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제목이 이렇게 성의 없나. 근래 알게 된 애니메이션을 보며 처음에 든 생각이다. 제목대로 각 나라의 왕들이 힘으로 순위를 정하는 게 주요한 배경이다. 그럼 끝. 하면 재미가 없겠지?
주인공인 봇지왕자는 청각장애인이라 말을 할 수 없고 웅얼거리기만 한다. 말을 하지 않는 주인공이라니 어쩐지 남다른 설정에 호기심이 인다. 봇지의 아버지인 부왕 봇스도 남들처럼 힘이 센 사람이 되려 했는데 거인족이라 덩치도 일반인의 몇 배다. 그러나 거인족 부모에서 태어난 것답지 않게 봇지는 남들과 다를 것 없는 -엄마의 손가락만 한-덩치에 근력도 보잘것없는 꼬마다. 차기 왕이 되어야 할 첫째 왕자이지만 말도 못 하고 허약해 한참 부족해 보이는 봇지는 백성들의 근심거리다. 그러던 찰나 우연히 만난 그림자일족의 카게는 봇지의 웅얼거림을 알아듣는 유일한 존재지만 봇지에게서 비싼 옷을 갈취해 팔아먹으려는 생각뿐이다.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필요했던 봇지는 그런 카게를 더 만나고 싶어서 기꺼이 뺏겨준다. 매일 같은 장소에 나와 옷을 벗어주고 벌거벗은 몸으로 집까지 돌아가기를 반복한다. 하나라도 더 주려고 옷을 몇 겹 씩 겹쳐 입고 나오는 성의까지 보인다. 벌거벗은 1왕자가 들을 수 없다는 생각에 백성들은 눈앞에서 조소와 비난을 아무렇지 않게 던진다. 헤헤 속없는 웃음으로 성으로 돌아온 봇지를 몰래 지켜본 카게는 그가 실은 모두의 말을 이해하지만 사람들의 비웃음에도 눈물을 감추고 씩씩하게 마음을 다잡는 모습을 보며 곁을 지켜주겠다 다짐하게 된다. 카게도 유일한 그림자일족으로 사람들의 무시와 경멸 속에 어렵게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병사하면서 새엄마인 왕비의 주도로 이복동생 다이다가 왕위에 오르고 봇지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이어진다. 숨어서 몰래도와주던 카게는 친구가 되고 봇지가 강해져서 왕이 될 수 있도록 같이 모험을 떠난다.
봇지와 카게
전형적인 암투 스토리 같지만 캐릭터들이 다들 어딘가 따뜻하다. (요즘 흔한 '츤데레'라는 말은 일본어 색이 짙어 자제하겠다. 대신 겉바속촉이랄까? 겉차속따랄까?) 말을 못 듣는 봇지를 위해 -실은 입모양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악당들도 수어를 쓴다.
게다가 모든 캐릭터들이 전형적인 모습에서 조금씩 벗어나 있다. 봇지를 미워해 괴롭히는 것 같이 보이던 새엄마 힐링 왕비도 실은 봇지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해 강압적인 모습으로 비쳤을 뿐, 걱정하고 챙기며 어려운 순간마다 온 힘을 다해 봇지를 치료해 준다. 봇지의 무술 스승은 2왕자 다이다를 추대하고, 2왕자의 무술 스승은 봇지를 아끼고 지켜주기도 한다. 사람의 강점을 특화시켜 최강의 용사를 길러낸다는 봇지의 스승은 돈을 사랑하는 미남으로 자신이싸우는 것엔 소질이 없어서 시비를 거는 잡배들에게도 쉽게 무릎 꿇는다. 바람같이 전장을 누비던 그의 애마도 한가로운 세월에 살이 뒤룩뒤룩 쪄서 정상적인 속도로 이동이 불가하다. 백성들의 사랑을 받는 훌륭한 왕의 동상은 얼굴이 다 망가진 상태로 남겨져 있다. 다들 뻔하지 않고 조금씩 이상한 캐릭터들이라 순진한 봇지와 잘 어울린다.
아들의 몸을 빌려 다시 살아가려는 부왕 봇스나 과거의 상처 때문에 뒤틀린 삶을 살아가는 마법사 미란조의 무거운 이야기가 너무 갑작스럽고 쉽게 풀려버리는 듯한 부분은 있지만 대체적으로 아이와 보기에도 크게 부담스럽지 않은 내용이다.
그런데 이 애니메이션은 정식으로 한국에선 유통되지 않는다. 어느 OTT에도 올라와 있지 않아서 어둠의 경로로만 볼 수 있다. 그 까닭은 이 원작자인 만화가 토오카 소우스케가 혐한이라 알려졌기 때문이다. 실제 원작만화 113화에 등장하는 갸쿠자국과 호우마국의 이야기가 식민지 역사를 미화한다는 논란이 많다.
갸쿠자국은 빼앗기며 살아온 가장 가난한 나라로 대국과 인접하여 늘 지배당했다. 늘 누군가를 속이며 부모는 아이에게 증오를 가르쳐 갸쿠자인의 인간성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를 불쌍히 여긴 호우마국이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여 개혁을 이룬 결과 갸쿠자국은 놀랄 만큼 풍족해졌다. 그러나 갸쿠자국은 호우마국에 감사하는 대신 시샘하며 극악무도한 행동으로 되갚아 호우마국이 피폐해졌다는 것이다.
대충 지나가며 봐도 전체적인 내용이나 분위기가 한국과 일본을 비유하는 건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 우정과 사랑을 말하며 감동을 주고 약한 것이 약하지만은 않다는 이야기를 전하는 작가가 한편으론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함할 정도이나 이것이 일본의 현실이라는 생각도 든다. 일본인 대부분이 제대로 된 역사교육을 받지 못한 채 한국이 부당하게 일본을 싫어한다며 불편한 마음을 가진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 서점 한편엔 혐한도서들이 베스트셀러로서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공감한다는 것이다.
이런 배경탓에 이 애니메이션에 대해 이야기해도 괜찮을까 잠시 주저했다. 곰실대는 주인공을 보며 힐링하다가 갑자기 고구마 한솥 입에 쑤셔 넣은 답답함에 체할까 싶어 말이다. 자신의 약함을 넘어서는 이야기가 이것 하나인 것도 아니고. 그럼에도 다시 슬며시 내밀어 보이는 건 편견을 넘어서는 주인공 때문이다. 누가 봐도 모지라고 답답한 주인공 봇지가 편견과 한계를 이겨내는 이야기를 보다 보면 내가 가진 색안경이나 편집도 다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건 작가 또한 넘어서야 할 마음의 벽이 아닐까 싶다. 랭킹으로 판단하는 견고한 세상에서 딱 한 꼭지 틈새를 파고드는 주인공의 따뜻함과 우직함이 통하듯, 무너질 것 같지 않은 단단한 선입견이란 바위를 깨뜨리는 하나의 울림이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