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을 빼면 떠오른다.

이제는 힘을 빼야 할 때.

by 천지랄

대학 3학년, 집 근처 시립체육관에서 수영을 배웠다.

태생적으로 물을 두려워하던 내가 굳이 수영을 배우게 된 이유는 단 하나.

당시 과외를 맡았던 초등학교 1학년 남학생의 어머님이 일주일에 한 번은 활동적인 프로그램,

그중에서도 ‘수영’을 같이 해달라고 부탁하셨기 때문이다.


두 돌 막 지났을 무렵 찍힌 사진 속에는,

파도거품 이는 물살 끝에 선 아빠에게 안겨 “나 죽는다”며 빽빽 울어대는 여자아이가 있다.

여섯 살 즈음에는, 할머니 손에 이끌려 해변가의 기도원에 끌려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울고불고하는 것이 무서웠던 나는,

기도원을 몰래 빠져나와 혼자 해변에서 놀다가 방치된 그물에 걸려들고 말았다.

그 속에서 나는 생과 사를 오가는 사투를 벌였다.

다행히 그런 나를 지나가던 어른들이 구해 주어, 공포로 인한 질식사는 면할 수 있었다.


동물들은 상대가 자신을 무서워하는지 본능적으로 안다고 한다. 나는 물이 그렇다고 생각한다.

잔잔하던 물결도 내가 가까이 다가가면 일렁이고, 무섭게 철썩이며 덮쳐버릴 듯 나를 쫓아온다.

이런 내가 수영을 배울 수 있을까?


강사님은 수영을 배우게 된 이유를 물어왔다.

나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보다 물에 대한 나의 공포를 강사님에게 확실히 인식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얼마나 물을 무서워하는지, 얼마나 큰 용기를 내서 그곳에 오게 됐는지 대답했다.

겁에 질린 나에게 강사님은 나와 같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제가 장담하건대, 저에게 딱 3개월만 주시면 더 이상 물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실 겁니다.”


일주일에 세 번씩 수영장을 찾아 킥판을 붙잡고 열심히 발차기 연습을 했다.
한 달, 두 달이 지나도 나는 여전히 제자리에서 킥판을 붙들고 발차기 연습만 했다.
강사님은 물에 뜨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내 발차기가 아직 부족하다며 한사코 마다했다.

하루는 강사님이 자신이 옆에서 붙들어 줄 테니 시도해 보자고 강력히 말씀하셨다.
절대로 손을 놓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내고 결연한 의지로 생명줄 같은 킥판을 띄워 보냈다.


“자, 이제 힘을 빼시고 물이 이불이다~ 생각하고 편안히 눕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불이다~ 폭신한 이불이다~ 눕는다~ 편안히 눕는다~.’
몸이 뜨나 싶은 그때,

강사님이 손을 놓았다.

이불이 끝없는 심연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저 물의 밑바닥에서 연타래로 나를 끌어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대로 끌려가다간 죽을 수도 있겠다는 공포가 몰려와 온몸에 힘을 잔뜩 주고 허우적대니,

물살이 내 볼을 찰싹거리며 덤벼들었다.

발버둥 치던 다리에 얽힌 물살은얼기설기 엮인 그물처럼 꼬이고 엉켜, 움직임을 더욱 힘겹게 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강사님이 옆으로 다가오면 나는 본능적으로 킥판을 끌어안았다.

수영을 가르쳐 주겠다며 바다 한가운데로 끌고 나가 손을 놓았던 아빠도,
내 키를 훌쩍 넘는 깊은 물에서 나를 놓은 수영 강사도,

철석같이 한 약속을 눈 깜빡할 사이에 어겼다.
그 마당에 내가 믿을 수 있었던 건 물 위에 둥둥 뜨는 파란 킥판뿐이었다.


수영 강습을 시작한 지 3개월째가 되던 날,

강사님이 미안한 얼굴로, 그러나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며 다가왔다.

지랄씨, 혹시 수영을 꼭 배워야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네...?”
“저도 제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 수영을 가르칠 수 없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아요...”


그 뒤로 20여 년이 지나 다시 수영에 도전했다.

‘나는 수영을 배울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바꾼 계기는 이렇다.
우연히 제주에서 서핑을 배우게 됐는데, 그때 처음으로 물놀이가 꽤 재미있다는 걸 알았다.
물은 나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고 그동안 외면해 온 것이 억울할 만큼 재밌었다.
서핑은 내가 믿고 의지하던 킥보드가 몇 배로 커진 것이니,

고꾸라지고 넘어져도 보드만 잘 붙잡으면 곧 물 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서핑복과 보드가 있다 해도,

수영을 못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몇몇 순간이 다시금 수영장을 찾게 했다.


다시 수영장에 들어선 첫날,

긴장과 공포, 그리고 ‘내가 왜 다시 이곳에 서 있나’ 하는 혼란으로 새끼발가락에까지 힘을 주고 있었다.
그런 내게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있었다.

바로 “힘 빼세요"였다.

힘을 빼면 물이 나를 김밥 말듯 말아서 냅다 던져버릴 것만 같았는데, 힘을 빼라니.

이 무슨 무책임한 말씀들이신지!

그런데 힘을 빼보니 정말로 물이 나를 떠받들듯, 내 몸이 가라앉다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보통은 떠오르기 직전 가라앉을 때의 공포를 이겨내지 못해 허우적대다

물을 세네 번 꼴깍꼴깍 들이켜고는

‘역시 수영은 나랑 안 맞아’ 하며 뒤돌아서곤 했다.
하지만 이번엔 물을 믿고, ‘힘을 빼 보라’는 말을 그대로 해보기로 했다.
수면 위를 회 뜨듯 얇게 스치며 날치처럼 접영을 하고,

배를 뒤집고 누워 둥둥 떠다니는 사람들을 보니

아주 헛소리는 아니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올해 11월이면 수영을 시작한 지 벌써 2년째가 된다.

그 사이 수강반도 초급반에서 무려 '연수반'으로 바뀌었다.

처음엔 15미터를 가면 정말 잘하는 거라 생각했던 자유형도 이제는 컨디션이 좋을 땐 100미터를 해낸다.
중간에 일어서서 몇 발자국 걷다가 끝내는 게 아닌, 온전히 수영으로만. 그것도 사이드턴을 하면서 말이다.


절반의 절반을 가면서도 몇 번을 일어나 숨을 고르고 다시 나아가야 하는데, 이게 과연 될까?
팔에 신경을 쓰면 숨쉬기 박자가 엇나가고, 숨쉬기에 신경을 쓰면 발차기 박자가 엇나간다.
50미터의 절반밖에 오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숨이 차는데, 100미터를 할 수 있을까?
100미터를 했더니 폐가 터질 것 같은데, 400미터를 할 수 있을까?

‘이게 되는 건가, 할 수 있는 건가?’

끊임없이 솟구치는 의구심들을 끌어안고, 일단은 물속으로 뛰어든 결과다.


수영 고수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2년이나 했는데 고작 자유형 100미터라니, 돈지랄 아니야?’

하지만 내가 수영을 배우는 이유는 수영선수가 되기 위함도, 100미터를 남들보다 빨리 통과하기 위함도 아니다.
나는 수영을 통해 40여 년 묵은 물에 대한 공포와 이별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수영을 배운 목적을 충분히 이룬 셈이다.


언제부턴가 호텔을 예약할 때면 수영장이 있는지부터 확인한다.
예전엔 이용하지도 못할 수영장 때문에 방값이 비싸다며 투덜대던 나였다.

여전히,

“팔이 아니라 어깨를 돌려야 한다”, “다리 끝이 모아져야 한다”,

“머리를 좀 더 집어넣어야 한다”, “힘을 더 빼야 한다” 등등,

수많은 조언을 들어야 할 만큼 엉망진창인 수영을 한다.

그럼에도 나는 주변에 고수가 있든 없든, 낭창낭창 ‘나만의 수영’을 한다.
물이라면 식겁하고 도망가던 내가,

이제는 물속에 첨벙 뛰어들어 자유형인지 개헤엄인지 모를 영법으로 물과 어울려 놀게 된 것이,

한없이 자랑스럽다.


왜 그때는 할 수 없었던 일을, 지금은 할 수 있게 된 것일까.
힘을 빼는 일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이 때문인 듯하다.

그때의 나는 젊었다. 세상을 믿기보다 맞서 싸우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물에 나를 맡긴다는 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빠지지 않으려면 내가 통제해야 한다고 믿었고,

두려움의 크기 만큼 물에 맞서 온 힘을 다해 버텼다.


하지만 힘을 줄수록, 저항은 더 거세졌다.


지천명을 바라보는 지금은, 체력도 예전 같지 않다.

불의를 보면 단전 깊은 곳에서 치밀던 투지도 사그라든 지 오래다.

‘아유, 그래. 너도 사정이 있겠지.’ 혹은 ‘싸우는 것도 귀찮다.’ 싶어

물러서고 피할 때가 더 많다.

조금만 잠을 뒤척여도 다음 날 아침, 마시지도 않은 술의 숙취가 느껴진다.
세파의 바람과 풍랑에 맞서 봐야 뒤틀리고 엎어지는 쪽은 내 쪽이라는 걸 안다.
그래서 이제는 힘을 주기보다 차라리 힘을 빼고,

그 바람과 풍랑에 뱃머리를 맡기는 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렇게 나이들어 좋은 일도 있다.


또 하나, 이게 좀 결정적인 이유 같은데—물이 왜 그리도 무서울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빠져 죽을까 봐'였다.
아주 최악의 경우 익사일 텐데,

물수제비들이 천지삐까리인 수영장에서 내가 익사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배움에도 때가 있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싶다.
나이가 들면 정신도 흐릿하고 기억력도 떨어지니 젊을 때 배워야 한다고들 하지만, 수영만큼은 달랐다.
체력과 열정이 충만하고, ‘나는 나 말고는 아무 것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쥐던 젊은 때는

수영을 배울 ‘제때’가 아니었다.

내 딴에는 힘을 많이 빼고 수영을 한다고 생각하는 요즘도,

강사님은 아직도 뺄 힘이 남아 있다며 힘을 더 빼라고 주문하신다.

온전히 힘을 빼고 물의 흐름에 나를 내맡기는 느낌은 어떤 느낌일까.


별자리 차트에서 플루토(명왕성)를 만난다는 건,

힘을 다 빼고 납작 엎드려 달라는 건 다 내어주라는 뜻이다.
'내가 해결해야 해'하는 생각, '내가 했어'하고 내세우고 싶은 마음, “이것만은 안 돼” 하며 붙잡고 싶은 욕심,
이제까지 살아온 대로 살고 싶다는 변화에 대한 저항까지—그 모든 걸 내려놓고 항복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힘을 빼고 펼쳐진 두 손에

우주는 회복과 성장, 재생과 부활이라는 경험을 꼬옥 쥐어준다.


돌이켜보면,

각자의 삶의 계절에서 플루토를 만나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생각 없이 옥수수를 털었던 것 같다.
물속에서 빠져 죽을까 봐 힘도 못 빼는 내 주제에,

인생의 면면에서 달려드는 파도를 온몸으로 맞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건 우주에서 힘을 빼라고 하는 거예요.

우주와 삶이 나에게 더 좋은 것을 가져다줄 것을 믿고,

힘을 빼면 다 알아서 해줄 테니 힘만 빼시면 됩니다.”라고 했던 나의 리딩은

배움만 있고 앎이 없는 헛소리였던 것이다.


수영을 통해 '힘을 빼는 일'이 생각보다 간단치 않다는 걸 알게 된 지금,

우주에게 항복하라는 메시지를 온몸으로 받고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나의 리딩은 달라질 것이다.


힘 빼기 힘드시죠?
이제껏 내가 일일이 챙기고 살피지 않으면 삶이 돌아가지 않았는데,
그걸 하지 말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잖아요.

혹시 수영할 줄 아세요? 물에 뜨려면 온몸의 힘을 쪼옥 빼야 하잖아요.
이제까지의 게임이 육지에서의 게임이었다면, 이제 물속에서의 게임이 시작된 거예요.
게임을 하는 차원이 달라졌으니, 방법도 달라져야 하는데,
아직도 육지에서 쓰던 기술을 쓰려니 안 통하죠.

수중 게임을 끝내고 나면 아마 공중전이 올 거예요.
그때는 공기의 압력과 바람의 저항을 이용하는 기술을 배우도록,
우주가 또 한 번 “힘 빼”라고 요구할 거예요.
그러니, 인생에서 ‘되는 일 하나 없고, 예전에 쓰던 방법이 하나도 안 통한다’ 싶다면
그건 좌절할 순간이 아니라 기뻐할 순간입니다.
내 인생의 게임 레벨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됐다는 신호이니까요.

플루토의 키워드는 죽음, 재생, 부활이에요.
옛 싸움터, 옛 캐릭터, 옛 기술들은 죽고, 그 죽음의 잿더미에서 재생이 시작돼요.
새로운 싸움터에서 싸울 새로운 캐릭터로의 부활,
변태(transforming)의 과정은 고통스럽고 힘들겠지만,
그 끝에는 창공을 가르며 치솟는 나비의 환희와 기쁨이 기다리고 있어요.

영화 매트릭스에서 트리니티가 검은 구름 위로 뛰어오르며 아름다운 태양을 넋 놓고 바라보던 장면처럼,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갈 때 검은 구름은,
피할 수 없는 저항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 구름을 뚫고 넘어선 자만이 새로운 세계의 태양을 볼 수 있겠죠.
그 경험에 필요한 것이
‘내가 어떻게 해보려는 의지의 발현이 아닌, 그저 힘을 빼고 상황에 맡겨보는 것’이라면,
한 번 시도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Let go of the battle. Breathe quietly and let it be.
Let your body relax and your heart soften.
Open to whatever you experience without fighting.
-
Jack Kornfield
-
싸우려 하지 말고, 조용히 숨을 쉬며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라.
몸을 이완하고 마음을 부드럽게 열어,
경험하는 모든 것을 저항 없이 받아들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