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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나 Oct 30. 2020

아들 몰랐어? 아빠 몰랐어.

여전히 내가 모르는 것은 무엇일까?

 기말시험 준비로 밤늦게까지 깨어 있는 중3 아들이 기특하여 웬만하면 잔소리 본능은 잠재우려 노력 중이다. 하지만 게임 유튜브 동영상을 틀어 놓고 공부하는 아들이 계속 눈에 거슬린다. 내가 어렸을 때 음악 들으며 무슨 공부가 되냐고 탐탁지 않아했던 아빠의 잔소리가 떠올라 아들을 이해하려 애써보지만 나는 벌써 아들 방에 서 있었다.  

“아들, 엄마는 네가 유튜브 보며 공부하는 게 안타깝다. 집중도 어렵고 공부 시간도 오래 걸리니 너무 늦게 자는 것 같아서. 밤늦게 자면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힘들고 하루 종일 피곤하잖아.”

“난 늦게 자는 것은 괜찮은데 엄마가 일찍 자라 하는 게 더 스트레스야. 할 게 많은데 어떻게 일찍 자? 그리고 밤에 공부가 더 잘돼.”

 밤 1시가 넘어가면 머리가 멍해지며 집중이 되지 않았다는 내 경험을 전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몇 가지 설명을 덧붙였다. 야간 근무 급여가 왜 1.5배인지, 3교대 근무자가 어떤 질병에 잘 걸리는지 조목조목 아들에게 알려줬다. 하지만 아들은 날 믿지 못하는 눈빛으로 따지듯 묻는다.

“엄마가 밤 근무를 해봤어?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잉?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엄마는 3교대 근무하는 응급실 간호사로 10년을 일했어.  기억 안 나?”

“엄마가 우리 두고 밤에 일하러 간 적이 없었는데. 늘 밤에 같이 있었잖아?”


 아들이 나의 3교대 근무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지난 시간을 찬찬히 짚어보니, 둘째 아이 여섯 살쯤 내가 간호사를 그만두었다. 이브닝 근무가 늦게 끝나 밤 12시에 아이를 데리러 베이비시터 집으로 가면서 뚝뚝 흘렸던 눈물, 아픈 아이를 맡기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출근했던 밤 근무는 아들 기억엔 없는 과거였다. 3교대 근무 워킹맘으로 연년생 두 아들을 얼마나 힘들게 키웠는지, 내가 좋아했던 일을 왜 그만두었는지 아들이 알아주기를 원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뜬구름 잡는 이야기인지 생각하니 허탈했다.



아빠는 광부였다. 깜깜하고 덥고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었던 땅굴에서 석탄을 캐던 광부. 하지만 어린 나에게 광부는 아빠의 직업란을 채우는 명칭일 뿐이었다. 친구의 아빠도 광부였고 그 동네 사는 아이들의 아빠는 대부분 광부였으니 우리 아빠가 광부인 것도 당연하게 여겼다. 가끔씩 광산이 무너져 어느 집 아저씨가 며칠 만에 구출되었다는 뉴스로 동네가 난리가 났을 때에도 그 일이 나의 아빠까지 연결되지는 않았다. 월급날이면 동네 통장 집에서 튀겨 팔던 통닭 한 마리를 아빠가 시켜줬던 추억만 선명히 남아있다.


 6학년이 되던 해, 우리 일곱 식구는 아빠 고향인 광산촌 태백을 떠나 낯선 도시 대구로 이사했다. 대구에서 아빠는 더 이상 광부가 아니었고 중소기업 공장에서 일했다. 하지만 아빠가 직장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빠가 출퇴근하는 날이 쌓여 월급날은 꼬박꼬박 찾아오니 나에게 달라진 건 없었다. 그 돈으로 학교도 다니고, 월급날 멕시칸 치킨을 시켜 먹을 수 있었으니 그것으로 족했다. 매 학년 초 가정환경 조사서에 아빠의 직업에 써넣을 말이 있었으니 충분했다.


 고등학생이었던 어느 날 저녁,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 광부의 삶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아빠는 자신이 일했던 곳이라며 추억에 젖어 침까지 튀겨가며 나에게 설명했다. 여러 가지 감정으로 울컥했다. 그 삶의 고단함을 알지 못했던 미안함, 얼마나 힘들게 벌어 온 돈인지 몰랐던 철없음이었을 것이다. 부끄러움과 미안함에 목이 메었지만 그 이후로도 온전히 철이 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난 아빠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자세히 알려하지 않았다. 더 이상 광부가 아니었기에 괜찮다고 생각했다. 자식들의 무관심 속에서도 아빠는 참으로 성실히 출퇴근을 반복했고 정년퇴직을 했다. 퇴직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에서 아빠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몇 년 만 더 일 해 줄 수 없냐고. 늘 ‘을’의 입장이었던 아빠는 작업장에 환풍기를 설치해달라는 조건을 들어주면 근무하겠다고 조건부 수락을 했다. 회사에서 인정받은 자신의 성실성과 떳떳하게 권리를 주장한 사실을 자랑스러워하며 아빠는 자식들에게 재입사를 알렸다. 


 아빠는 늘 뿌연 세상을 보며 살았다고 한다. 아빠의 각막이 혼탁해지는 것도 모르고 세상이 뿌옇게 보이는 것이 공기 탓인 줄 알았다고 했다. 아빠의 직장이 독한 화공약품을 사용하는 곳이었고, 환기도 되지 않는 열악한 작업환경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뉴스에서 보도되는 발암물질 목록에 아빠가 자주 사용하는 화학약품이 포함된 것을 알고 난 후 아빠는 얼마 뒤 그 일을 그만두었다. 시간이 흘러 다시 선명한 세상을 보게 된 아빠는 자신이 얼마나 유해한 화학물질에 노출되었는지 깨달았다고 하였다. 간호사라는 딸이 참 죄스러웠다.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는 아빠의 삶은 나에게 당연한 것이었다. 밖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렸는지에 대해 자식이면서도 어찌 그렇게 무심할 수 있었을까? 어려서는 철이 없었고, 성장 후 에는 내 삶에 집중하느라 몰랐다고 변명해본다. 이에 비하면 내가 3교대 근무를 하며 얼마나 치열하게 워킹맘으로 살았는지 아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된다. 열여섯 아들이 엄마가 3교대 근무하며 자신들을 키웠다는 것을 몰랐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며 서운함을 느낀 난 도대체 뭐지? 철없는 딸이었던 엄마가 내 아들은 빨리 철들기를 바라는 모순에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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