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야. 오늘 오전 일이 많다고 해서 엄마 일찍 출근한다. 밥 챙겨 먹고 나가고, 집에 일찍 일찍 다녀"
다음날 아침, 알람 소리에 깬 미나가 거실로 나가보니 식탁 위 메모가 보였다.
'일?' 이 시간에 항상 미나를 배웅하던 엄마의 빈자리가 이상했다. 이제 편의점 알바를 시작할 거라던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계란프라이와 소시지를 허겁지겁 먹고 나서는데 카톡 알림음이 울렸다. 아빠였다.
'우리 딸, 아빠 어제 출장 갔다가 바로 회사로 출근했다. 밥 잘 먹고 공부 열심히 하고. 이따 저녁에 보자. 우리 딸 파이팅'
아빠는 엄마와 다툼이 있는 날이면 출장이 있다며 공사장 숙직실에서 잤다. 찌뿌둥한 얼굴로 일하고 있을 아빠의 얼굴이 떠올랐다.
'... 거짓말'.
미나는 답을 하지 않은 채 폰을 가방에 넣어버렸다. 교실 책상에 앉자 미나는 아까 답을 하지 않은 아빠의 톡이 떠올랐다. 미나는 폰을 꺼내 아빠에게 짧은 인사를 건넸다.
"ㅇㅇ. 아빠도 파이-"
"퍽"
마지막 '팅' 자를 쓰려는데 미나의 손에 들려있던 핸드폰이 바닥에 떨어졌다. 누군가 미나의 책상에 부딪히면서 미나의 손목까지 부딪힌 것이다.
"미안"
미나는 고개를 들어보니 최수빈이었다.
최수빈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미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제 골목에서 무릎 꿇고 울던 그 얼굴. 지금은 표정이 없었다. 차갑고, 단단했다.
미나는 어제 일이 떠올라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 괜찮아"
미나는 서둘러 핸드폰을 주웠다. 그러자 최수빈이 들고 있던 책들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똑.
의도적으로 천천히 떨어뜨린 것이었다.
"내 책도 좀 주워줄래?"
무표정한 얼굴로 최수빈이 말했다. 일부러 그러는 게 확실했다. 창가 쪽에서 최수빈의 무리가 키득거리며 이쪽을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미나는 어쩐지 맞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조용히 책을 집어 최수빈에게 건넸다. 그러자 책을 받아 들 듯 손을 뻗은 최수빈이 갑자기 손을 뺐다. 그 바람에 책은 다시 한번 바닥에 떨어졌다.
"이런... 제대로 줘야지"
최수빈이 피식 웃었다. 미나는 순간 어떻게 해도 최수빈의 의지를 꺾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엄마의 얼굴이 스쳐갔다.
언젠가 엄마는 동네 놀이터에서 한 아줌마와 무섭게 다툰 적이 있었다. 다쳐서 울고 있는 미나를 보고 '그러게 너희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았어야지'라고 말한 아줌마였다. 그때 엄마는 맹렬하게 그 아줌마를 몰아붙였다. '애 앞에서 부끄러운 줄 아세요! 돈 있으면 뭐 해. 인성이 잘못됐는데'.
속사포처럼 몰아치는 엄마의 말에 얼굴이 벌게진 그 아줌마를 보며 미나는 알았다. 엄마가 이겼다. 그렇게 큰 소리를 친 후, 미나의 손목을 잡고 돌아오는 엄마를 보며 미나는 엄마가 처음으로 멋있다고 생각했다.
"네가 떨어뜨렸잖아. 네가 주워"
미나는 용기 내 말했다. 그러자 최수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 뭐라고 했냐"
"네가 주우라고"
미나는 책상에 몸을 돌려 앉았다.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졌다. 모두 미나와 최수빈을 주목하고 있었다.
"주워라"
최수빈은 주변을 의식하며 마지막 경고를 하듯 말했다. 미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있었다. 얼른 이 상황이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러자 최수빈이 조용히 책을 주워 들었다. 그러더니 그렇게 돌아가는 듯하던 최수빈이 미나의 머리를 책으로 내려쳤다.
"탁!"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머리를 맞아 고개가 숙여진 미나가 벌떡 책상에서 일어나던 순간, 종이 울렸다. 조례를 알리는 종이었다.
때마침 담임이 들어왔다. 최수빈은 유유히 자기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모두들 앉아있는 교실에 미나만 우두커니 서있자 담임이 의아한 듯 물었다.
"미나. 왜? 무슨 할 말이 있어?"
어디가 피곤해 보이는 목소리. 뭐라고 해야 하나.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멀리서 최수빈의 따가운 눈빛, 최수빈 무리의 차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지금 말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었다.
".... 아니요"
"그럼 자리에 앉아"
그렇게 간단한 조례를 한 후 담임은 교실을 나갔다. 그리고 평소처럼 이어지는 수업. 그런데 뒷자리에서 쪽지 하나가 미나의 책상에 툭 떨어졌다.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입 조심해라"
미나는 뭔가 대단히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최수빈 걔, 너한테 차인 거 들킨 게 창피해서 그런 거네"
편의점 파라솔 밑으로 더운 바람이 순간 훅 몰려왔다. 아이스크림을 입에 문 채린이가 걱정스러운 듯 미나를 보며 말했다.
"걔 초등학교 때부터 유명했잖아. 얼굴 예쁘다고. 걔가 남자애랑 커플룩 찍어서 한번 올릴 때마다 좋아요가 기본 백개야. 어디서 협찬도 한다던데"
채린이 보여준 최수빈의 SNS는 화려했다. 나이키 크롭 티셔츠, 뉴발란스 운동화, 글로니 가디건까지. 메이크업 방법은 물론이고 잔스포츠 가방에 키링을 덕지덕지 달아놓은 인증샷도 있었다. 남자친구와 찍은 듯한 커플룩 사진도 많았다. 챔피온 후드를 맞춰 입은 사진, 아디다스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찍은 데이트 사진들. 모두 목 아래만 있는 사진들이었다. "남자 친구 얼굴 사진 왜 다 내림?"라는 최신 댓글에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너 앞으로 그냥 쉬는 시간에는 우리 반에 와. 나랑 놀아"
채린이 말했다.
"됐거든. 거기까지 갔다 오는 데만 5분 걸려"
채린은 1반, 미나는 6반 끝에서 끝이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미나는 그렇게 말해주는 채린이에게 고마웠다. 채린은 대수롭지 않은 듯 이어 말했다.
"내 말은 굳이 부딪히면서 스트레스받지 말라는 거지.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우리 엄마가 맨날 그러더라. 진상은 굳이 상대를 안 하는 게 제일 좋다고"
오랫동안 장사를 하신 채린 엄마의 얼굴이 스쳐갔다. 어쩌면 맞는 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나 학원 늦었다. 나 갈게"
채린이 서둘러 가방을 둘러맸다. 결국 수학 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채린이었다.
"내일 봐.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언니가 있잖아. 손미나"
먹다 만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채린은 싱긋 웃었다.
"뭐래. 내가 너보다 생일도 빠르거든"
미나는 피식 웃으며 채린에게 손을 흔들었다. 멀어지는 채린을 보던 미나는 집 근처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렇게 걷고 있는데 익숙한 무리가 보였다. 최수빈 무리였다. 최수빈은 항상 여자아이 두 명과 함께였다. 정지수, 문혜지.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조금 전 채린의 말이 떠올랐다. 미나는 최수빈 무리가 미나를 보기 전에 발길을 돌려 다른 골목으로 향했다.
다음날, 최수빈 무리의 괴롭힘은 더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미나가 자리를 비운 사이, 사물함 문이 열린 채 모든 물건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창가 쪽 최수빈 무리가 키득거리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미나는 천천히 물건을 주웠다. 그런데 책상으로 돌아가니 필통과 공책도 모두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크크크"
미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미나야. 나 이 볼펜 좀 빌려줄래?"
정지수였다. 정지수가 이런 식으로 빌려 간 물건이 벌써 세 개가 넘었다.
"... 그래"
"거봐. 아무 말 못 한다니까."
멀리서 최수빈이 키득거렸다. 미나는 점점 지쳐갔다.
미나는 점점 지쳐갔다. 미나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자 엄마는 성적이 떨어져서 그런 거냐고 했고, 아빠는 학원을 줄이고 싶으면 말하라고 했다. 미나는 어느 쪽에도 솔직하게 말하기가 어려웠다.
***
그날도 화장실 칸에 앉아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최수빈 무리였다.
"근데 수빈아, 진짜 손미나가 니 남자 친구한테 고백한 거야?"
"그렇다니까. 어이가 없어가지고"
"근데 손미나가 민기를 어떻게 알았지?"
"내가 알바야. 근데 진짜 웃기다. 손미나 뭘 믿고. 걔가 얼굴이 예뻐, 공부를 잘해, 뭐 잘하는 게 있나. 얼굴도 진짜 밋밋하지 않냐"
미나는 숨을 참았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야야, 해나 온다. 나가자"
최수빈 무리가 서둘러 화장실을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쉬는 시간이 마치는 종소리가 울렸다. 미나는 조용히 화장실 칸에서 나왔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교실에 돌아가 앉았다. 하지만 계속해서 화장실에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걔가 얼굴이 예뻐, 공부를 잘해, 뭐 잘하는 게 있나. 얼굴도 진짜 밋밋하지 않냐...'
수업을 듣는 내내 자꾸만 눈물이 차올랐다. 눈물을 들키지 않기 위해 미나는 뚫어져라 책을 펼쳐다 봤다.
미나의 눈물을 알아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몸이 안 좋아서 바로 집으로 갈게'
채린에게 문자를 보낸 후 미나는 집으로 향했다. 집은 비어있었다. 얼마 전부터 엄마는 다른 아르바이트생이 출근을 못할 때마다 나가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버스로 40분이나 나가야 하는 곳까지. 미나를 수학 학원에 보내기 위해서였다.
'공부를 잘해, 예쁘기를 해, 진짜 생긴 것도 밋밋하지 않냐...'
방에 들어선 미나는 책상에 앉아 엎드렸다. 아무도 없는 집. 적막을 깨고 미나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한 번 터진 눈물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얼마나 울었을까. 눈자위가 뻐근해지는 것을 느끼며 비로소 미나는 고개를 들었다.
소리를 내어 운 것도 얼마 만일까.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니 조금 후련해진 기분이 들었다. 멍하니 책상 위 벽을 바라보는데 문득 책꽂이에 꽂힌 노란 노트가 보였다.
며칠 전 이상한 할머니가 준 노트였다.
미나는 연필을 빼들었다. 정말 힘들 때마다 미나가 하던 일, 그건 있는 그대로 감정을 쓰는 것이었다. 언젠가 초등학교 국어 선생님이 말씀해 주신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이었다.
미나는 최근 있었던 일들을 적기 시작했다. 그날 그 골목에서 본 장면, 그리고 최수빈 무리, 괴롭힘까지. 쓰다 보니 감정이 다스려지기는커녕 분노가 차올랐다.
'최수빈 그만 좀 해. 진짜.'
미나의 손이 떨렸다. 연필 끝이 종이를 세게 눌렀다.
'어디 좀 사라졌으면.'
그렇게 쓰고 나니 더 화가 났다. 미나는 마지막 문장을 힘주어 썼다.
'내 눈앞에서 좀 꺼지라고'
쓰고 나서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미나는 그렇게 노트를 책상에 내팽개치고 다시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창밖으로는 저녁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손미나!"
다음 날, 학교를 가기 위해 평소처럼 채린의 아파트 단지 앞에 서 있는 미나를 채린이 힘차게 불렀다. 그런데 미나는 채린을 보고 웃을 힘조차 없었다.
뛰어오는 채린의 눈이 미나의 얼굴을 보며 걱정스럽게 바뀌었다.
"야, 뭐야. 너 얼굴 왜 이래. 울었어?"
"... 그냥"
"뭔데... 최수빈 때문에 그래?"
미나는 오늘 아침 엄마를 보면 솔직하게 말을 해볼까 싶었다. 하지만 어젯밤 엄마는 또 일을 나갔다. 아빠는 현장 일이 많아서 계속 숙직실에서 자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말 못 한 미나의 어려움을 채린이 알아채고 말하는 순간, 미나는 눈이 붉어졌다. 순간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 없는 미나를 본 채린이 미나의 팔을 잡고 말했다.
"야, 너 울어?"
"채린아...."
"응!"
"나 너무 힘들어..."
순간 채린이 조용했다. 채린도 미나의 입에서 힘들다는 말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채린은 뭔가 단단히 각오한 듯 미나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야, 너 안 되겠다. 내가 오늘 너네 담임 찾아가서 말할게. 아니, 내가 쉬는 시간에 너 교실 좀 가봐야겠다. 최수빈 걔네 진짜 못됐다. 네가 일부러 본 것도 아니고 왜 그래."
대신 흥분해 주는 채린이 고맙지만, 미나는 채린의 말대로 한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지는 않았다.
"됐어. 괜히 너까지 힘들게 하면 어떻게 해."
"뭐, 하라고 해. 하라고. 하 진짜."
채린은 진심으로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미나는 어쩌면 채린이 진짜로 미나의 반에 와서 최수빈의 무리에게 달려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늦겠다. 가자."
미나가 채린을 만류하듯 팔을 잡고 발길을 돌렸다. 미나는 채린의 격려에 조금은 힘이 났다.
그렇게 학교에 들어서고 복도에서 각자 교실로 향하는데 채린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야, 손미나. 너 진짜 최수빈 걔가 또 괴롭히면 바로 불러. 나 진짜 너네 교실 갈 거니까."
채린의 입에서 최수빈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미나는 혹시나 최수빈 무리가 들을까 봐 깜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렇게 채린을 보내고 미나가 심호흡을 하며 교실을 들어서는데, 항상 최수빈 무리가 서 있는 창가 쪽에 아무도 없었다.
'나갔나...'
하지만 1교시가 지나고, 2교시가 지나도 최수빈은 나타나지 않았다. 최수빈이 없자 정지수와 문혜지도 미나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정지수는 평소보다 더 즐거워 보이는 듯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최수빈이 보이지 않은 채 종례시간이 됐다. 평소처럼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교실에 들어선 담임이 짧은 공지사항을 전달한 후, 교실을 나서기 전 깜빡했다는 듯 말했다.
"아, 그리고 수빈이가 아파서 학교를 당분간 못 나온다고 한다. 혹시 수빈이랑 친한 애들은 연락해서 위로도 좀 해주고."
'아프다고? 갑자거?'
걱정은 전혀 되지 않았다. 어디가 아픈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그 짧은 한마디를 듣자 최근 며칠 동안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편안함이 미나의 마음속에 밀려왔다.
순식간에 달라진 교실의 공기.
한결 편해진 공기를 미나는 조용히 들이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