대에 누워버렸다. 갑자기 오늘 채린이와 떡볶이를 먹었던 일이 아주 오래전 일처럼 느껴졌다. 뻐근한 어깨, 그리고 자꾸만 떠오르는 최수빈의 얼굴, 이상한 할머니... 최수빈 같은 애도 차이는구나... 그런데 정말 그 문구점은 언제부터 있었던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따라 미나의 눈도 감기고 있었다. 내일부터 펼쳐질 일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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