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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망 Dec 04. 2023

선을 넘는 사람들

나를 찾아가는 여정

40여 년을 동고동락했건만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
앞에 나서기 좋아하면서도 덜덜 떨고 있기도 하고
조용히 구석에 숨어있으면서도 할 말은 하고 싶어 열불이 나기도 한다.



아빠는 개척교회 목사였다. 동네 작은 교회라 교인이 많지는 않지만 매주 여러 사람이 드나들었다. 나는 교인들의 축복기도와 귀여움도 받았지만 그만큼 주의를 받았다.
6살쯤이었다. 이웃에 사는 교회 오빠집에서 놀고 있었는데 오빠는 당시 고3이었다.( 왜 같이 놀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 정도 나이 차이면 노는 게 아니라 오빠가 나를 봐주는 입장이었는지도) 나는 꽤나 되바라진 편이었는지 오빠에게 뭘 모른다며 놀렸던 것 같은데 화가 난 오빠가 내 부모님에 대해 욕을 했다. 내가 아니라 부모님을 욕한 데 대해 나도 울컥했고 무언가 되받아칠 강력한 것이 필요했다. 그런데 며칠 전 저녁 집에서 엄마 아빠가 그 오빠가 시험을 못 쳤는지(학력고사 시대다) 대학에 못 가게 됐다고 걱정하며 이야기하셨던 게 생각이 났다.
"니는 대학도 못 가면서!"
그렇게 화를 내고 집에 들어왔는데 난리가 났다. 그 오빠의 어머니 권사님이 목사 내외가 애한테까지 남의 집 사정을 함부로 이야기하고 비하한다며 화가 나셔서 찾아오셨나 보다. 엄마, 아빠가 회초리를 들고 성난 목소리로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고, 왜 그런 이야기를 했냐 혼내셨다. 무서움에 기억도 안 나서 한참을 울다가 겨우 겨우 토해냈다.
"그 오빠가 엄마 아빠 욕 했단 말이야."
부모님은 잠시 당황한 듯싶었지만 절대 집에서 들은 말은 밖에서 하지 말라셨다. 그래서 그 후로 나는 입을 닫았다.



천성이 얌전하진 않았던 것 같다. 국민학교 저학년이었던 2살 차이 오빠가 친구들이랑 놀 때 옆에 끼어서 공을 가져다주며 같이 뛰어놀곤 했다. 한 번은 오빠친구에게 화가 난 일이 있었는데 그 오빠의 덩치가 나랑 큰 차이가 안 난다 싶었는지 멱살을 움켜쥐며 위협(?)을 했다. 얼마나 다부지게 돌려 움켜쥐었는지 그 오빠가 입고 있던 셔츠단추가 두둑 떨어지는 게 아닌가. 어라. 이건 아닌데. 친오빠에게 호되게 혼이 났다. 어디 어린 녀석이 오빠한테 대드냐고.


나는 태권도를 무척 배우고 싶었는데 절대 배울 수 없었다. 엄마가 당시를 회상하며 말하신다.
"니가 동네에서 태권도하는 OO 빼고는 다 이길 수 있다고 자랑했잖아"
합의가 겁난 부모님의 반응,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초등 3학년말 도시로 전학을 가면서 아이들의 새초롬한 분위기가 적응이 안 돼서 눈치를 보며 지내게 되었다. 쌀쌀맞은 아이들과 몇 번 소소한 다툼을 하고 나니 친구를 사귀려 애쓰지 않은 채 아웃사이더처럼 존재했고 그 시간을 메꾸기 위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니 조용해졌고 있는 듯 없는 듯 묻어 지내기로 했다. 그렇게 대부분의 학창 시절을 보냈다.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나면 신이 나서 수다를 떨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동기들이 기억하는 나는 조용했고 책만 보며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대학1학년 신입생 심리검사 결과지가 나오지 않았다. 결과지가 나오지 않은 사람은 상담센터를 찾아가 전문상담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심각한 우울증이라고 했다. 의아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동아리에서 먹고 자고 놀며 마음이 편해지니 자유롭게 어울렸고 나서서 사람들도 챙기게 됐다. 독특하고 웃긴 모습에 만화캐릭터 같다는 말도 자주 들었다. 어떤 이해관계없이 만나는 마지막 시기였다.



그리고 사회생활. 나대지 않는다. 분위기가 파악될 때까지 숨죽인 채 조용하고 깍듯이 예의를 지킨다. 사람을 좋아하고 만남과 헤어짐을 소중히 여기지만 먼저 다가가지는 않는다.

단톡방을 싫어한다. 반드시 답해야 할 정보를 제공할 뿐 읽는 것도 답하는 것도 불편하다. 오가는 말속에 혹여 무슨 실수가 있을까 트집 잡힐 거리가 있나 신경 쓰느니 침묵하는 게 낫다. 특히 오픈채팅방은 필요에 의해 들어가더라도 가끔 눈팅만 한다. 톡이 300+ 가 뜨면 부담스러워 읽지 않는다. 그런데 선을 넘는 사람들이 있다. 160명이 넘는 여자들이 글쓰기를 위해 모여 미주알고주알 이야기 나누고 끝없이 서로를 격려하며 서로의 뒷배가 되어주겠다 자처한다. 부담스럽다. 그래도 따뜻하다. 선 넘는 여인들의 힘으로 다시 글을 쓰게 됐다. 아직은 낯 가리고 친한척하기 힘들지만 같이의 힘으로 선을 넘는다. 열정의 탈선을, 두려움의 경계선을, 희망의 지평선을.

나의 한계선을.



사진출처: 언스플래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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