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텍이라는 회사가 있다. 기타, 음향기기, 악기부품 도소매 등 악기 도매업체다. 설립일은 1988년 7월 1일로 올해 31년차 중견기업이다. (콜텍 홈페이지 ‘60~50년 노하우’로 소개된 부분 확인 필) 록밴드 MUSE의 매튜가 이 기타의 시그니쳐 모델일정도로 국내외 인정받은 기타 제조업체다.
그런데 2016년 이 회사의 기타를 구매하지 말자는 불매운동이 한 차례 일었었다. 국내 유명 인디밴드뿐 아니라 해외 저명한 뮤지션들도 동참했었다. 그 이유는 콜텍이 노동자를 부당해고한 부도덕한 기업이라는 판단이 있어서다.
(NO CORT! 운동에 참여한 뮤지션들.)
실제로 2007년 4월 콜텍(당시 콜트콜텍)은 1백여명의 노동자를 정리해고했다. 회사는 연일 흑자를 기록하고 있는데 경영주는 경영상의 이유로 갑작스러운 정리해고를 단행한 것이다. 그리고 콜트콜텍이 만들던 기타 제조는 중국과 인도네시아로 넘어갔다.
그리고 2017년 겨울, 나는 광화문 한켠 천막농성장에서 거리 농성을 하는 콜텍 노동자들을 만났다. 빨간 천막 들어서자 바닥에서 올라오는 찬 기운을 막기 위해 깐 스티로품과 그 위 이불, 옷가지, 수건, 난로, 봉지 커피, 종이컵이 눈에 들어왔다. 한눈에 봐도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이라기보다 잠깐 눈을 붙일 수 있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콜텍 부당해고 피해자 임재춘, 이인근, 김경봉씨는 10년이 넘게 농성중이었다.
(콜트·콜텍 해고노동자 이인근, 김경봉, 임재춘씨(왼쪽부터)가 서울 광화문 천막농성장을 지키고 있다.
사진=경향신문)
함께 취재를 간 프로그램의 진행자 세월호 유가족 김영오 선생님께서 위로의 말을 건네며 취재를 시작했다.
“먼저, 짧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네, 저는 콜드콜텍 노조 지회장 000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세 분의 인터뷰의 내용은 이러하다.
-기타를 만드는 공장에 있었으면 기타를 잘 쳤겠네요. 어떠신가요?
조율반 사람들 외에는 기타를 만지지 못했다. 생산성과 관련된 것을 제외하고선 어떤 권리나 여유도 주지 않았다
-올해가 투쟁 10년차인데. 이렇게 오래 걸릴 줄 알았나요?
후회 안 한다고 하면 새빨간 거짓말이다. 투쟁이 원만하게 이루어지면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겠지만 현재 투쟁이 지지부진하니 그런 생각이 든다
-다른 동료들의 소식은 듣나요? 어떻게 지내시고, 어떤 목소리를 보내오시는지?
수 백 명의 동료들 중 지금은 4명이 남았다
-콜트콜텍 근무환경이 워낙에 안 좋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예를 들어 알려줄 수 있을까요?
굴뚝청소비를 절약하려고 직원들에게 하게 했다. 그 날 식사로 짜장면을 시켰는데 짬뽕을 주문한 사람에겐 500원을 더 받았다. 퇴직금을 안 주려고 1년이 되기 전에 강제로 퇴직서를 강요한 적도 있다. 자꾸 창문을 보면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창문을 모두 가려놓기도 했다. 여성직원들은 생리휴가 월차휴가도 쓰지 못하고, 화장실 자주 간다고 망신도 주기도 했다. 사포로 문지르는 연마반은 손목이 성한 사람이 없었다
-대량해고가 시작 된 건 언제, 어느 공장부터인가요?
간략하게 2007년 인천, 56명을 정리해고. 2008년 8월에 공장폐업. 대전도 2007년 4월 휴업통보와 함께 공장폐쇄. 89명 해고
-해고 당시에 사측이 어떤 방식으로 해고를 알렸는지 알려주세요. 만나서 해명이나 사과한 적은 있나요?
2009년에 콜트콜텍의 노동자 해고가 불법이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하지만 박영호 사장은 단 한 번도 정식 교섭조차 응하지 않았고, 항소했다
-반 이상이 사법부와의 싸움이었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그 시간을 돌아보면 어떠신가요?
결국 2012년 대법원은 ‘흑자 정리해고’에 대해 회사의 손을 들어주었고, 또, 2014년에는 ‘미래에 다가올 경영상의 이유’로 정리해고를 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판결. (*이 판결은 양승태 전 대법관의 재판거래 항목 중 하나로 거론되고 있다. 기업의 미래 경영까지 거론하며 사측의 손을 들어 준 법원을 콜텍 노동자는 ‘서초동 점집’이라고 부른다.)
-자녀나 아내가 고생이 많으셨겠네요
아내는 마음을 내려놓은 것 같았다. 싸움이 길어지다 보니까 지쳤을 것이다. 친구들하고 술 한잔하다 보면 친구들 사는 모습을 보고 집에 와서 넋두리하기도 하지만 나를 비난하지는 않았다. 얼마 전에는 아내가 친구를 만나고 오더니 방에 들어가 혼자 울고 있었다.
-2008년 고공농성을 하셨는데, 그 때 허공에서 많은 생각을 하셨을것 같아요.
아무 성과도 없이 몸만 축나서 내려왔다. 예상보다 언론 취재도 많이 오지 않고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 사회가 서운했다. 송전탑 밑에서 시민들이 자전거를 타고 조깅을 하는 평화로운 일상을 보면 마음이 더 스산해졌다.
-콜텍에서 일하며 가장 행복했을 때는 언제인가요?
1998년. 그때 입사했다. 회사엔 호봉제라는 게 없었다. 기본급도 몰랐다. 이인근은 기타가 완성돼서 나오면 포장하는 일을 했다. 완성된 기타에 바코드를 출력하고, 종이박스 안에 넣는 일이었다. 오전엔 좀 한가하다가 오후에 불량품을 고친 기타가 쏟아져 나오면 정신없이 바빴다. 60여만 원을 받았다. 그 해에 결혼했다. 회사 일은 고되고 월급은 적었지만 작은 아파트로 이사도 가고, 아이들도 태어나고, 가장 행복할 때였다.
-콜텍에서 해고를 당했지만 '기타' 이야기가 나오면 눈빛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기타의 종류, 최근 출시되는 기사 상품들과 그 소리 평가까지 줄줄이 나온다. 기타는 습도나 온도에 영향을 많이 받는 만큼, 사계절이 있는 한국에서 만드는 기타는 계절에 따라 소리가 달라진다고 한다. 임재춘은 다채로운 기타의 소리를 위해 한국의 기타 공장이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임재춘은 또 미국 애틀랜타 기타의 본고장에서 6개월 연수도 받고 왔다는 자랑을 빼놓지 않는다. 오로지 기타만 만들면서 청춘을 보냈던 임재춘에게 정리해고는 청천벽력이었다.
-농성을 오래 하면서 속상할 때가 있으시다면 언제인가요?
대전에 있는 딸들이 아프다고 전화할 때 마음이 가장 아프다. 주말에 집에 들어가 딸들에게 미안해 먹고 싶은 걸 물어보면 "아빠가 돈이 어디 있어?" 하고 걱정을 해 준다.
- 딸들이 어떤 말들을 해 주나요?
아이들이 이렇게 묻던 때가 있었다.
"아빠, 싸움이 언제 끝나서 다시 기타를 만들 수 있을까? 끝나면 뭐할 건데?"
"지금이라도 다른 기타 회사 들어가면 안 돼?"
- 투쟁을 하면서 가장 두려우신 것이 있다면
우리들의 이 싸움이 우리들만의 싸움으로 끝나는 것은 아닐까? 세상이 정말 나아질까…. 의심스럽다
- 최종적으로 어디를 향해서 달려가고 있나요? 복직? 보상? 위로금?
비정규직 없는 세상. 정리해고가 없어지는 세상을 꿈꾸고 있다
혹자는 ‘기업이 이윤창출을 위해 그런 선택을 한 것을 왈가왈부할 수 있냐, 그게 현실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기업이 노동자의 권리와 생존권을 휴짓조각처럼 여기도록 방치한다면 과연 우리나라의 모든 노동자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우리는 모두 노동을 대가로 돈을 받고 살아가는 노동자다. 2017년 취재 후에도 여전히 광화문 농성장을 지키고 있는 콜텍 노동자들. 여전히 콜텍은 이들을 모르는 체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무엇이 그들을 버티게 하는지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말했다.
대법원에 판결이 나면 하나의 판례가 생기잖아요 이걸 뒤집기가 엄청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기 때문에 저희들이 만약 이 투쟁을 법원의 판결을 받아들이고 .. 우리의 삶을 찾아간다면.. 지금 대한민국에서 이뤄지고 있는 정리해고라는 것이 실질적으로... 노동자들을 억압하는 도구로써 정리해고 제도가 악용되고 있는 시점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피해는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돌아갈 수 밖에 없는거죠.
(콜트콜텍 기타 노동자 밴드. '콜벤'. 기타를 치지 못하던 그들이 이제는 직접 가사를 쓰고, 기타를 쳐서 부당해고의 억울함, 근로자의 애환을 노래하고 있다.)
이제는 다른 노동자를 위해서라도 그만 둘 수 없는 그들의 싸움. 마음이 아팠다. 해를 넘겨 또 다시 2018년 겨울을 차가운 거리에서 보내고 있는 콜텍 부당해고 피해자분들에게 글로써 응원과 관심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