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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망 Apr 04. 2024

가볍지만 가볍지만은 않은

유희열의 스케치북

방송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독 음악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싶다. 우리 집도 주말엔 음악 관련 프로그램이 틀어져 있으니 말이다. 음악 관련 예능, 방송이 꽤나 많다. 음악방송만 해도 10~20대들을 대상으로 하는 <뮤직뱅크>, <인기가요>, <쇼! 음악중심>, <엠카운트다운>부터 43년간 이어온 <전국노래자랑>, 30년 된 <열린음악회>와 연륜 있는 분들이 좋아할 흘러간 노래들이 주를 이루는 38년 차 <가요무대>도 있다. 음악방송들의 긴 생명력은 음악이 주는 공감과 치유 때문인 듯하다.



주말 저녁을 책임지는 음악 토크쇼가 지금껏 여럿 있었다. KBS 2TV에선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 <이문세쇼>, <이소라의 프로포즈>, <윤도현의 러브레터>, <이하나의 페퍼민트>에 이어 <유희열의 스케치북>이 6번째로 방영되었다. 13년 최장 기간 방영이었다. 유희열은 라디오 <유희열의 라디오천국>에서부터 특유의 입담으로 마니아층을 형성한 덕에 방송을 진행하게 된 경우다. 팬들 사이에 '감성변태'라 불리는 유희열은 신동엽을 잇는 섹드립 후계자로 비교적 좋은 이미지로 광고에도 출연했다. (실제 초, 중, 고 1년 후배이고 경복고 방송부 선후배 사이기도 하다.)



밤마다 유희열의 라디오를 들으며 킥킥거렸던 애청자인지라 <유희열의 스케치북(이하 스케치북)> 두 손 들어 환영했다. 라디오보다는 한결 순화된 분위기지만 유희열의 드립을 듣고 있으면 이게 음악 프로인지 개그 프로인지 싶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개그콘서트>와 함께 양대 개그 무대로 알려졌을 정도다. 2016년에는 '해피 유희열'이 새해인사로 사용될 정도로 그의 대중적인 인기는 대단했다. 당시 유희열을 잘 모르던 10대들은 예능인으로 아는 경우도 있었을 거다. 유희열은 특유의 입담과 진행능력으로 게스트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이끌어냈고 재미있고 진솔한 모습에 방청신청도 줄을 이었다.



가수들 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연예인(개그맨, 배우, 모델 등)이 출연해 다른 방송에서는 보기 힘든 새로운 무대를 선보이기도 했다. 당대의 가수들이 분장을 하고 나와 공연을 하던 크리스마스 특집무대들은 가수들의 흑역사로 회자되지만 시청자의 입장에선 희귀해서 더 재미난 모습이었다. 덕분에 많은 짤들을 생성하기도 했다.

스케치북 2019 크리스마스 캐럴   분장무대모음



다루는 음악의 폭 또한 넓어서 스케치북은 꽤나 호평을 받았다. 남진, 양희은과 같은 가수들이 나오기도 하고 손열음이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했다. 인디 뮤지션들을 무대에서 직접 만나는 유일한 방송이기도 했다. 루시드폴이나 페퍼톤스, 너드커넥션 등은 스케치북을 통해 많이 알려졌고, 그만큼 여러 인디밴드들이 서기를 꿈꾸는 무대였다.



또한 몸이 안 좋거나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대개 라이브로 진행하기 때문에 현장의 분위기를 오롯이 담았는데 방청객이나 시청자 모두에게 감동을 주는 공연들도 많았다. 짧지 않은 기간만큼 많은 멋진 무대를 만들었는데 특히 박효신처럼 방송출연이 적은 가수들의 레전드 무대 영상은 두고두고 돌려보는 자료로도 남았다.

박효신 야생화



악뮤와 박지선이 공동진행했던 '작사의 후예'라던가, 박지선이 방청객들을 인터뷰하던 '수질검사하러 왔어요'같은 코너들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재기 발랄하던 박지선의 모습이 생생히 기억에 남는데 스케치북은 대체적으로 사랑받지 않은 부분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티키타카의 재미를 위해 유희열이 관심을 가지거나 유희열과 친분이 있는 뮤지션들 위주로 나오다 보니 유희열이 게스트 섭외에 너무 관여하는 게 아닌가라는 비판이 일었다. 또한 점차 아이돌이 신곡 홍보를 위해 출연해 틀에 박힌 무대를 연출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고품격 음악방송', '믿고 보는 유스케'라는 명성이 빛을 바랬다.



코로나시기 무관중 녹화로 진행하기도 했지만 2022년 불거진 유희열의 표절논란으로 하차요구가 일어나며 600회를 끝으로 마무리됐다. 유희열의 팬이자 인디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애정하던 프로그램이 퇴색되어 간다 해도 아예 사라졌다는 데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논란이 아니었다면 좀 더 오래 보지 않았을까 하는 미련이다.



유희열은 공공연한 자리에서 다른 사람의 노래를 듣고 "이걸 어떻게 바꿔 써먹지?"라는 말을 장난처럼 던졌던지라 빌미를 제공한 만큼 표절논란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 같다. 당시 유튜버들이 악의적으로 노래 템포를 조절하고 메시업(두 곡이상의 음악을 섞어서 새로운 음악을 만듦)하여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기에 의혹 중 일부는 사실이 아니었을 수 있다. 하지만 해당곡에는 없는 원곡의 춤을 흉내 내어 췄다던가 하는 부분은 논란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도 표절에 대한 인정이나 사과 없이 논란에 대한 애매한 입장문만 내고 지나가버려서 안타깝다. 유희열은 본인만의 음악세계를 만든 음악천재로 불리며 음악계에 미친 영향력이 컸던 만큼 사람들이 느낀 배신감이 컸다. 레퍼런스 없는 음악은 없다지만 레퍼런스에 대한 기준이 너무 안이했던 것 같다. 자신이 소개해온 자신의 취향인 음악들 때문에 표절논란이 가중되었다. 음악인의 전문성이라는 기둥에 타격을 받은 그에게 스케치북 하차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스케치북이 좋은 평가를 받았던 까닭은 전문적인 음악과 소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었고, 전형적인 경직된 틀을 벗어나 조금 더 자유로운 시야로 음악을 대했던 덕분이었다. 음악은 이래야 한다는 편견을 벗고 다양한 시도로 소통하려는 방식이 신선하고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음악이 주는 감성은 전하면서도 그 음악을 듣는 사람들을 잊지 않은 덕분이었다. 말은 하는 내용보다 전하는 방식이나 분위기가 중요하다고 하지 않는가. 너스레 떠는 옆집 아저씨의 과하지 않은 농담에 마음이 풀리면 그 말을 더 귀담아듣게 되지 않을까. 권위적이지 않으면서도 듣기 편하게 전달하는 허허실실 같은 소통이 더 필요한 요즘이 아닐까 싶다.


오랜 공백 끝에 시즌제로 돌아온 음악 방송 <시즌즈>. 탁월한 한 명의 진행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의 취향을 소개하는 장으로 변모하여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된다. 때로는 전문적이지만 때로는 너무 친근하고 편해서 오래 두고 보고 싶은 모습이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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